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정리를 하는데 서랍 한쪽에서 명함이 한 묶음 나왔다. 일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받은 명함이다. 갖고 있자니 필요 없고 버리자니 미안해지는 계륵 같은 존재.
명함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나라에서 명함을 주고받는 행위는 사회생활의 예의처럼 여겨진다. 명함은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나 이런 사람이에요, 안전한 사람이에요, 믿을 만한 사람이에요. 그러니 당신을 헤치지 않아요.'와 같은 함축적인 자기소개다.
교사는 명함이 없다. 주로 만나는 사람이 학생과 학부모님, 교사다보니 자기소개가 필요 없다. 그런데 부장교사가 되니 이래저래 다른 직종의 사람들을 만날 일이 생긴다. 상대의 명함을 받으면 '나도 명함이 있어야 하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 '신뢰'의 양면성,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기
명함이 뭐가 필요해? 우린 얼굴이 명함이지.
선배교사의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아닌 게 아니라 교사라는 직업은 신뢰라는 디폴트값을 갖고 있다. 신뢰는 상황에 따라 양면성을 갖고 있다. 명함이 필요 없을 정도로 나의 신분이 보장된다는 점에서 '신뢰'는 긍정적인 면을 갖는다. 하지만 때때로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면을 갖는다.
사람들은 교사에 대해 지나친 이타성을 기대하는 경향이 있다. 한 번은 접촉사고가 났는데 앞 번호판이 떨어질 정도의 사고였다. 내 보험회사가 교직원공제회와 관련된 것을 안 가해자가 '선생님이 더 무섭다. 이 정도는 그냥 넘어가도 되지'라며 되려 더 큰 소리를 치는 바람에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 적이 있다. 상대가 안하무인으로 나오더라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의 대응 방식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교사'의 이타성과 부합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강제로 이타성을 강요받는 것은 썩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바르고 슬기로우며 타인을 배려하는' 이타적인 교사인 나는 진정한 나일까? 타인의 시선이 만들어낸 허상의 나일까? 어느 쪽이든 나는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 유일함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꼰대스럽다 :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하여 그것만이 옳다고 주장하며 남을 가르치려 드는 것
남편의 말을 빌리자면 나는 어디에 있어도 '교사 티'가 줄줄 흐른다고 한다. 멜빵 청바지를 즐겨 입고 갈래머리를 좋아하는 '소녀 같은' 나에게 '교사 티'가 나다니 뭔가 잘못됐다.
누군가가 '교사 티가 난다'라는 말을 했다면 90% 이상 부정적 의미다. '교사 티'는 고리타분하고 가르치려 들며 꼰대 마인드를 가졌다는 뜻의 다른 이름이다.
교직생활을 하며 가장 경계하는 1순위는 꼰대 마인드다.
얼마 전 직장인의 45%가 꼰대가 될까 두렵다는 인식 조사 결과가 나온 뉴스 기사를 봤다. 사람은 때때로 타인의 행동에 대한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를 즐긴다. 판단의 기준은 자신이 살아온 삶의 궤적이 만들어낸 잣대이다. 삶의 궤적이 같은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고, 그러니 그 잣대 또한 본인에게만 '유일한' 것이다. 유일함은 주관적이라는 함정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자신의 잣대가 가장 합리적이고 정확하다는 착각을 한다. 교사가 이런 착각을 한다면 사춘기 아이와는 답이 없다. 우리는 과거가 아닌 현재를 살아간다. 그러니 본캐에서 살아남기 위해 '교사 티'를 벗고 진정성을 찾아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