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15일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
해마다 여름이 한창일 때면 어서 이 숨 막히도록 뜨거운 계절이 끝나길 바라면서도, 막상 귀뚜라미가 울기 시작하면 무엇인지 모를 아쉬움이 마음속에 가득하고는 한다. 이곳에 있는 동안 시간이 빨리 가기를 원한적은 없지만, 떠나는 날이 되니 왠지 모르게 나는 여름의 끝에 서있는 기분이었다.
해가 지기 시작하는 메콩강에는 야시장 장사 준비로 한창이었고 사람들이 넘쳐났다. 한쪽에서는 음악에 맞춰 사람들이 단체로 에어로빅을 하고 있었고, 계단에 앉은 사람들은 강을 바라보며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나도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강을 바라보았다. 바다가 없는 이곳의 라오스 인들에게 메콩강이 가지는 힘과 의미는 어떤 것일까. 중국과 태국, 베트남 등 다른 국가들에 둘러싸여 끊임없는 침략과 전쟁을 겪어야 했던 세월은 라오스 인들에게 어떤 흔적을 남겼을까. 이 순박한 사람들의 나라는 언제쯤 가난에서 벗어나게 될까.
빨갛고 동그란 해가 강너머에서 서서히 지기 시작했다. 한 백인 여자는 요가를 하며 손을 높이든 자세로 해를 바라보았다.
마지막 저녁식사로 나는 신닷이 먹고 싶었다.
툭툭이를 타고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거리를 달려 식당에 도착하니 규모가 꽤 큰 식당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큰 연못주위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아주 능숙한 척 주문을 한 뒤 습관처럼 주위를 둘러보았다. 맞은편 테이블에는 정복을 입은 젊은 여자들이 단체로 앉아 열띤 대화를 하며 식사를 하고 있었다. 모두들 세련되고 상당한 미모를 갖추고 있어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고기를 구워 채소와 함께 소스를 찍어 먹으니 역시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마지막이니 당연히 비어라오도 빠질 수 없지. 한잔 가득히 잔에 부어 마시며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비어라오의 청량감에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한참 혼자서 마지막 만찬을 씩씩하게 하고 있을 때, 정복을 입은 여자들 중 한 명이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웃었다.
"안녕하세요. 당신들이 입은 유니폼이 궁금해서 그러는데요. 혹시 무슨 일 하시는지 물어봐도 돼요?"
여자와 눈이 마주친 김에 큰소리로 내가 물었다.
"우리는 은행원들이에요."
나와 눈이 마주친 여자가 능숙한 영어로 말했고 여자의 동료들이 다 같이 나를 바라보았다. 비엔티안의 은행원들은 미모가 1순위인 모양이군.
"난 여기 와서 당신들처럼 예쁜 여자들을 본 적이 없어요."
내가 말하자, 여자들은 코스모스 같은 웃음을 보여주며 즐거워했다.
"그래도 내가 가장 예쁘죠?"
나와 눈이 마주친 여자옆에 앉아 있던 또 다른 여자가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뭐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지만... 하하."
내가 농담으로 받아치자 여자들은 동시에 크게 웃으며 즐거워했다.
"어느 나라에서 왔어요? 혼자 왔나요?"
"네, 한국에서 왔어요."
어디에서 왔으며, 혼자인가요라는 언제 어디서나 들었던 질문. 혼자 왔다가 혼자 가는 것이 우리 인생 아니던가. 우리는 다들 대관절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 것일까.
"한국! 알아요. 너무 멋진 나라예요. 언젠가 꼭 한번 가보고 싶은 나라예요."
한 여자가 말했고, 다른 여자들도 부러움이 섞인듯한 얼굴로 웃었다.
"그렇게 되길 바랄게요. 나도 라오스에서 보름동안 여행하면서 좋은 시간 보냈어요."
"와우! 보름동안요? 비엔티안에서만요?"
"아니에요. 방비엥도 가보고, 루앙프라방도 가봤어요."
"멋지네요. 다른 곳도 좋던가요?"
"네, 다 좋았어요. 비엔티안도 물론 좋지만, 저는 그래도 루앙프라방이 가장 좋더라고요."
