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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냥이 Oct 19. 2023

산책하듯 살면 안 될까요?

내게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는다면

걷는 것을 좋아한다. 그것도 정처 없이. 목적지가 정해진 걸음은 나를 피곤하게 한다. 몇 시까지 도착해야 한다는 제한이라도 있으면 더욱 그렇다. 그저 마음 내키는 대로 발길 닿는 데로 정처 없이 걸을 때 나는 가장 편안하다. 여유로운 산책길은 세상 구경하는 재미를 알려준다. 오늘 구름은 많이 찌그러졌네. 배낭을 메고 걷는 저 아저씨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늘 같은 산책길에서 마주치던 강아지가 오늘은 보이지 않네. 사소한 온갖 풍경이 궁금하고 재미있다. 소소한 무언가를 기웃대는 산책의 기쁨을 나 혼자만 느끼는 건 아닌 듯하다. 『시와 산책』에서 한정원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고양이들이 밤에 몸을 누이는 장소, 열매를 기대해 볼 수 있는 나무, 울다가 잠든 사람들의 집... 산책할 때 내가 기웃거리고 궁금해하는 것들도 모두 그렇게 하찮다. 그러나, 내 마음에 거대한 것과 함께 그토록 소소한 것이 있어, 나는 덜 다치고 오래 아프지 않을 수 있다.  『시와 산책』(25쪽)


흔히 인생을 마라톤 경주에 비유하곤 한다. 인생은 오래 달리기야, 결승점에 골인할 때까지 지치면 안 돼. 나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고개가 갸웃해진다. 인생에 반드시 결승점이 있어야 할까? 인생도 산책하듯 그저 정처 없이 걸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주제로 대중 강연을 준비할 때였다. 인문학에서 던지는 삶의 질문을 선정 10주간 진행하는 시리즈 강연이었다. 10회에 걸쳐 '어떻게 살 것인가' 질문을 어떻게 변주하고 구성할지를 두고 내부에서 치열한 고민과 토론이 이어졌다. 하지만 나는 도통 회의에 집중할 수 없었다.


나조차도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답을 찾지 못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당시의 나는 방향성을 잃고 갈팡질팡 하고 있었다. 사기업에서의 커리어를 접고 비영리 재단을 택한 데는 나름의 사명감과 신념이 있었다. 돈 는 일보다 사회에 도움 되는 일을 하자는.


그러나 몇 개월도 지나기 전에 단단했던 결심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정말 옳은 선택이었을까. 마음이 앞서 잘못된 판단을 내린 건 아닐까 하는 의심과 회의가 하루에도 수십 번씩 휘몰아쳤다. 설렘과 기대를 안고 들어왔건만 이곳은 어쩐지 내 길이 아닌 듯했다. 실제로 일해보니 거창한 사명감이 내게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비영리 재단의 열악한 근무 조건과 수줍은 연봉도 한몫했다. 각오는 했지만 이 정도라니. 어느 날은 강연 준비를 하다가 쓴웃음이 났다. 나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는데 남들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다니.              

  

기나긴 회의에 야근을 하고 돌아오는 길. 우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영화 《인디에어》를 보았다. 이 영화는 322일 비행기를 타는 한 남성의 인생을 담고 있다. 내용은 이렇다. 라이언 빙햄은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해고하는 일을 한다. 그래서 그가 만나는 사람은 언제나 화내고, 울부짖고, 원망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이다. 그를 둘러싼 상황도 우울하다. 마음 둘 곳 없이 떠돌던 그는 마음이 끌리는 여성에게 용기 내 달려가지만 그녀에게는 이미 가족이 있다. 그녀는 말한다. "당신은 그저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필요한 엑스트라일 뿐이에요"


자신에게 해고당한 이의 자살 소식을 들은 의욕 가득했던 후배는 사표를 냈다. 가족의 울타리에서 자신의 자리는 사라진 지 오래다.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 그의 삶은 삭막하고 갑갑하다. 그럼에도 빙햄은 비행기에 올라탄다. 방향 잃은 걸음으로. 누군가는 못 버티고 떠난 이 일을 계속해야 할지,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건지 혼란스럽지만 일단 비행길에 오른다. 갈 곳 잃은 눈빛을 하고. 영화는 그렇게 끝이 난다.        

      

결말이 뭐 이래, 삐죽 한숨이 나왔다. 영화가 메시지가 있어야지 뭐 이러고 끝나. 한참을 투덜대면서도 좀처럼 영화에서 떠나지 못했다. 빙햄의 눈빛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은 탓이다. 흔들리고 답답해 보였던 빙햄의 눈빛. 갈 곳 잃은 듯한 무거운 걸음. 그 불안한 눈빛과 걸음으로 탑승구를 찾아 헤매는 빙행의 모습에서 어쩐지 지금의 내 모습이 읽혔다. 엔딩 크레딧을 하염없이 바라보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도착해야 할 목적지라든지 확실한 메시지 같은 건 애초에 없는 게 아닐까. 영화의 지지부진한 결말이 보여주듯이.


그렇게 보면 사무엘 베케트의 유명한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끝내 고도가 오지 않은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평생을 간절히 기다렸지만 끝내 오지 않은 무언가를 계속해서 기다리는 여정 자체가 인생이라고 베케트는 말했다. 사무엘 베케트와 빙헴은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 모른다. 어쩌면 목적지에 영원히 닿을 수 없다 해도 그저 눈앞에 놓인 길을 따라 걷는 것, 그래서 불안하고 흔들리고 알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인생인 거라고.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었다. 목적지가 없다면 나는 무얼 해야 하나.


조용히 생각 하나가 스쳤다. 갈 곳 잃은 눈길로 비행길에 오른 빙햄처럼 살아보자고. 이 길이 아닌 듯해도 일단 정처 없이 걸어보자고. 걷다가 이 길이 아닌가 잠시 숨도 고르고, 저 길에는 무엇이 있을까 기웃거리기도 하고 이 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하면서. 이정표가 보이지 않는다면 없는 대로 걸어보는 거다. 그냥 걷긴 심심하니까 길에서 마주치는 소소한 풍경을 눈에 담으면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간절히 기다렸으나 끝내 오지 않은 고도는 아마 내게도 오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인생이므로. 그럼에도 일단 정처 없이 걸어보겠다고 다짐한다. 그것이 인생이므로.


갈피 잃은 마음으로 준비한 《어떻게 살 것인가》강연은 매회 천여 명이 참석하며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삶은 방향을 찾고 있다는 반증일 테다. 다른 사람도 나와 비슷한 고민을 품고 살고 있다는 사실이 한편으로 작은 위안이 됐다. 나 혼자 하는 고민도 아닌데 괜히 심각해지지 말자. 꽉 찬 객석을 보며 다시금 다짐했다.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 방향이 없다면 없는 대로 걸어보는 거야.


그렇게 오른 산책길이 벌써 7년째다. 인생은 참 알 수 없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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