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그것도 부족해서 '하나, 둘, 셋...' 속으로 숫자를 센 후에야 핸드폰 창을 열어 최근기록 목록을 살펴본다. 다행히 저장되지 않은 광고전화뿐이다.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기분 좋게 핸드폰 창을 닫는다.
# 나의 직업병 : 핸드폰 벨 공포증
한 직장에서 20년 이상 일을 하다 보면 직업병 하나쯤은 안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엄마가"라고 한다거나 집에서 아이들에게 "선생님이"라고 하는 경증부터 판서를 많이 해서 생기는 손목터널증후군, 강의를 많이 해서 생기는 후두염, 수업 중 소변을 참아서 생기는 방광염 등은 흔한 교사의 직업병이다.
물론 나도 직업병을 앓고 있다. 병명은 '핸드폰 벨 공포증'이다. (실제 이런 병명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핸드폰의 순기능이 타인과의 빠른 연결이라면 역설적이게 역기능도 그렇다.
사실 이 병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남편과 싸운 얘기까지 시시콜콜 넋두리하던 그 학부모님이 시작이었을지도...
핸드폰 벨소리가 울리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공포영화에서 언제 귀신이 튀어나올지 몰라 긴장할 때의 그 기분과 흡사하다. 기묘한 기분 나쁨. 그래, 굳이 두근거림에 이름을 붙이자면 딱 이거다.
두근 거림을 가라앉히고 전화를 받기까지 나에게는 용기가 필요한다. 기묘한 기분 나쁨을 몰아내고 '솔'톤의 "여보세요~" 목소리를 낼만큼의 용기가. 그러다 보니 웬만한 전화는 받기도 전에 끊어져버리기 일쑤다.
출처 : Pixabay
# 일부러 받지 않는 것이 아니야
"넌 원래 전화를 안 받잖아." 남편의 살짝 원망 섞인 말에 나도 할 말이 있다.
억울하다. 난 전화를 받는데 시간이 걸리는 거지, 일부러 안 받는 건 아니니까.
"난 전화를 가려 받는 건 아니야. 그냥 전화받는 자체를 좀 힘들어하는 거지." 나의 대답에 남편이 한마디 더 보탠다.
"상대방이 기분 나쁠 거야."
역시 17년을 함께 살다 보니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부분을 정확하게 집어내는 사람이다. 이런 부분에서는 쓸데없이 예리함이 있는 남편이다. 나는 다른 사람이 나로 인해 불편해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이것이 타고난 기질인지, 집안의 장녀라는 출생 순위의 영향인지, 아니면 성실과 책임감이 점철되어 있는 교사라는 직업의 특성 때문인지 알 수 없다.
그래, 상대방이 기분 나쁜 일은 생기면 안 된다.(그리고 진짜 급한 일이 있을 수도 있다.) 가능한 한 벨이 3번 울리기 전에 전화를 받기로 결심했다. 작심이틀이었다. 사실 이틀이 되기도 전에 극심한 스트레스로 원래 내 모습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누군가는 '그렇게 싫으면 전화를 받지 마세요.'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일부러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은 진짜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다른 사람입장에서야 이러든 저러든 전화 통화 힘든 것은 마찬가지겠으나 나에게는 다른 문제다. 개인의 사정으로 전화를 조금 늦게 받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일부러 전화를 안 받는 것은 다른 사람을 기분 나쁘게 만드는 정말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이니 말이다.
# 고장 난 핸드폰, 그리고 해방감
몇 달 전 핸드폰이 고장 나고 말았다. 4년이나 쓴 기계이니 고장이 특별한 일은 아니었지만 이 고장에는 좀 특이한 점이 있었다. 신기하게도 다른 기능은 멀쩡한데 받는 전화만 자동으로 차단이 되는 것이었다. 설정을 변경해도 그때뿐 다시 돌아갔다.
다시 말해서 내가 걸고 싶을 때만 걸고 받을 수는 없게 된 것이다. 불편함은커녕 이것은 나에게 정신적 해방감을 가져다주었다.
"전화가 고장 나서 제가 전화할게요." 이 말을 건네는데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었다.
난 가능한 한 이 핸드폰을 오래 쓰고 싶었다. 그래서 바빠서 고치러 갈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이 해방감을 조금 더 즐기기로 했다.
출처 :Pixabay
그런데 며칠 전 핸드폰의 카메라 기능이 수명을 다했다. 드디어 다른 기능들도 고장 나기 시작하는 것인가... 알고 있다. 이 핸드폰은 수명을 다했다. 하지만 봄이 올 때까지만이라도 계속 쓰고 싶었다. 남편은 '크게 불편하지는 않다.'라는 나를 데리고 핸드폰 대리점에 갔다. 최신형 핸드폰과 함께 나의 짧은 해방감은 막을 내렸다.
# 받고 싶지 않은 전화를 받지 않을 자유
벨소리가 울린다. 전화를 받는다.
"새 핸드폰 잘되나 기념으로 전화해 봤어." 남편의 밝은 목소리가 들린다.
손에 들린 핸드폰을 바라봤다. 일부러 전화를 받지 않으면 상대방의 기분을 나쁘게 할 수 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인가, 나쁜 사람이라고 타인의 평가를 받는 일인가.
고장 난 핸드폰이 주는 해방감이 아닌 진정한 해방감을 맛보기 위해 미움받을 용기를 내보기로 한다. 받고 싶지 않은 전화를 받지 않을 자유를 나에게 주기로 한다. 비록 작심이틀, 아니 하루로 끝나게 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