"맞아요. 루앙프라방은 참 아름다운 곳이에요. 그래도 여기 우리가 가장 예쁘죠?"
"물론! 정말입니다!"
여자들은 다시 동시에 크게 웃으며 즐거워했다.
"저는 이따가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갑니다. 무척 아쉽네요.'
"아! 그렇군요. 또 오세요. 행운을 빌어요."
저토록 빛나는 청춘들이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동경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식당에서 나와 어두워진 거리를 걸었다. 이곳 특유의 냄새는 여전했고, 나는 그 냄새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라오스에 와서 보름동안 단 한 번도 한식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이 갑자기 떠올랐다. 짧은 해외여행에서도 라면이나 고추장 등 간단한 음식을 준비하거나, 현지 한국식당만을 찾는 여행객들이 많던데 나에게는 이곳 음식이 입맛에 맞는 것일까. 그렇다면 여행에 소질이 있다고 봐도 무방할까. 여행에도 소질이라는 말이 해당될 수 있을까.
여행자거리로 들어서니 오늘따라 평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는 느낌이었다. 내가 마사지를 받았던 가게 앞마당에는 마사지사 서너 명이 모여 무엇인가를 먹고 있었다. 틈날 때마다 저렇게 모여 식사를 하는 모양이군. 나의 발을 마사지해 준 여자가 나를 알아보고 수줍게 웃으며 손을 흔들기에 나도 손을 흔들어주었다. 건강하고 씩씩하게 지내렴.
windwest로 가서 출국 전까지 시간을 보내려고 걸어가는 길에, 아담한 펍이 왠지 눈길을 끌었다. 음악이 흘러나오는 가게 앞 테이블에는 백인 남자 두 명이 맥주를 마시며 음악을 듣고 있었다. 그래, windwest는 지금 가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일 거야. 여기 새로운 곳에 조금 있다가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가게 안으로 들어서니 바에 앉아 있던 한 여자가 입안에서 혀를 굴려 신기한 소리를 내며 나를 반겨주었다. 황당하고 놀라움에 내가 머뭇거리자 여자의 옆에 앉아 있던 백인 남자와 그들과 마주하고 서있던, 주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소리 내어 웃었다.
호로로로로!
여자는 또 요란한 소리를 내며 호탕하게 웃었고, 나도 덩달아 웃으며 바에 앉았다. 옆에 앉아 얼굴을 보니 소리 내던 여자는, 서부영화에 나오는 인디언처럼 생겼는데 국적이 쉽게 구분 가지는 않았다.
"라츠미라고 해요. 멋쟁이는 어디에서 왔나요? 아! 내가 맞춰보죠. 한국 맞죠?"
능숙한 영어로 자기소개를 하며 여자는 또 요란한 소리를 냈다.
"어떻게 알았죠? 난 홍이라고 해요. 반가워요."
내가 말했다.
"반가워요. 나는 코너예요."
백인 남자도 손을 내밀며 말했다.
맥주를 주문하자 아주 어려 보이는 소녀가 어디선가 나타나 땅콩이 든 접시를 가져다주었다.
"내 딸이에요. 이제 14살이죠. 예쁘죠?"
더듬거리는 영어로 자기소개를 하며 주인이 말했다. - 자신의 이름을 말했는데 발음이 어려워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뜻하지 않게 출국을 코앞에 두고 낯선 사람들과 바에 앉아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다들 친구분들인가 봐요. 무척 다정해 보이네요."
라츠미의 제안으로 다 같이 건배를 하고 내가 물었다.
"그래요. 우리는 친구들이에요. 좋은 친구!"
라츠미가 대답하고 또 요란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주인은 딸의 머리를 매만져주며 웃었고, 소녀는 수줍게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난 아일랜드에서 왔어요. 여기에서 무려 6개월째 살고 있는데 어느 순간 이곳의 단골이 되었어요. 하하."
묻지도 않았는데 코너가 말했다.
"코너가 맥그리거의 그 코너인가요?"
"오! 맥그리거! 하하 그 친구와 같은 코너 맞아요. 아는군요. 당신. 맥그리거!"
