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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붙박이별 Feb 09. 2024

나는 외며느리다

외며느리의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

 # 연휴의 시작


 설날 연휴가 시작되었다. 늦은 아침, 어제 만들어놓은 차게 식은 수육을 시판 사골국에 넣고 고기국수를 만든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대기업의 맛, 만족스러운 연휴 아침의 시작이다.

 한 달 전 10년 동안 살림과 육아를 도맡아 해 주시던 친정엄마를 집으로 보내드렸다. 아니 놓아드렸다는 표현이 더 적절한 듯하다. 엄마는 새장에서 막 풀려난 새처럼 우리 집을 떠나지 못하고 이틀에 한 번꼴로 전화를 하신다. '아침은 뭐해먹었냐, 밑반찬은 남았냐, 애들 아침은 밥 해서 먹여라' 걱정스러운 잔소리가 이어진다. 결혼한 지 17년이 되었지만 제대로 된 요리한 번 해본 적이 없으니 난  초보주부다. 물론 '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라고 나도 나름의 치트키는 있다. 밀키트에 약간의 노력을 기울여 내가 만든 음식처럼 내어놓은 기술은 수준급이다. 아무튼, 포함 네 식구 먹여 살리는 데는 문제가 없으니 그거면 되었다.

 고기국수 한 그릇을 비워내며 한껏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당겨 내려본다.




# 이번 명절 연휴는 다르다


 해마다 오는 연휴지만 이번 명절 연휴는 조금 다르다. 이번 명절부터 명절 당일 아침에 오라는 시어머니의 당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말은 나는 오늘 짐을 쌀 필요 없이 잘 쉬었다가 내일 아침 30분 거리의 시댁에 가서 맛있게 떡국을 먹으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일이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17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시계추처럼 시댁과 친정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은 변함없지만 짐을 싸지 않아도 된다는 것과 우리 집이 아닌 곳에서 잠을 자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나에게 큰 자유를 맛보게 해 주었다. 마치 박하사탕 10개를 한꺼번에 먹은 것 같은 시원함이었다.


# 엄마는 둘째 며느리였다


 엄마는 아들 셋 있는 집의 둘째 며느리였다. 우리 엄마는 시댁에서 존재감이 없었다. 명문대학을 나와서 중학교 영어교사를 하는 남편을 둔 큰며느리와 대기업을 다니는 남편을 둔 막내며느리 사이에서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남편을 둔 엄마는 한없이 작아졌을 것이다.

 명절이면 엄마는 시어머니께 명예와 돈 대신 노동력을 드렸다. 큰 엄마는 장 본다고 집을 비우기 일쑤였고 작은 엄마는 아이들을 돌본다고 방에서 나오지 않으니 그 넓은 부엌은 우리 엄마의 차지였다. 지금도 설날 큰 집을 떠올리면 싱크대 옆 주방 바닥에 앉아 하루종일 전을 부치던 30대의 젊은 엄마가 떠오른다.


# 엄마가 바라는 사위의 조건


 아무튼, 그 때문이었는지 엄마는 내가 결혼 적령기가 되자 사윗감에 대한 작은 바람이 생겼다. 남들이 보면 근거 없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엄마에게는 고단했던 삶을 통해 얻은 값진 것이었을 테고 딸에게만은 대물림하고 싶지 않았던 삶의 무게였을 것이다. 내용은 이랬다.

 첫째, 경상도남자는 절대 안 된다. 무뚝뚝하고 자기네(시댁) 가족밖에 모르며 남아선호사상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런 집에 시집가면 며느리가 너무 고생한다. 이왕이면 젠틀한 서울남자가 좋다.
(아빤 경상도남자였다.)

 둘째, 제사 지내는 집은 안된다. 일 년에 제사가 있을 때마다 시댁에 가서 음식을 해야 하는데 직업이 있는 딸로서는 감당하기 쉽지 않다.
(아빠는 큰아빠가 돌아가시자 재산 대신 제사를 물려받았다.)

