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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Nov 27. 2017

첫째 날

제주에서

1.

평일 낮인데도 성산일출봉을 오르는 사람들은 넘쳐났고 유명 관광지답게 외국인들의 수도 만만치 않았다.

일출봉 정상으로 오르는 길에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중국어를 앵무새처럼 뱉어내는 기념품 상인의 말 뜻이 궁금했는데, 뒤이어 'English name Date'라고 짧은 영어를, 앞서 중국어보다 훨씬 어설프게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는 대비되는 두 언어의 효용성과 상인의 적극적인 상술에 웃음이 났다.

여행지에서의 기념사진 촬영은 카메라의 보급과 함께 오래전부터 시작된 것일 테고, 이제는 어느 날 등장한 셀카봉의 위력으로 곳곳에서 풍경을 배경으로 사진 촬영에 몰두하는 사람들의 모습 또한 빠질 수 없는 여행지에서의 풍경 중 일부가 되었다.

한낮의 일출봉 정상에서 바라보는 먼바다는 수면에 반짝이는 빛들로 눈이 부셨는데, 그 바다를 바라봤을 셀 수 없는 사람들의 눈길도 그 찬란함에 한몫했을 것 같았다.

2.

헤어지기 몇 주 전 그녀는 난데없이 사진을 찍자고 했다.

"생각해보니 같이 찍은 사진이 없어요. 왜 그랬을까요. 삼 년을 만났는데요"

그리곤 순식간에 나의 얼굴에 그녀의 얼굴을 맞대고 자신의 폰을 눌렀다.

"찰칵"

찰나의 순간에도 나는 다정한 미소를 지어서 우리는 아주 행복했던 연인으로 남겨졌다.


3.

두 연인이 함께 웃는 소리는 마치 여러 사람이 동시에 웃는 소리처럼 들렸다.

꼭 잡은 연인의 두 손위로 기분 좋은 바람이 만들어내는 나뭇잎의 그림자가 살랑거리고, 수줍게 곁눈질하는 남자의 모습으로 보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관계로 짐작되었다. 웃음소리는 말소리와 거의 동시에 매번 터져 나왔고 그 웃음을 머금은 괴상한 언어는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도 나는 알아들을 수 없었는데, 그들은 오랜 시간을 그 생소한 언어로 대화하고 있었다.

'언어'가 개개인이 가진 생각이나 느낌 따위를 나타내거나 전달하기 위해 사용되는 수단이라면, 오랜 시간 우리가 사용해 온 우리의 언어는 우리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져 온 것일 게다.

그렇듯 두 연인의 생소하고 괴상한 언어는 그들의 필요의 의해서 만들어진 것일 테고, 그렇다면 그들은 위대한 창조자이다.


4.

의자는 말했다

그저 걷고 싶어요

내가 있을 곳은 여기 좁은 방안이 아니에요

난 어쩌다 의자가 되어버린 뱀이에요


뱀이 말했다

그저 날고 싶어요

내가 있을 곳은 여기 덤불이 우거진 숲이 아니에요

난 어쩌다 뱀이 되어버린 박쥐예요


박쥐가 말했다

그저 햇볕을 보고 싶어요

내가 있을 곳은 여기 눅눅하고 습한 동굴 안이 아니에요

난 어쩌다 박쥐가 되어버린 메뚜기예요


메뚜기가 말했다

난 그저 쉬고 싶어요

내가 있을 곳은 여기 황량한 들판이 아니에요

난 어쩌다 메뚜기가 되어버린 망부석이에요


망부석이 말했다

난 그저 움직이고 싶어요

내가 있을 곳은 여기 바람 부는 벼랑 끝이 아니에요

난 어쩌다 망부석이 되어버린 말이에요


5.

다섯 명의 언어장애인들이 원으로 된 탁자를 둘러싸고 앉아 열띤 수화를 나누고 있었다.

일반인들의 대화랑 다르게 누구 하나 딴청을 피우는 법 없이 상대의 눈과 손동작을 유심히 바라보았는데, 그들이 나누는 대화의 방식이 말을 하고 귀로 듣는 것이 아닌, 손동작을 하고 그 동작을 눈으로 보는 이유에서 일 것이다.

대화 도중 딴청을 피운다고 해서 뚫린 귀로 말들이 들리지 않는 것은 아닐 테고, 상대의 눈을 유심히 들여다본다고 해서 머릿속은 딴청을 피우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그들의 대화법이 일반인들의 대화법에 비하면 훨씬 수고스러운 만큼 더 적극적이고, 서로에게 온전히 집중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마음이 담겨있지 않은 것은 들통나기 마련이다.

마음이 전달되지 않는 대화만큼 수고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6.

우리는 나란히 서서 걸었고

그 꿈속에서 당신은 천의 얼굴을 가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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