내가 묻자 코너가 가볍게 주먹을 휘두르며 대답했다. 노란 턱수염을 길게 닿고 검정 베레모를 쓴 코너는 연약한 몸집에 어딘가 염세적인 분위기가 풍겼다.
"아일랜드면 혹시 더블린에 사나요?"
"오! 홍! 더블린도 알아요? 그렇지만 난 더블린은 아니고 그보다 더 시골에 살죠. 지금은 물론 여기 비엔티안에서 살고. 하하."
"이름정도만 알아요. 아일랜드에 언제 꼭 가보고 싶어요."
"굿! 좋아요. 아일랜드... 좋아요. 아주. 평화롭고... 춥고. 하하"
코너가 몸을 떠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TV화면에는 스콜피언스의 wind of change 뮤직비디오가 나왔다.
"내가 신청한 곡이에요. 멋진 곡이죠. 여기는 올드 팝송을 듣기에 아주 좋아요. 홍도 듣고 싶은 곡 신청해요."
코너가 건배를 권하며 말했다.
"아니에요. 나오는 음악이 다 좋아요."
나는 대답을 하고 TV화면을 바라보았다. 명곡은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때와 장소에 상관없이 울림이 있구나. 라츠미는 뮤직비디오 속 보컬이 중간중간 휘파람을 불 때마다 요란한 소리를 냈다. 음악과 전혀 어울리지도 않고, 감상하는데 방해가 될 법도 한데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미소를 머금고 뮤직비디오를 보았다.
windwest에서도 젊은 남자 가수가 이 노래를 애절하고 멋스럽게 부르는 것을 보았다. 그 젊은 가수는 라오스의 변화를 절실하게 바라는 마음으로 노래를 한 것은 아니었을까. 노래 속 가사처럼 라오스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 수 있을 것인가.
"멋쟁이, 한잔 해요!"
라츠미가 자신이 마시던 테킬라를 한잔 주며 말했다.
"아! 난 많이 마시면 안 되는데... 조금 있다가 비행기를 타러 가야 해요. 한국으로 돌아가거든요."
"괜찮아요. 한잔 정도는!"
코너가 라츠미가 건네준 잔을 내게로 더 가까이 밀며 권했다. 테킬라를 넘기자 목안에 짜릿하면서도 따뜻한 감촉이 느껴졌다.
"아 정말 아쉽네요. 이렇게 좋은 곳을 왜 이제야 알게 되었을까요."
"멋쟁이! 갔다가 다음 주에 다시 돌아와요! 호로로로로!"
라츠미가 테킬라를 한잔 더 건네주며 소리를 질렀다.
라츠미의 말대로 갔다가 금방 다시,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올 수 있는 곳이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짝 오른 취기에 좋은 음악들을 듣고 있으니 시간이 금방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자리에서 일어서기가 무척 아쉬웠다.
"이제 가야 해요. 덕분에 아주 즐거운 시간 보내다가요."
더 늦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가 말했다.
"조심해서 가요. 또 오세요."
주인은 어린 딸을 꼭 껴안고 말했다.
"잔돈은 됐습니다. 혹시라도 한국인이 여기 오면 맥주 한잔 주세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라츠미와 코너와 악수를 하고 가게를 나왔다. 라츠미가 내는 요란한 소리가 내 등뒤에서 들렸다. 호로로로로!
왓따이 공항에는 출국준비하는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골프가방을 든, 단체로 온 한국인들의 모습이 곳곳에 보였다. 라오스에 이렇게 많은 여행객들이 오는구나.
긴 대기줄에서 한참을 기다려 짐을 부치고 공항밖으로 잠시 나가보니 깜깜한 어둠 속에 불현듯 훅 들어오는 더위와 이곳 특유의 냄새가 순간 아득하게 느껴졌다.
멀지 않은 곳에서 라오스 여자가 떠나가는 남자의 손을 잡고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남자는 여자를 안아주고 충혈된 눈으로 공항으로 들어갔다. 혼자 남겨진 여자는 뒤돌아 가는듯하더니 어둠 속에 쪼그리고 앉아 흐느껴 울었다. 나는 밤하늘을 한번 올려다보고 탑승준비를 하기 위해 공항으로 들어왔다.
마음을 두고 떠나니 다시 오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