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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Nov 30. 2017

셋째 날

제주에서

1.

숙소에서 섭지코지로 걸어가는 내내 성산일출봉이 왼편으로 보였는데, 유명세를 등에 업어서인지 어떤 각도에서 보더라도 위풍당당했다. 유명은 유명세를 만들고, 사람들의 관심과 시선에 그 유명세는 더 견고해진다.

한참을 걸어가다 보니 길옆 들판 안쪽에서 건초를 먹고 있는 말이 보였다. 도로 갓길에서 시작된 좁다란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니 그 말 외에도 두 마리의 다른 말들이 서로 동떨어져서 건초를 먹고 있었다.

스케치북을 얼른 꺼내 가까이 있는 말을 그리며 말의 눈이 참 예쁘다는 것과, 우아한 곡선으로 이루어진 말의 자태가 경이롭다는 생각을 했다. 한참을 건초만 열심히 먹던 말이, 어느 순간 슬금슬금 움직이더니 오솔길 입구를 막고 서서 그 풍만한 엉덩이를 내 앞에 딱 들이댔다.

아! 나는 어쩌면 전생에 몽골 초원에서 암말 깨나 울리고 다녔던, 멋진 갈기 휘날리는 종마였을지도.

나의 외면에 화가 난 말의 뒷발 치기가 두려워 길이 없는 반대편 언덕으로 올라가니 놀란 꿩이 느닷없이 푸드덕 날아올랐다.


2.

당신은 특이하군요.

이제껏 누구도 나를 살피고, 나에 대해 궁금해하고, 물어본 사람은 없었어요.

다들 자신의 앞날이 궁금해서 찾아오는 사람들이니까요.

궁금증이 해결되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나면 불만족스럽더라도 비용을 지불하고는 금세 떠나버리죠.

그 누구도 나를 궁금해하지 않았어요.


어느 가을 남도의 밤바다에서 배회하다 호기심에 들어가 본 '달통 사주'라고 적힌 천막 안에서, 화장을 짙게 한 뚱뚱한 역술인이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3.

섭지코지의 언덕은 가을바람이 만들어내는 향기와 갈대의 풍경이 잘 어울려 낭만적이었다.

바람과 돌과 갈대로 이루어진 언덕일 뿐인 이곳에 사람들이 기어이 찾아와서 위안을 얻고 간다는 것에 자연의 위대함이 있다.

편안함과 넉넉함은 때로 그 어떤 가치보다 우선일 수 있다.


4.

당신은 공무원이거나 교사인가요?

아닌데요?

음... 사주에는 그렇게 나오네요.

아.. 네..


창의적인 일에는 별로 소질이 없으니 사무적인 일을 해야 해요.

저... 실은 화가입니다.

음... 사주에는 그렇게 나와 있어요.

아.. 그렇군요.


자식이 세명 있네요.

아직 미혼인데요.

음... 사주에는 그렇게 나오는데요.

아......


두뇌가 명석해서 학생 때 공부를 꽤 잘했군요.

저 학교 다닐 땐 공부와는 담쌓고 지냈습니다.

음... 사주에는 그렇게 나옵니다. 특히 올해는 공부를 많이 할 거예요. 자격증을 딸 수도 있고요.

네...


여자들이 평생 줄줄 따르겠어요.

아! 그래요?

네, 사주에 분명 그렇게 나와 있어요.

헤헷


돈을 많이 벌거나, 장수하지는 못할 겁니다.

아.. 네..

폐와 위장이 약하니 건강관리 잘하시고요.

네..


5.

돌아오는 길엔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에 가니 조그마한 소녀가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이곳에 사는 학생인 듯해서 버스 노선을 물어보니 자신과 같은 버스를 타면 된다고 했다.

맑은 눈을 가진 소녀는 고 2가 되면서 학교를 그만두고 이곳에서 3개월 머무를 계획으로 공부를 하고 있다며, 오늘은 일주일에 하루 쉬는 날이어서 광치기 해변으로 바다를 보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틀에 박히고 뻔한 제도가 싫어 학교를 그만뒀고, 앞으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꼭 훌륭한 작가가 되어 TV에서 학생의 얼굴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내가 얘기하니, 소녀는 맑은 눈을 반짝이며 수줍게 웃었다.

같이 탄 버스에서 광치기 해변에 내려 만나서 반가웠다고, 악수를 하고 헤어지며 뒤돌아 보니 소녀는 저 멀리서 손을 흔들고 환히 웃어주었다.


더 깊고, 더 넓어 지기를, 또한 깃털처럼 가벼울 수 있기를. 그렇게 소녀의 앞날을 기원했다.


6.

어서어서 오셔요. 더 늦기 전에.

우리가 이왕 만나야 한다면 한꺼번에 몰려들 오지 마시고, 적절한 시간차를 두고들 오셔요.

조각난 제 사주의 퍼즐을 잘 맞춰서 제가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게 두지는 마셔요.

혹, 감추어두었던 장성한 우리 자식을 데리고 오신다면, 가슴 아팠던 이별의 기억은 까맣게 잊고 우린 뜨겁게 재회할 수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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