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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Dec 03. 2017

여섯째 날

제주에서

1.

사려니 숲길로 가는 길엔 마침 비가 내렸다.

촉촉이 비가 내려준다면 숲길을 걷기엔 더 좋을 거야라는 생각을 하며 간밤에 잠이 들었었는데 어찌나 반갑던지.

숲길을 가로지르는 긴 도로는 쭉쭉 뻗어있는 편백나무들이 자아내는 풍경과 맞물려 다른 세계로 향하는 길 위를 걷고 있는 느낌이었다. 길이 끝나는 언덕 너머에서 맨발의 여자가 줄무늬 원피스 치마를 휘날리며 빙그르르 돌며 나타날 것만 같았다. 혹 그렇다면 아는 척을 해야 하는 것일까.

팻말로 친절히 길 안내가 되어있는 숲길 안에는 각종 식물들이 비에 젖은 흙냄새와 어울려 질퍽하고 비릿한, 기분 좋은 냄새를 풍겼다. 앞서갔던 등산복을 입은 남자는 자신보다 키가 큰 삼각대를 고정시켜 놓고 물을 마시고 있었고, 그를 따라온 작은 여자아이는 키 큰 나무들 사이에서 감탄에 젖은 동그란 눈으로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2.

불현듯 그의 상처가 생각났다.

동네 뒷산에서 목을 매달았다는 그의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훤히 내려다보이는 마을 어귀에서 가슴에 하얀 손수건 달고 종종걸음으로 학교를 다녀오던 그의 모습일지도 몰랐다.

딱 그때 그의 아버지 나이쯤 되고서야 허공에 눈을 고정한 채, 그는 불쑥 그 이야기를 꺼내었는데 그래도 이해한다며, 허공을 떠난 그의 시선은 앞에 놓인 소주잔에 한참을 머물렀다.

그 오랜 결핍의 시간은 원망과, 분노와, 미움이 잡다하게 뒤섞여 그가 내뱉는 말과,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엄중하게 스며들었을 것이고, 그 결핍의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 어느 날 그 결핍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해라는 것은 분노와 원망이 지나고, 그 자리를 대신한 체념에서 비롯된, 희망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획득할 수 있는 감추어진 경품 같은 것일까.


3.

방문객들이 하나둘 떠나고 사려니 숲에 어둠이 내려앉으면 숲의 정령들이 하나둘 모여들 것 같았다.

삼나무에 가득 낀 이끼를 먹는 것도 중단하고, 천남성 잎사귀를 덮고 개미를 관찰하던 것도 중단하고, 낮에 꼬마가 올려다보던 시선을 피해 초록색으로 변했던 몸 색깔도 원래대로 되찾아, 토토르가 보내는 휘파람 소리가 나는 곳으로 죄다 모여들 것 같았다.

쉴 새 없이 통화를 하는 코르덴 양복 입은 남자 때문에 낮잠을 설쳤다는 것과, 자신을 알아보고 놀라는 듯한 어린 여자아이의 눈동자를 보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는 것과, 맨발로 뛰어다니는 줄무늬 원피스 입은 여자와 그 여자를 따라다니는 남자를 구경하느라 점심도 못 먹었다는 것 등, 그날 있었던 이야기를 하느라 숲의 정령들의 저녁 만찬은 늘 그랬듯 새벽이슬이 내릴 때쯤 끝날 것 같았다.


4.

이왕이면 수요일마다 비가 내리면 좋겠어요

그러면 그 옛날 여우가 어린 왕자를 기다리듯 수요일 아침이면,

아니 화요일 저녁이 되면 온 세상이 촉촉해질 상상을 하며 비를 기다리겠지요

어쩌면 잠 못 이루고 밤 새 창가에 앉아 비를 기다리다가

이른 아침 꽃집이 문을 열자마자 당신에게 줄 빨간 장미를 사러 갈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또 누군가는 수요일 같은 것 없었으면 하고 투덜거리겠지요

그래도 뭐, 난 수요일이면 비가 내렸으면 좋겠어요


5.

"어느 날인가 해지는 것을 마흔네 번 봤어! 쓸쓸한 기분이 들 때는 해지는 광경을 보는 것이 좋아."

어린 왕자는 그렇게 말했었다.

제주를 떠나기 전 월정리 해변에서 일몰을 보기로 했다.

해변이 잘 보이는 카페엔 야외에 편안한 소파까지 배치해 놓아 사람들은 식어가는 커피를 옆에 두고 하루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해가 지기 시작하면서 수평선을 기준으로 하늘과 바다의 색이 확연히 구분됐는데 어둠에 잠식당하기 전 바다는 순간 유독 밝아 보였다.

밝음과 어둠은 얼마나 상대적인 것이며 우리가 그것을 구분 짓는 기준 또한 때론 얼마나 편협할 것인가.

수평선과 바로 맞닿아 있는 하늘은 푸르렀다가, 검붉었다가, 보랏빛이었다가 마침내 바다와 합쳐졌다.

마크 로스코는 그 심오한 작품을 시시각각 변하는 일몰의 풍경에서 영감을 얻었을까.


6.

가끔 당신이 생각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합니다

눈만 뜨면 당신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올라서

그 생각이 곧 하루의 시작이었던 날들엔 상상도 못 했던 일입니다

당신 생각이 나지 않는 아침을, 그러나 나는 여전히 당신 생각으로 채웁니다

그 생각의 끝엔 슬픔을 주체하지 못한 채 뒤돌아서는 당신 모습이 남아

나는 여전히 당신을 슬퍼할 수 있습니다

비루한 일상에 문득 슬퍼질 때엔 가만히 당신을, 불러서 그 슬펐던 얼굴을 또 슬퍼합니다

그러면 나는 금세 생기를 되찾아서 또 당신을 슬퍼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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