 셋째, 사업하는 남자는 안된다. 돈을 일정하게 벌어오지 않아 살림을 계획하기가 어렵다. 사업이 잘되면 바빠서 집을 잘 안 돌보고 사업이 안되면 경제적으로 고통받는다.

 넷째, 너무 잘생긴 남자는 안된다. 얼굴값을 한다.
(아빤 얼굴값하는 남자였다.)

그리고 이왕이면 아들이 많지 않은 집이 좋다. 며느리들끼리의 비교 때문에 스트레스받는다.
(아빤 아들 셋있는 집의 둘째였다.)

 엄마의 바람이 통했는지 나는 젠틀한 서울남자, 제사 안 지내는 기독교 집안, 나라녹을 먹는 공무원, 얼굴은 지극히 평범한 남자와 결혼했다. 심지어 외동아들이었다.




# 나는 외며느리다


 나는 외며느리다. 시부모님은 좋으신 분들이다. 딸처럼 아껴주시고 뭔가를 요구하시는 법이 없다. 제사도 없는 집이다 보니 명절에도 식구들 먹을 음식 하는 게 전부다. 그 마저도 명절 전에 시어머니께서 다 해 놓으시니 내가 할 일이라고는 밥 먹고 나서 하는 설거지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댁이라는 곳이 주는 심리적인 부담감이 있다. 우리 집이 아닌 곳에서 잠을 자야 하는 불편함, 할 일이 없으면 수다라도 떨어야 하는 책임감, 새벽 5시부터 아침을 준비하시는 시어머니만큼은 부지런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명절이 시작되기 전부터 나를 짓눌렀다. 그리고 자기 부모님 집인데도 잠자리에 예민해서 잠을 설치는 남편의 불평은 덤이었다.  

 이렇게 17년이 흘렀다.



 

# 17년동안 차마 하지 못한 말


 (17년 전)결혼을 앞두고 딸만 둘인 우리집 명절이 걱정되었다.'우리 둘 다 결혼하면 명절 아침 아무도 없이 두 분만 있으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었다. 지금 와서 보면 동생은 아직 미혼이니까 내가 한 생각은 쓸데없는 걱정이 되었지만 그때는 나름 큰 걱정이었다.

  그때 나는 "결혼하면 나는 설날은 우리 집, 추석은 시댁 이렇게 공평하게 갈 테니까 너는 설날은 시댁, 추석은 우리 집 이렇게 오면 되겠다."라고 야무지게 말했었다. 그 순간만큼은 나는 MZ세대였다.

 결혼 후 맞는 첫 명절, 시부모님 앞에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회가 요구하는 며느리상에 반기를 들 만큼의 용기가 없었다. 결국 나는 여느 며느리가 그렇듯 명절 전부터 가서 서툰 음식솜씨를 뽐냈다. 그렇게 17년이 흘렀다.

 그런데 작년 추석이 끝나고 시어머니께서 전화를 하셨다.


"설 때부터는 아침에 와서 밥만 먹어. 시대가 그러니 우리도 시대 따라가야지."


 왜 어머니가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알 수는 없다. 어머니 말씀대로 '시대의 흐름'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무튼, 나는 명절 스트레스에서 해방되었다. 한마디면 되는 거였다. 이렇게 쉬운 일이었다. 17년 전 그때 내가 용기를 냈더라면 나는 조금 더 행복한 명절을 보낼 수 있었을까? 모르겠다. 하고 싶은 말을 한다는 것은 관계가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나는 항상 관계를 흔드는 것보다는 할 말을 참는 쪽을 선택해 왔다. 그것이 외며느리로서 내가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이 관계가 나의 '참음'으로만 유지된 것은 아니라는 것.  

 17년동안 우리의 관계는 시어머니와 나의 '콜라보'였다. 우린 꽤 잘맞는 고부니까. 어머니께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어쨌든 나는 17년 만의 자유를 느끼러 집을 나선다. 발길 닿는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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