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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 Mar 17. 2019

아낌없이 아름다웠다

운주사 그리고 무등산

                            
                                 무등을 보며
                                                            - 서정주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이 그 무릎 아래 지란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엔 없다.

목숨이 가다가다 농울 쳐 휘어드는
오후의 때가 오거든
내외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애비는 지어미를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 구렁에 놓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라도 자욱이 끼일 것이다.

  "너도 경우에 따라서는 이렇게라도 해서 살아야 한다."

시대적인 삶에 있어서 존재 방식에 대한 비판이 있었지만 이러한 표현으로 나는 시인이해하려 했었다.

시를 가르칠 때마다 시어에서, 시구 마디마디에서, 시적 표현의 구석구석에서, 울컥한 존경심으로 언제나 벅찼다. 마음을 다하고 공을 들여서 아이들에게 그분의 시적 세계를 전달했었다. 재능, 미감, 지향점이 참 멋진 분이었기에.


잃어버려선 아니 될 가치, 의연한 무등은 존경하는 시인의 시로 인해 오래전부터 마음에 깊게 품었던 산이었다. 마음에 비해 발길 인연이 쉽게 닿지 못했었다.



화순에 먼저 들러 운주사 천 탑에 경배하였다. 사리가 없을지언정 탑들은 모두 부처님 무덤이리라. 탑만이 탑이 아니라 쌓은 마음도 다 탑이리라. 나도 마음을 포개어 탑을 만들었다.

운주사에서
                     -정호승

꽃 피는 아침에는 절을 하여라
피는 꽃을 보고 절을 하여라
걸어가던 모든 길을 멈추고
사랑하는 사람과 나란히 서서
부처님께 절을 하듯 절을 하여라

꽃지는 저녁에도 절을 하여라
지는 꽃을 보고 절을 하여라
돌아가던 모든 길을 멈추고
헤어졌던 사람과 나란히 서서
와불님께 절을 하듯 절을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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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달다
                     -정호승

운주사 와불님 뵙고
돌아오는 길에
그대 가슴의 처마 끝에
풍경을 달고 돌아왔다
먼 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 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

시인들의 시심을 자극할 만한 운주사였다. 

와불(瓦佛)의 신비로운 이야기, 단청으로 스며들던 풍경의 고운 소리, 선인들의 켜켜이 쌓인 소망들, 운주사 견문들이 내 안에서 숙성되어 시 같은 기억 문양을 만들 것이다. 


느리게 또 느리게, 혼자서 걷고 또 걷고 싶은 탑의 길이었다.

무유등등, 무등산

화순과 광주에 걸친 무등에 들었다.

반야심경에서 절대 평등을 말한 '무유등등(無有等等)'이 무등산 이름의 유래임을 산행 출간물에서 본 적이 있다. 천왕봉ㆍ지왕봉ㆍ 인왕봉을 거느린 무등산은 우주의 3 재인 천ㆍ지ㆍ인에 근간한 이름이었음도 알게 되었다.


'모든 쇠붙이는 가라'를 외치던 빛고을의 저항은 무등산의 저력이고 가르침이었을까. 

산세(山勢)수세(水勢)가 사람을 낳고 기르고 가르친다는 말은 육신의 원소가 흩어져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 다음에야 깨닫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름다움은 감동이다.

산행다운 산행이 아니었던 탓인지 모르겠으나, 기복이 심한 경사도 없었고 산마루는 완곡하게 둥글고 어질었다. 너덜길 돌들납작납작하고, 반듯반듯하고, 편안했다.

때로는 질척거리는, 눈 녹은 길을 따라 걸으니 내리막길이 길게 느껴졌다. 그러나 계곡 물소리의 푸근함이 지루하다는 느낌을 이내 상쇄시켜 버렸다.

  '뭐가 그리 좋은지 물소리조차 다르오?'

그랬다. 분석 없이 다르고 좋았다. 

마을에서는 비가 되고 고도가 높아진 산에서는 눈이 되었다. 헤드랜턴 빛을 따라 너덜길을 걸어 올랐다. 손끝이 시렸다.


새들이 잠에서 깨어나고, 규봉암 관음전 뒤로 병풍처럼 둘러친 주상절리가 아침 햇살에 빛났다.

절간 툇마루에 걸터앉아 처마 끝으로 툭툭 떨어지는 눈 녹은 물소리를 들으며 두텁떡과 한라봉 하나로 두어 시간 동안 허기졌던 속을 채웠다. 

설경을 짐작하못했기에 아이젠을 아예 차에 두고 내렸다.

그런데 장불재에서 뜻밖의 풍경을 만났다. 바람에 날아온 눈가루가 가지에 내려앉아 순백의 꽃으로 핀 나무, 상고대!

눈앞에서 저토록 지순한 풍경이 되어 마음을 휘저어 놓는, 아름다운 상고대였다.


심장이 부풀어 오르는 듯 풍경에 압도당했다. 입석대와 서석대를 지난 후에는 아예 상고대 터널이었다. 

내리막길을 향해 걸음을 옮기노라면 하늘은 하얀 꽃가루를 연이어 장식했다. 너덜길은 얼음을 채 썰어 인절미 위를 장식한 창작 요리 같았다.

편안한 사람 같은 산이었다. 그 안에서 마음은 7시간을 콩닥거리며 아름다운 서석대, 입석대, 광석대를 두루 누비었다.

품었던 마음에 손색없이 상응해 준 무등이었을까. 아낌없이 아름다웠다.

                        

                                        -2019. 03.16.(토) -03.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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