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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Dec 01. 2017

넷째 날

제주에서

1.

오전 열 시쯤 성산항에 도착하니 우도행 배를 타기 위해 줄을 서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사람을 가득 태운 배가 출발하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람을 피해 선실 안에 들어갔고, 몇몇 사람만이 배 난간에 기대어 바다를 구경하고 사진을 찍었다. 코르덴 양복을 입은 남자는 바람소리보다 더 큰 목소리로 통화를 했고, 작정하고 새우깡을 준비해 온 두 명의 젊은 여자는 새우깡을 꼭 쥔 채 하늘을 향해 손을 뻗고 기다렸지만, 배가 우도에 도착하도록 갈매기는 오지 않았고, 남자의 통화도 끝나지 않았다.


2.

당신의 사랑을 기억합니다.

그 사랑이 오랜 시간 내 삶을 풍요롭게 했었다는 말은 한 번도 한 적 없지만

그건 다만 너무 흔한 말 같아서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흔한 말이, 흔한 감정에서 나오지는 않을 터이고

흔한 감정으로 당신을 사랑한 것은 더더욱 아니지만

그런 흔한 말쯤이야 수백 번 내뱉어도, 당신이 웃을 수 있다면 그리할 걸 그랬습니다.


3.

우도 전체를 순환하는 버스는 각 정거장에 수시로 내리고 탈 수 있도록 체계가 잡혀 있어 편리했다.

비양도 정거장에 내려 바다를 좀 더 가까이 보기 위해 검은 암석들을 밟고 지나가다가 이끼에 미끄러져 보기 좋게 넘어졌다.

한쪽 팔을 치켜든 채 넘어진 내 손에 꼭 쥐어져 있는 것이 휴대폰이 아닌 새우깡이었다면, 기회를 엿보던 갈매기가 잽싸게 날아왔을까.

그제야 신발 밑바닥을 확인하니 닳아서 반질반질해져 있었다.  

나는 참 무심했구나.


다음 생엔 맨해튼 월스트리트 펀드 매니저의 고급 구두로 환생해서 마세라티의 엑셀을 사뿐히 즈려밟고, 소호의 펜트하우스 대리석 바닥을 우아하게 미끄러져 다닐 수 있기를.


4.

지난겨울 내내 애틋한 그대보다

연탄난로의 안위를 더 자주 생각했습니다

미안합니다

핑계를 대자면 그대의 온기는

내 믿음 안에 변함없을 것이라 여겼고요, 그러나

이놈의 연탄은 세상에,

구구절절 저만 바라보길 원했답니다


5.

에메랄드 색을 품은 하고수동 해변에는 시린 모래사장을 맨발로 걷는 여자와, 여자가 남긴 발자국을 헤치지 않고 뒤따르며 사진기의 셔트를 눌러대는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간혹 무리한 주문을 하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여자는 눈을 한번 흘긴 뒤 줄무늬 원피스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빙그르르 돌았다. 자연스러운 동작과 철 지난 잠옷 같은 줄무늬 원피스로 보아 어쩌면 그들은 지난봄부터 이곳에 머물렀을지도 모르겠다.

남자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면 여자는 까르르 웃으며 남자의 품에 안기길 반복했다.


우도의 곳곳이 이렇게 멋진 줄 알았다면 이곳에서 하룻밤쯤 묵어갈 준비를 해 왔을 텐데.

그랬다면 에메랄드 색을 품은 하고수동 해변에서 한나절을 멍 때리고, 해가 지는 것을 볼 수 있었을 텐데.

그랬다면 나를 이곳까지 데려와 준, 그간 고생한 신발에게 멋진 이별의 선물을 해줄 수 있었을 텐데.


6.

그대만 변하지 않는다면 말이죠 난

한 오백 년은 구구절절 사랑할 수 있어요

오백 년이 그다지 길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구구절절 사랑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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