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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Dec 02. 2017

다섯째 날

제주에서

1.

일출을 보기 위해 새벽 여섯 시가 조금 지나 숙소에서 나오니 간밤의 심한 바람은 잦아들어 기분 좋은 새벽 공기 냄새가 났다.

광치기 해변으로 가는 길 맞은편에서 핏불테리어를 데리고 다녀야 어울릴법한 남자가 자신의 팔뚝보다 작아 보이는 요크셔테리어를 앞장 세워 걸어오고 있었다. 앙증맞은 파란 리본을 머리에 꽂은 강아지의 뚱한 얼굴이 주인과 묘하게 닮아 있었다. 

같은 공간, 같은 공기, 같은 물은 서로를 닮게 만들고 그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만 국한되지는 않은 모양이다.

강아지는 주인의 사랑을 받기 위해 셀 수 없는 날들을 주인의 얼굴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주인은 자신에게 재롱을 떠는 강아지를 또 그만큼 바라보았을 것이다.

서로에게 길들여진다는 것은 그만큼 애틋한 일이다.


2.

난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단지 당신 눈에 그렇게 보일 뿐이에요

당신이 내 눈에 그렇게 보이듯이 말이에요


3.

광치기 해변에 도착하니 몇몇 사람들이 먼저 와 일출을 기다리고 있었다.

입구에는 구부정한 할머니가 감귤을 팔기 위해 벌써 전을 펼쳐놓았다. 이 추운 새벽에 몇 시부터 나오신 걸까.

담배를 태우며 서성이는 사람, 카메라를 몇 번이나 들여다보며 앵글을 조절하는 사람, 긴 담요로 서로를 감싸 세상 다 가진 듯한 황홀한 표정으로 바다를 응시하는 연인. 그들 사이에서 빠르게 변해가는 먼 하늘과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니 어느 순간 정말로 '둥실' 소리를 내는 듯 해가 떠올랐다.

일출을 실제로 본 것은 난생처음인데 해가 수면 위에서 멀어질수록 수면과, 해변의 돌들과, 공기의 색을 변화시키고 음영은 더욱 선명함을 드러내는 것이 처음 아는 사실인 듯 신비로웠다.

언제나 우리의 머리 위에 있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던 태양이 단 하루만 떠오르지 않아도 우리의 삶은 어떻게 될 것인가.


4.

가끔 아무런 이유 없이 하늘을 올려다볼 때가 있는데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면 살아 움직이는, 순간의 꿈틀거림이 좋아서이다. 햇볕은 너무도 강렬해서 감히 두 눈을 부릅뜨고 마주 볼 수 없기도 하지만 동공의 뒤쪽을 간지럽히는 묘한 쾌감에 그저 넋 놓고 있으면, 그대로 시간이 멈추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5.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해변의 입구로 다시 가니 감귤을 파는 할머니가 어느새 주전자에 뜨거운 물을 끓여 사람들에게 따뜻한 믹스커피를 권했다.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잘 익어, 투박한 손을 가진 일꾼들의 손을 거쳐, 이곳 해변까지 와서 할머니의 정성스러운 손길로 담긴 감귤을 한 봉지 가득 들고 나는 언 몸을 녹이기 위해 숙소로 돌아왔다.


6.

사람이 광합성만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면, 애초에 그 모든 끔찍한 죄악들은 생겨나지 않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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