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니 Jan 01. 2021

사이,

우리의 생이 돌고 돌아 환생을 거듭하는 것이라면, 이번 생과 다음 생 사이에 간격만큼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면 좋겠어.

일종의 유예기간 같은 그 시간 동안 부유하는 먼지가 되어, 광활한 우주를 떠돌면서 마치 신이라도 된 것처럼 세상 구경을 실컷 하는 거야.

머리가 희끗한 채로도 여전히 난봉꾼으로 살아가는 친구를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기도 하고, 뒷마당 장독대 안에 숨겨두고 잊어버렸던 비상금이 갑자기 생각나서 안타까워하기도 하고, 어릴 적 몰래 빵을 훔쳐먹었던 동네 슈퍼의 주인아저씨가 병상에 누워있는 것을 보고 괜히 죄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하고, 첫사랑에 실패한 열여덟 소년이 으슥한 야산에 목을 매는 것을 발견하고는 나뭇가지가 부러지기를 바라며 눈이 충혈되도록 쏘아보기도 하고,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 버려진 그물에 갇혀버린 어린 돌고래가 울부짖는 모습에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아직 인간들에게 발견되지 않은 원시 부족들의 결혼식을 바라보며 순수한 영혼들의 모습에 경탄과 감사를 하기도 하고, 모질게 뒤돌아 서고 난 뒤 살아있는 내내 잊지 못했던 옛사랑이 건강하게 지내는 모습에 안도하기도 하고, 여전히 자신의 기일을 잊지 않고 기억해주는 친구의 모습에 뭉클하기도 하고.

그 모든 것이 부유하는 먼지인 채로도 여전히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겠지만, 그렇게 세상 구경 실컷 하다 보면 다시 한번 잘 살아보고 싶다거나, 이제는 두 번 다시 인간으로는 태어나기 싫다거나 하는 결심이 불쑥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회환이나 미련 없이는 희망이라는 것도 생기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마침내 환생을 선택한다면 그건 분명 희망의 또 다른 이름일 거야.



이전 15화 귀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