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캐 : 온라인 게임에서, 주로 사용하는 캐릭터, 자신의 주된 자아나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일을 하고 있는 나. 부캐 : 자신이 사용하는 주요 캐릭터 외의 캐릭터
"그럼 부캐가 브런치 작가인 건가요?"
내가 브런치에 글을 쓴다고 말하니 동료가 물었다. 부캐?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답을 망설였다.
# 본캐와 부캐
개그맨 유재석은 유고스타, 유산슬, 유두래곤, 지미 유, 닭터 유 등 수많은 부캐를 성공시켰다. 가수 이효리는 린다 G, 천옥에 이어 아난다라는 새로운 부캐를 들고 광고계에 복귀했다. 연예인들은 이미지 소비(특정한 이미지를 대중들이 질려하는 것)를 보완하기 위해 부캐를 선호한다. 하지만 일반인에게 '본캐'와 '부캐'의 구분이 의미가 있을까?
굳이 구분하자면 나의 본캐는 두 가지라고 생각했다. 엄마와 교사.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인생의 절반을 엄마와 교사로 살아오다 보니 가끔 길에서 누군가 "엄마" 혹은 "선생님"하고 부르면 저절로 고개가 돌아간다. 성실함이 주특기인 나였기에 두 가지 역할에 완벽까지는 아니지만 최선을 다했다. 그 덕분에 지난 20여 년간 나의 세계는 견고했다.
# '엄마'라는 본캐
며칠 전 친한 언니와 저녁을 먹었다. 그녀는 친언니가 없는 나에게 친구였고, 인생의 멘토였다.
"나는 네가 부럽다. 자기 일이 있잖아. 애들 뒷바라지하느라고 아무것도 못했는데 크고 나니까 뭐 하고 살았나 하는 후회가 드네."
언니가 말했다. 긍정적인 그녀였기에 그 말이 주는 파장은 생각보다 컸다.언니의 본캐라고 믿었던 '엄마'라는 캐릭터에 균열이 생겼고, 그 균열은 견고한 나의 세계를 흔들기 시작했다.
# 원팀의 종말
첫아이의 탄생은 나에게 '엄마'라는 캐릭터를 만들어줬다. 성공한 아이보다 행복한 아이로 키우고 싶었다. 잘하는 아이보다 즐기는 아이로 키우고 싶었다. 공부보다는 경험이 풍부한 아이로 키우고 싶었다.
이 간절한 염원은 '나'를 '진짜 엄마'로 만들었다.
아들이 좋아할 만한 장소는 잘 적어두었다가 방학이면 여행을 다녔다. 다양한 경험을 위해 숙소도 호텔, 리조트, 펜션, 캠핑카 겹치지 않게 다녔고, 남자아이에게는 캠핑 경험이 좋다고 해서 캠핑도 시작했다. 힘들어도 아들의 미소에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지는 것 같았다. 아들이 태어난 순간부터 그 아이와 나는 원팀이었다. 의심의 여지는 없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아이가 달라졌다.
"엄마, 우리 도착 예정 시간 몇 시예요? 4시 전에는 도착해요?", "엄마, 다음 주는 약속 있어서 저는 여행 못 가요."
여행을 다녀오는 길에 도착시간을 자주 물었고, 내가 모르는 약속도 늘어갔다. 사춘기가 된 아이는 예고도 없이 저만큼 멀어졌다. 미처 준비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아직 나는 여기 서 있는데...
사춘기가 끝나면 다시 예전처럼 원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언니의 말은 원팀의 종말을 알려주었다. 영원한 것은 없다. 변수는 항상 존재하는 것.
'엄마'라는 본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변화가 필요하다. 지금은 부캐가 필요한 순간이다. 또 다른 나를 찾아야만 하는 시간이 되었다.
동료에게 망설이던 답을 꺼낸다.
"응.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브런치 작가가 내 부캐야."
에필로그
어렸을 적, 머루처럼 까만 눈동자와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의 꿈은 화가였다. 그림을 잘 그려서가 아니었다. TV 속 밥 아저씨(1994년대 EBS '그림을 그립시다.')가 그려내는 세상이 마법 같았기 때문이다. 붓만 잡으면 하얀 도화지 위에 마법 같은 세상을 만들어 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소녀는 미술대회와 글짓기대회에서 입상을 했다. 그리고 작가가 되어야 할지, 화가가 되어야 할지 일생일대의 고민에 빠졌다. 아무도 소녀에게 다른 사람에 비해 그림 솜씨가 부족하다거나 글짓기는 소녀의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그림이 결코 타인에 비해 훌륭하지 않다는 것과 자신의 글솜씨가 잘 쓴 일기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