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sson 15
- 이번 주에는 전에 언니가 얘기했던, 선물 받은 화병을 가지고 만나요.
꽃시장 나왔는데, 화병에 어울릴만한 소재들이 눈에 띄어요.
작년 생일, 화병을 선물로 받았다.
선물을 준 사람은 직장동료.
워낙 말수가 적고 개인적인 이야기는 잘하지 않는 그녀를, 누군가는 재미없는 동료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격의 없이 지낸다는 핑계로 무례한 말이나 뒷담화를 늘어놓는 동료보다 그녀가 좋다.
가끔, 힘겨운 상황이 생기면 그녀에게 이야기를 쏟아놓는다. 나를 속 터지게 만드는 누군가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 보면, 문득 깨닫게 된다. ‘외부에서 나를 힘겹게 한 게 아니라, 내 안의 코뿔소가 나를 들이받은 거였구나..’ 그러면 나는 차분하게 이야기를 들어준 그녀 앞에서, 멋쩍은 웃음을 짓고 한숨을 돌린다. 그녀와 함께 6년을 일하며, 듣는 힘이 얼마나 강력한 지를 배웠다.
상대방을 지켜보며 신중하게 고민하고, 당사자에게 필요한 것을 내어줄 줄 아는 그녀가 화병을 건넸다.
“생일 축하해요.”
“너무 고마워요.”
“꽃에 관해 이야기하실 때 너무 즐거워 보여요. 카톡 프사 보면 투명한 화병만 갖고 있더라고요.”
“선물 하나를 해도 어쩜 이렇게 사람을 심쿵하게 만드는지.. 내가 투명한 화병만 갖고 있다는 걸 생각도 못 했어요.”
“제가 꽃에 대해 잘 몰라서 어떨지 모르겠는데.. 좋아하실 것 같아서요.”
“저야말로 시장에서 꽃 사다가 몇 번 꽂아본 게 다예요. 화병이 너무 마음에 들어요. 고급스러워서 내가 감당을 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어요. 이 화병에 예쁘게 꽂을 수 있을 때까지 애를 써 볼게요.”
하고 받았다.
주말에 화병을 챙겨 레슨을 받으러 갔다.
“지난주에는 톤 다운된 꽃, 붉은 열매, 갈대를 가지고 가을 느낌을 냈잖아요? 오늘은 다양한 소재를 활용해서 가을 분위기를 낼 거예요. 지난주와 비교해 보세요. 같은 컨셉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경험도 언니한테 도움이 될 것 같았어요.”
“예. 이 꽃이 너무 예뻐요. 어떻게 설명하기가 어려운데.. 꽃잎 한 장 한 장의 라인이 예쁘기도 하고 멋있기도 한데, 그것들이 모여서 방향성이랄까? 운동감이랄까? 그런 게 느껴져요. 나를 바라보며 손짓하는 것도 같고요. 색은 고급스럽고, 눈으로 느껴지는 질감은 보들보들, 보송보송하고.. 엄청 사랑스럽네요.”
“언니는 참 비싼 꽃을 잘 알아봐요. 언니가 색감이 고급스럽다고 했잖아요? 수줍은 신부의 볼을 닮았다고 해서 브러싱브라이드라는 이름이 붙여졌어요. 꽃 이름도 그렇고, 물내림도 심하지 않아서 웨딩부케 만들 때 많이 사용돼요. 드라이되는 꽃인데, 말라도 예뻐요. 집에서 시드는 모습도 잘 관찰해 보세요.”
“그럴게요. 근데, 이것도 꽃이에요? 아니면 소재인가?”
“프로테아라는 꽃이에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나라꽃인데, 자연 상태에서는 열매가 불에 타야만 종자를 퍼뜨릴 수 있데요. 우리가 보는 건, 종자를 심거나 꺾꽂이를 해서 번식시킨 거예요.”
“특이하고 매력적이네요. 중후한 느낌이랄까? 줄기도 굵고, 꽃도 커서 무게감이 느껴져요. 근데, 묘하게 브러싱브라이드랑도 잘 어울리네?”
“프로테아속에 포함되는 식물들은 형태와 종류가 워낙 다양한데, 브러싱브라이드도 프로테아과 식물이에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왔고요. 저는 그냥 직관적으로, 오늘 전체 구성과 화병에 어울릴 것 같아서 데려왔어요.”
