Lesson 14
- 꽃시장은 가을 분위기가 한창이에요.
이번 주에 쓸 꽃들의 이름을 먼저 보낼게요.
언니도 이 가을을 맘껏 즐길 수 있으면 좋겠어요.
겹코스모스, 국화, 찔레, 백일홍, 컨트리블루스장미, 갈대, 핀쿠션, 촛불맨드라미, 인도공작..
이름을 확인했지만, 한창인 가을 분위기를 느낄 수는 없었다. 이름만 들어봤을 뿐,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꽃들이 대부분이었다. 빨간 단풍, 노란 은행잎, 길가에 핀 코스모스, 노을 지는 갈대밭이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을 이미지의 전부였다.
레슨을 받으러 가서 꽃들을 보곤, ‘한창인 가을 분위기를 이렇게도 즐길 수 있는 거구나..’ 속으로 생각했다. 다홍색 국화와 빈티지한 색감의 백일홍이 눈에 띄었다. 자주 만나던 카네이션과 리시안셔스도 톤다운된 꽃들의 영향을 받아 가을 분위기에 젖어든 것 같았다.
“이게 백일홍이라고요? 이름은 많이 들어봤는데,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영 딴판으로 생겼어요. 나는 희거나 빨간색 꽃인 줄 알았거든요.”
“백일홍은 흰색, 노란색, 빨간색.. 색깔이 다양해요. 백일동안 피어 있는다고, 오랫동안 시들지 않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래요. 오늘은 가을 분위기를 내려고 빈티지한 색감으로 준비한 거예요.”
“나는 찔레도 이름만 들어봤지, 이렇게 생긴 줄은 몰랐어요. 그래도 직관적으로, 붉은 열매를 보면 가을 느낌이 났어요.”
“맞아요. 언니가 지금 보고 있는 건, 꽃이 아니라 붉게 익은 열매니까요. 찔레는 9월 즈음에 열매가 붉게 익거든요.”
“그럼 꽃은 붉은색인가? 왜 그런 노래 있잖아요.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 ”
“붉은 찔레꽃이 있긴 한데, 드물어서 보기 힘들어요. 대부분은 하얗고 향이 진해요. 5월에 흔하게 볼 수 있으니까, 내년에는 눈여겨보세요.”
“작약 보고 싶어서 5월이 기다려지는데, 찔레꽃도 챙겨봐야겠네요.”
“레슨 시작할까요? 아웃라인을 잡으면, 제가 보고 피드백 할게요.”
내가 잡아놓은 아웃라인을 보고 스승님이 말했다.
“돔연습 했던 게 영향을 주고 있어요.”
“돔형태 만들 때, 꽃들을 쪼로록 줄 세워보기도 하고.. 한쪽 부분을 먼저 만들어도 보고.. 이렇게 저렇게 해 봤어요. 그런데 처음 아웃라인을 잡을 때, 전체 형태를 가늠해서 기준점을 잡는 게 중요하더라고요. 그 기준점을 참고해서 나머지 부분을 채우며 모양을 만들려고 무지 애를 썼거든요. 내가 또 그 생각만 했네요.”
“그게 보였어요. 바구니 윤곽을 따라 기준점을 잡더라고요. 그렇다 해도 오른쪽 아래 컨트리블루스장미는 너무 짧게 꽂혔어요. 돔연습을 하면서 아랫부분에 꽂던 그대로, 습관처럼 짧게 자르더라고요. 언니, 오늘 준비된 재료들을 다시 살펴보세요. 바구니는 언니가 연습했던 것보다 크고, 꽃은 풍족하고, 입체감을 살리면서 러프하게 꽂을 수 있는 소재들도 많아요. 작고 콤팩트하게 만들기엔 너무 아까운 소재들이 많아요.”
피드백을 받은 후, 짧게 꽂힌 컨트리블루스장미를 뽑으려 하자 스승님이 말했다.
