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sson 8
- 일요일에 약속 있으세요?
금요일에 스승님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 아니요.
- 이번 주에 제가 행사 세팅이 많아서 레슨 진행하기가 어렵다고 했잖아요?
행사도 잘 끝나고 남은 꽃들이 조금 있어서, 언니만 괜찮으면 번외편으로 레슨을 진행할까 싶어요.
- 번외편이요?
- 언니의 레슨을 위해 준비된 꽃도 아니고, 미리 이야기된 것도 아니니까 수업 횟수로는 산정 안 할 거예요.
오셔서 그냥 편하게 연습하시면 돼요.
- 저야 고맙죠. 모레 봐요.
예전에는 다른 사람들의 호의를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다. 누군가 나에게 1을 주면 1을, 10을 주면 또 그만큼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내가 경험할 수 있는 세상도 매우 좁았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우리의 삶이 수치적으로, 정량적으로 살아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힘들던 시기에 A에게 받았던 도움을 나중에 비슷한 처지에 있는 B에게 주기도 하고, C에게 받았던 호의를 15년이 지난 후에 다시 갚기도 했다. 누군가에겐 받기만 했고, 다른 누군가에겐 주기만 했다. 주고받는 것이 자연스러워지자 이전에 비해 더 많은 경험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내 삶에는 그만큼 더 고맙고 즐거운 일들이 많아졌다.
다른 사람들의 선의가 부담스러웠던 건, 나의 시간과 돈과 마음을 다른 누군가와 나누는 것에 인색했기 때문이다. 감당하기 힘든 부탁에 대해 거절할 수 있는 힘이 생기고, 누군가에게 호의를 베풀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도움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행복을 공유하는 경험이 쌓이면서 부담이 줄어들었다. 그래서 스승님의 호의도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꽃이 예쁘고 재미있는데, 호락호락한 취미는 아니잖아요. 재료비가 워낙 비싸니까요. 그래도 지금은 가격이 안정적인데.. 무슨무슨 데이, 어떤 시즌, 날씨 변수, 심지어 무역상황에 따라 꽃값이 금값이 되는 경우도 있어요. 이렇게 기회가 될 때마다 한 번이라도 더 접해보면 좋아요. 이런 기회가 흔하진 않거든요. 작업할 때 꽃을 야박하게 쓰지는 않지만, 마냥 남을 정도로 준비할 수는 없잖아요. 이번에는 워낙 여러 행사가 있어서 꽃이 남았어요.”
“주중에 일도 많아서 피곤할 텐데.. 고마워요.”
“맞아요. 피곤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죠. 근데, 미카엘라 언니는 우리언니랑 친하고..”
“내가 지인찬스를 제대로 쓰고 있네요.”
“맞아요. 그런데, 아무리 언니가 우리언니랑 친하다고 해도 본인 마음이 없으면 의미가 없잖아요? 언니가 레슨 때마다 재미있고 진지하게 임하는 데다, 끝난 후에 정리까지 하는 걸 보면서 처음 꽃 배울 때 생각이 났어요. 남는 꽃이 생기면 사장님께 써도 되는지 여쭤보고 꽂았다 뽑았다 하면서 몇 번을 연습했던 시절이요. 처음 6개월은 점심시간도 아까워서 김밥만 먹었어요.”
“어쩐지!! 실력이 예사롭지 않은 데는 다 이유가 있었어. 난 못 따라가겠네.”
“언니는 본업이 있잖아요. 저한테는 많이 익숙해진 것들을 반짝이는 눈빛으로 대하는 언니를 보면, 저도 새삼스러워요. 제가 하는 일의 가치랄까? 소중함을 느낄 수 있어서 좋고요. 언니도 저에게 좋은 에너지를 주고 있어요.”
“이름 알려드릴게요. 지난주에 썼던 제임스스토리, 기억하시죠? 투베로사도 우리 전에 썼어요. 이 녀석은 캄파넬라장미고, 거베라랑 튤립이 한 송이씩 있네요. 소재로는 설유화잎, 쏠리, 보리사초, 은엽아카시아가 있어요. 나머지는 모두 있던 꽃이고, 양이 부족할 것 같아서 장보며 메리골드만 구입했어요. 오늘은 제한적인 조건 속에서 최선의 결과물 만드는 연습을 한다고 생각해 봐요. 꽃일을 하다 보면 상황에 따라 대안적인 선택을 해야 할 때가 많아요. 저도 원래 레슨을 진행한다고 하면 지금처럼 꽃을 구성하지도 않았을 테고, 메리골드를 구입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제임스스토리와 색감이 연결되면서 다른 꽃들과의 조화를 크게 해치지 않을 녀석으로 이 녀석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무엇보다 가격이 많이 저렴했거든요.”
“이런 게 꿀팁인데요?”
“오늘은 꽃의 양도 많지 않은 데다 화기도 가로로 길고 낮아서, 그동안 연습했던 걸 적용하기 어려울 거예요. 그러면 자칫 완성이 안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제가 오른쪽에 아웃라인 잡는 것을 보여드릴 테니 순서, 크기, 속도를 보세요. 언니는 아직 속도보다는 기본기와 정확도를 익히는 게 중요해요. 다만, 숙달이 되면 빠르게 꽂는 것도 경쟁력이 될 수 있어요.”
“우와, 내가 몇 십분 조몰락거리는 걸 어쩜 이리 눈 깜짝할 사이에.. 진짜 뭐에 홀린 기분이라니까..”
스승님은 번외편이라며 편하게 연습을 하라고 했지만, 수업은 평소와 다름없이 진행이 됐다. 나는 계획도 없이, 한 송이밖에 없는 꽃들을 너무 짧게 잘라버렸다. 넣고 싶은 자리에 두지 못한 거베라가 다른 꽃들의 자리에도 영향을 줬다.
집에 돌아와 스승님께 문자를 남겼다.
-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지금까지 만든 작품 중에 아쉬움이 가장 많이 남는데, 애정은 더 가요.
스승님이 마음 써 준 것도 그렇고.. 학습적으로 배울 점도 많아서 참 귀한 시간이었어요.
이후로도 스승님은 나에게 고마운 제안을 종종 했다.
- 지난번에 돔 형태 만드는 거 어려워했잖아요? 이번 주에 카네이션이 많아서 생각났어요. 남는 꽃은 아니고요.. 시간 괜찮으면 재료비만 내고, 와서 연습하면 어떨까 싶어 연락드려요.
- 이번 주에 행사 작업을 했는데, 업체에서 끝나고 꽃을 수거해 달라는 연락이 왔어요. 이것도 흔한 기회가 아닌데, 같이 가서 쓸 수 있는 꽃 챙겨 연습하면 좋을 것 같아 연락드려요. 저랑 함께 일하는 사장님 봤었죠? 언니 인상이 좋다고, 착하게 생겼다고, 챙겨주고 싶데요.
그냥 와서 연습만 하라면서도 막상 가면 여느 레슨과 다름없이 알려주는 스승님의 호의를 나는 고맙게 받았다.
행사가 끝나고 꽃을 그냥 버리면 더 편할 텐데, 내가 연습할 수 있도록 챙겨주는 스승님과 사장님의 선의를 감사히 받았다.
앞으로 꽃을 얼마나 잘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내가 받은 도움의 씨앗이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꽃으로 예쁘게 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