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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붙박이별 Mar 11. 2024

나는 배신하지 않는다.

삶의 어느 면을 바라보며 살아갈지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거니까

# 어차피 다 죽을 건데 왜 열심히 살아야 해요?


"엄마, 사람은 어차피 다 죽을 건데 왜 열심히 살아야 해요?"

 저녁을 먹다가 사춘기 둘째가 뜬금없이 물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잠깐 정적이 흘렀다.

 밥을 먹던 첫째가 "야, 질문이 웃기지 않냐? 태어났으면 재미있게 살아봐야지. 세상에 즐거운 일이 얼마나 많은데... 네가 아직 잘 몰라서 그래. 즐거운 일만 하기에도 인생은 짧은 법이다."

 고작 23개월 더 살았다고 녀석이 제법 철학자다운 답을 내놓았다.

 나는 무슨 말을 할지 몰라 할 말을 고르기만 할 뿐 선뜻 답을 내놓지 못했다.




# 인생에서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나다움'을 찾는 일


"음... 니체나 쇼펜하우어처럼 유명한 철학자도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라고 했어. 하지만 고통 속에서 절망하기보다는 그것을 당연함으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나다움을 찾고 자신을 사랑하며 원하는 것을 하며 살라고 말했어. 엄마는 이 말에 동의해.

 네 말처럼 사람은 누구나 죽지. 자연의 이치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나 자신에 대한 배신 아닐까? 엄마는 우리 아들이 이미 정해진 결말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인생에서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다움을 찾는 것에 초점을 맞추며 살아갔으면 좋겠어. 인생의 생과 사는 선택할 수 없지만 삶의 어느 면을 바라보며 살아갈지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거니까."


 고르고 고른 단어들을 구슬 꿰듯 꿰어 아이에게 늘어놓았다. 사춘기 아들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알아듣고 그런 건지, 엄마 잔소리가 길어질까 봐 서둘러 동의의 신호를 보낸 것인지는 알 수 없다.(후자일 가능성이 높지만 전자라고 믿고 싶다.) 아무튼 대화는 꽤 긍정적인 방향으로 마무리되었다.

출처:Pixabay


# 당신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얻었는가


 사춘기의 중요한 발달 과업 중 하나는 자아정체감을 형성하는 일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사는가?'와 같은 철학적이며 근본적인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것이다. 이때 형성된 자아정체감은 아이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끊임없이 영향을 미친다. 부정적인 자아정체감을 형성한 아이는 삶의 불행한 면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갈 것이다. 반면에 긍정적인 자아정체감을 형성한 아이는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며 주체적인 삶을 살아갈 것이다. 여기까지가 교과서에 나온 자아정체감에 대한 이론이다.


 3월이면 나는 자아정체감에 대해 가르친다. 벌써 햇수로 20년째다. 사춘기에 자아정체감을 제대로 형성하지 못하면 실패한 인생을 살 것처럼 협박 아닌 협박을 한다. 흥미검사, 적성검사, 가치관검사 등 다양한 검사도구를 들이밀며 자아정체감을 형성하기를 강요한다.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도 학창 시절에 그런 검사를 해봤을 것이다. 과연 우리는 그것으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얻었을까?

 어쩌면 그때의 우리는 협박에 의해서든 강요에 의해서든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 시절 이후에는 나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시간이 없었다. 대학, 졸업, 취업, 결혼, 출산, 육아, 직장생활, 결혼생활이라는 정해진 흐름 속에 몸을 맡기고 여기까지 밀려왔으므로.




# 나는 배신하지 않는다


 2023년 대한민국 평균수명은 85세 정도다. 그렇다면 나는 인생의 절반을 살아낸 것이다. 한눈 한번 팔지 않고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온 삶이었다. 그런데 나는 무엇을 향해 열심히 달려온 것일까? 허무함이 밀려온다. 정해진 일에 순응하던 삶의 태도를 조금 바꿔보았다. 하고 싶은 일과 하기 싫은 일을 당당히 요구하려는 내 모습이 지인들은 상당히 낯선 모양이다.

" 자기, 사십춘기 온 거 아니야?"

 맞을지도 모른다. 마흔을 훌쩍 넘긴 이제야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뒤늦은 답을 찾으려 하는 것을 보면...

 문득 아이에게 한 말이 떠올랐다.


이미 정해진 결말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인생에서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나다움'을 찾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살았으면 좋겠어.

  그 말은 아이가 아닌 나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다움'을 찾는 일에 게을러지는 것은 나 자신에 대한 배신이다. 나는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당당히 요구하고, 맞서고, 거절하는 센 언니가 되어 볼 생각이다. 타인에게 멈춰있던 고개를 돌려 오롯이 나에게 집중한다.


출처:Pixabay




  3월부터 새로운 수업 방식에 도전하고 있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실행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하지만 힘듦과 더불어 오는 것이 있다. 도전할 때의 두근거림, 실패했을 때의 쓰라림, 성공했을 때의 달콤함이 그것이다.

 정해진 것에 초점을 맞추고 사는 인생은 편안하지만 두근거림이 없다. 인생의 달콤함과 쓰라림, 그리고 두근거림을 통해 '나다움'을 찾아가고 있다. 내일은 오늘보나 더 많은 '나다움'을 찾기를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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