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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붙박이별 Mar 09. 2024

그냥 둘 수도 없고, 뽑아버리기에도 아쉬워 염색을 한다

시간과 나이 듦, 우리에게 허락된 유일한 공평함

# 흰 머리카락... 그냥 둘 수도 없고, 뽑아버리기에도 아쉬워 염색을 한다


나는 한 달에 한번 정도 남편 머리를 염색해 준다. 30대 초반에 몇 가닥씩 보이던 흰머리카락이 이제는 제법 많아졌다. 그냥 두기에는 나이 들어 보이는 것 같아 신경 쓰이고, 뽑아버리기에는 머리카락 한 올도 아쉬운 처지이니 염색이 가장 합리적인 대안이다.

  봄맞이 염색을 해주다 보니 그냥 볼 때는 몰랐는데 흰머리카락이 부쩍 늘어난 것이 보였다.


"흰머리카락이 저번보다 많이 늘었네. 하긴 자기 나이가 벌써 마흔여섯이니까..."

 내 말에 생전 짜증 내는 일 없는 남편이 뾰족한 말투로 말한다.

"마흔 넷이거든. 나라에서 낮춰준 나이를 왜 자꾸만 올려?!"

나이 이야기에 발끈하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늙기 싫었나 보다.

"다 같이 낮춰준 게 무슨 의미가 있어? 마흔여섯이든 넷이든 큰 의미 없지. 신체 나이가 중요한 거지."

대문자 T답게 남편에게 지극히 현실적인 답을 했다. "그건 그렇지." 남편이 한껏 풀 죽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왠지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서 여느 때보다 더 꼼꼼하게 염색을 해 주었다. 염색을 끝낸 남편이 거울 속에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젊음이 너무나 눈부셔서 그 뒤에 오는 나이 듦이 보이지 않았을 뿐


 나는 초등학교 입학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학교를 떠난 적이 없다. 물론 학생에서 교사로 신분의 변화가 생기긴 했지만. 10대 아이들과 생활하다 보니 평상시에는 나이에 대해 크게 의식하지 않고 살고 있다. 하지만 문득문득 신체에서 느껴지는 나이 듦의 순간을 마주할 때면 가슴 한쪽이 쓰려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내 인생의 화양연화가 끝난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흰머리카락이 한 번에 여러 가닥 발견될 때,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노안이 시작되었다는 진단을 받았을 때, 더 이상 안경 없이는 밤운전이 힘들 때, 수업시간에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얘들아, 그거 있잖아. 그거." 하며 지시대명사로 말할 때 등 수많은 나이 듦의 순간은 예고 없이 찾아든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나이 듦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다가온다는 것을... 단지 젊음이 너무나 눈부셔서 그 뒤에 오는 나이 듦이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 시간과 나이 듦, 우리에게 허락된 유일한 공평함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다. 우리에게 허락된 유일한 공평함, 그것이 시간이고, 나이 듦이다. 일론 머스크나 나나 나이 드는 것은 매한가지다. 그렇게 생각하니 쓰려오던 가슴이 조금은 괜찮아지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이왕이면 '나답게, 멋지게' 나이 듦을 마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흰머리카락을 뽑아버리지 않고 검은 머리카락처럼 구불구불 예쁘게 세팅해 주었다. 안경점에 가서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에 맞는 안경도 맞췄다. 말을 할 때는 속도를 낮춰서 단어가 입 밖으로 나올 시간을 주었다. 근육을 유지하기 위해 하루 만보 걷기를 시작한 지 6개월이 넘었다. 아침마다 알록달록 예쁜 색의 과일과 두부, 달걀도 꼭 챙겨 먹는다. 나는 이렇게 조금씩 나이 듦을 마주할 준비를 하고 있다.

출처:Pixabay

# 파도 넘기 놀이

 

  아이가 어렸을 때 바닷가에 여행 간 적이 있다. 아이는 파도가 무서워서 멀리서 지켜만 보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재미있게 놀고 있는데 뜨거운 태양 아래서 뜨거운 모래를 밟고 서있는 아이가 안쓰러웠다. 이대로 있다가는 바닷물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집에 가게 생겼다.

 나는 아이의 손을 잡고 바다로 갔다.

 "엄마가 손 꼭 잡고 있으니까 괜찮아. 하나, 둘, 셋, 점프! 하면 높이 뛰는 거야. 알았지?"

 멀리서 다가오는 파도를 보면서 아이와 손을 꼭 잡고 "하나, 둘, 셋, 점프!!"를 외쳤다. 아이는 엄마와 아빠 손을 꼭 잡고 파도를 넘었다.

"엄마, 재밌어요. 또 해요!"

 그날 우리 가족은 파도 넘기를 하며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나는 지금 나이 듦의 파도 앞에 서있다. 저 멀리 보이던 파도가 이제 제법 가까이 온 것이 느껴진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당당하게 맞서 나이 듦의 파도를 맞이한다. 내 인생의 또 다른 화양연화를 꿈꾸며...


 "하나, 둘, 셋, 점프!!"


출처: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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