“이제 다른 꽃들도 소개할게요. 멘타장미랑 퀵샌드장미예요. 색이 비슷해서 구별이 어렵죠? 자세히 보면 화형이 달라요. 거베라, 달리아, 공작초, 클레마티스는 아시죠?”
“예. 낯익은 애들이네요.”
“우리가 먹는 당근의 꽃이 이렇게 예쁘게 생겼어요. 연한 자주색의 향등골나물꽃도 어린잎은 나물로 무쳐 먹을 수 있데요. 이 콩으로는 라인감을 잘 살려보세요.”
“하하, 이제 먹는 것들도 다시 살펴야겠어요. 어레인지 할 때 쓸 수 있을지.”
“맞아요. 주변의 익숙한 소재들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며 관찰하는 거, 엄청 중요해요.”
“이번엔 생각 없이 던진 말인데, 스승님이 진지하게 받네. 역시, 아는 정도에 따라 생각의 스펙트럼이 달라진다니까..”
“언니, 이 소재 매력적이죠? 이름이 유코스에예요. 줄기 하나, 잎 하나에서 다양한 색을 만날 수 있어서 멋스럽게 연출할 수 있어요. 오늘 우리는 초록과 연둣빛이 섞인 걸 쓸 텐데, 계절에 따라 붉게 물들어요.”
“전에 썼던 피토스포륨도 인상적이었는데.. 멋있는 소재들은 그 자체로도 매력이 크더라고요.”
“강아지풀처럼 생긴 녀석은 이름이 수크령이고, 핑크뮬리는 인터넷에서 인증샷 많이 보셨죠? 우리는 그렇게 많이 쓰는 게 아니라서 색이 도드라지지는 않을 텐데, 이게 들어가면 분위기가 달라져요. 억새는 아직 안 피었는데, 집에서 피는 거 보고 너무 지저분하면 정리해 주세요.”
“아하, 이게 억새구나. 억새를 폈다거나 안 폈다고 표현하는 것도 몰랐어요. 지난주에 갈대 쓰고 이번 주에 억새를 써서, 이제 두 녀석을 구분할 수 있겠어요.”
“화병 색이나 모양이 무난해서 다양한 어레인지가 가능하겠어요. 꽃도 돋보이게 할 만한 좋은 화병을 선물로 주셨네요. 근데, 화병 내부가 안 보이고 몸통에 비해 화병 입구가 좁아서 언니가 다루기에는 아직 어려울 거예요. 꽃을 꽂아보면, 지금 언니가 생각하는 것보다 크기도 클 거고요.”
“맞아요. 전에 시장에서 사다가 꽂았을 때, 공간이 많이 남았었요.”
“화병을 선물하신 분도, 마음이 참 예쁘실 것 같아요. 언니가 꽃 이야기를 하면서 지금처럼 행복한 표정을 지었겠죠? 그분 마음이 짐작이 돼요. 언니가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주셨을 것 같아요. 그래서 꽃도 화병에 맞춰 준비하고, 저희 작업하면서 쓰던 소재들도 많이 챙겼어요. 종류가 많아서 다루기 더 힘들 거예요. 오늘은 제가 많이 도와드릴게요. 학습적인 부담은 내려놓고 즐겁게 해 보세요. 이 가을을 맘껏 누려보세요.”
완성된 화병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스승님께 문자를 보냈다.
- 지금 소파에 앉아 화병을 보고 있는데.. 유럽 미술관에 있는 것 같아요.
내가 갔던 미술관들이 머릿속에 하나씩 떠올라요.
다시 유럽 가면, 이번에는 정물화들을 더욱 눈여겨볼 거예요. 꽃 시장도 많이많이 다니고.
월요일에 출근을 해서 동료에게 이야기했다.
“내 프사 봤어요? 작년에 선물 준 화병이 이렇게 멋진 화병이었어요!! 다시 한번 너무 고마워요. 덕분에 주말에 정말 행복한 시간 보냈어요. 아직 내 실력은 화병을 감당할 수준이 아닌데, 스승님이 많이 도와줬어요. 화병이 좋다고, 다양하게 어레인지 할 수 있게 또 수업한데요. 내가 선물할 수 있는 수준이 될 때까지 기다려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