“거슬려도 그냥 두세요. 언니도 은근 완벽주의 기질이 있는 것 같아요. 그게 어떤 면에서는 도움이 되는 부분도 있어요. 언니가 생각하는 대로 꽃을 다룰 수 없으니까 한 번이라도 더 연습하려 애쓰고, 아쉬운 부분을 개선하려 기록하고.. 그러면서 취미로만 꽃을 대할 때는 알 수 없는 어려움과 즐거움도 맛보는 것 같아요.”
“맞아요. 처음에는 쉽게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으니까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계속 생겨요. 나도 이 예쁜 꽃들을 아름답게 다루고 싶은 욕심이 나요.”
“꽃을 전공하고 호텔에서 일하다가 지금은 로드샵 운영하는 분이 있어요. 제가 좋아하는 플로리스트인데, 인터뷰 글을 공유할게요. 읽어보시면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그분 말로, 온전히 식물을 익숙하게 다룰 수 있는 경지가 되려면 매일 하는 기준으로 5년 즈음 걸린다고 해요. 15년이 됐는데도 꽃을 다루는 일이 지금도 새롭다며 열심히 하고 계세요. 언니는 꽃을 매일 다룰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지금은 마음의 여유를 가지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잘 안 되는 부분에 너무 몰입해서 재미가 없어질까 봐 걱정돼요. 그러면 꽃을 아름답게 다루는 발걸음이 더욱 더뎌질 수도 있어요. 오늘 작업 끝날 때까지 짧게 꽂힌 컨트리블루스가 거슬리겠지만, ‘꽃 한 송이도 익숙하게 다루려면 시간이 필요해..’ 하면서 아쉬운 마음을 그냥 흘려보내 보세요. 너무 꼭 붙잡지 말고. ‘어쩔 수 없지 뭐.’ 하면서 그냥 툭.”
살면서 같은 말을 들었던 적이 있다.
학교에서 근무했을 때도 아이들의 성장보다는 내 기준의 ‘완벽’ 에 몰입했던 것 같다. 1타 강사처럼 지식을 잘 전달하는 데, 공정하게 아이들을 대하는 데, 오류 없이 시험 문제를 내고 생기부를 작성하는 데, 실수 없이 담당업무를 처리하는 데.. 지나치게 에너지를 소진하는 내게 선배 교사들이 말했었다.
“김 선생, 꼼꼼하게 성의를 다해 일하는 건 좋은데.. 모든 일에 토씨 하나까지 틀리지 않으려 그렇게 잔뜩 힘을 들이면 이 일 오래 못해. 힘만 들고 재미도 없잖아. 학교 운동장에 핀 꽃들도 좀 보고, 애들이 실수하면 그냥 좀 흘려보내기도 하고.. 여유를 좀 가져봐.”
끝내 여유를 가지지 못했던 나는 학교에서 5년을 일하고 그만뒀다. 더 이상은 학교에서 일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10년 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이제는 조금 알겠다.
잘하고 싶어서 조바심이 날 때, 오히려 여유를 좀 가져야 한다는 것을.
아름다운 것들은 수많은 실수와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진다는 것을.
이날은 결국 준비된 재료들의 특징과 아름다움을 한껏 살려내지 못하고 아담한 바구니를 만들었다.
스승님이
“앞쪽에 핀쿠션 두 개가 보란 듯이 과하게 꽂혀 있는 걸 보면, 독특해서 언니 눈에 띄었나 봐요.”
라며 인도공작과 몇 가지 재료들로 입체감을 조금 살려주고 수업을 끝냈다.
“언니, 이번 주에는 아쉬웠던 부분은 생각 말고 가을 분위기를 맘껏 즐기고 만나요.”
지금도 나는 지난 레슨의 아쉬움에 발목이 잡히곤 한다. 유독 납작한 바구니를 만들고 난 다음 주에는 바구니를 채울 생각은 안 하고 꽃들이 바구니에서 튀어나올 것처럼 입체감을 주느라 정신이 없다. 그러나 아름다운 꽃과 오랜 시간을 함께 하고 싶은 나는, 앞으로도 더 많이 실수하고 수많은 아쉬움을 흘려보내며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가 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