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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냥이 Oct 19. 2023

인문학으로 먹고살기로 했다

인문학을 업으로 삼는다는 것

이곳은 경희대학교 평화의 전당.

수 천석의 객석을 채울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무색할 만큼 강연장은 대중들로 꽉 찼다. 청중의 기대 속에 연사가 무대를 걸어 나온다. 10주에 걸쳐 진행될 인문학 대중강연의 시작이다.


섭외에 꽤나 공을 들였던 이 연사는 한사코 출연을 고사해서 갖은 애간장을 태웠더랬다. 그런데 이 분, 청중 앞에 서니 내게 보여준 냉담한 표정은 온데 간데없고 연신 함박웃음이다. “아니, 이 저녁에 얼마나 할 일이 없길래 여기를 다 오셨어요?” 연사의 능글맞은 농담에 강연장이 순식간에 밝아진다. 능숙하게 분위기를 띄운 연사가 준비해 온 강연을 차분히 이어나갔다. 그러자 금세 조용해진 청중들.


어느덧 강연이 끝이 났다. 강연장을 빠져나가는 청중 얼굴에 미소가 걸린 걸 보자 그제야 마음이 놓인다. 연사도 오늘 강연이 꽤 만족스러웠는지 강연이 끝난 후에도 강사대기실을 좀처럼 떠나지 않는다. 강연을 함께 준비한 방송 제작진도 연신 싱글벙글이다. 시종일관 시니컬했던 PD가 말한다. "방송 그림 잘 나오겠는데요." 

나는 조용히 웃어 보였다. 몇 개월간 까맣게 타들어간 가슴 한구석에서 뭔가가 벅차오름을 느끼면서.

    

돌이켜보면 이 순간이었던 것 같다. 드디어 마음 쏟을만한 일을 찾았구나라고 생각했던 순간. 일하는 재미를 느끼면서도 세상에 도움 될만한 일을 오랫동안 찾아 헤맨 나였다. 그런데 그 일이 지금 여기, 눈앞에 있었다. 그 순간 직감했다. 이 일을 쉽게 놓지는 않겠구나. 이 날 느꼈던 반가움과 설렘은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명히 남아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그날을 기점으로 7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인문학 재단에서 일해왔다. 이곳은 모 기업 CEO와 뜻을 함께한 인문학자가 힘을 합쳐 설립한 국내 유일의 비영리 인문학 지원 재단이다. 여기서 나는 인문학 대중강연을 총괄했다. 짐작컨대 적지 않은 이들이 이곳의 인문학 강연을 한 번쯤 들어봤을 듯하다. 지난 수년간 유튜브, 언론, 방송, 출판 등 각종 매체에 꾸준히 소개되면서 대중의 인지도가 적잖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참고로 인문학계에서는 보기 힘든 유튜브 구독자 40만과 강연을 책으로 엮은 단행본이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

   

앞으로 써 내려갈 이야기는 어쩌다 인문학을 업으로 삼은 평범한 인간의 이야기다. 이 시대가 몰라주는 인문학의 가치?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 그런 장엄한 이야기는 감히 떠들 주제가 못된다. 그보다는 하등 돈 안 되는 인문학으로 먹고사는 일의 기쁨과 슬픔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인문학을 대중과 연결하는 일을 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인문학과 괴리된 삶을 사는데 대한 부끄러움, 인문학을 끄적이며 찾아온 삶의 고민들, 인생의 힘든 시기에 절감했던 인문학의 쓸모없음, 그래서 한동안 이어졌던 방황, 그럼에도 인문학에서 간간히 받은 위안으로 여기까지 오게 된 이야기를 전해보고자 한다. 

   

인문학을 밥벌이로 삼는다는 건 생각만큼 고상하지 않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문학을 업으로 삼는 순간 물질적 풍요와 작별할 각오를 해야 한다. 나 또한 이상과 현실의 간극에서 참 많이 방황했다. 그런데 그 쉽지 않은 길을 건너가는 재미와 보람이 제법 쏠쏠하다. 풍족하게 벌진 못하지만 삶을 의미 있게 꾸려가고 있음을 느끼며 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이나 영상을 통해 인문학 강연자의 목소리는 어디서나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강연을 기획하고 준비한 사람들의 목소리는 찾아보기 힘든 것 같다. 세상에 보탬이 되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강연 무대 뒤편에서 뛰어다니는 이들의 이야기 말이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이들의 이야기가 어쩌면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흔들리고 지친 당신을 위해 오늘도 머리 터져라 고민하며 잠 못 이루는 이들이 있다. 인생살이에 지친 당신을 위해 이름 모를 누군가 삶의 안락함도 포기한 채, 밤낮으로 고심하고 있다는 것은 조금은 힘이 나는 일이 아닐까? 이들의 치열한 고민이 누군가에게 아주 작은 위안이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더 바랄 게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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