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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글쓰기 노트

노트 하나를 더 만들었다

by 작가의식탁 이효진

아동문학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뒤, 나는 노트를 하나 새로 마련했다. 그 안에는 앞으로 내가 쓰게 될 동화의 씨앗들이 조용히 잠들어 있다. 아직 세상에 꺼내지 못한 이야기들이지만, 내게는 그 어느 재산보다 귀하다.


사실 나는 예전부터 늘 기록하며 살아온 사람이다. 방송작가로 일하던 시절, 매일 새로운 아이템을 찾아야 했다. 신문을 오려 붙이고, SNS를 훑으며, 그날의 게스트를 정하고, 내일의 이슈를 준비했다. 정리하느라 분주한 나를 보며 지나가던 엔지니어 감독님은 이렇게 말씀하신곤 했다.


"뭘 그렇게 부지런히 붙이고 쓰세요?"


나는 그저 웃음으로 대답했지만, 그때의 '아이템 노트'는 내 생존 도구였다. 매일 방송이 있는 데일리 프로그램을 담당했기에 하루라도 빈 페이지로 넘길 수 없었다. 그래서 늘 기록했다. 그 습관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노트는 조금 다르다. 이제 그 안에는 방송 아이템 대신 세상의 모든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적혀 있다.


IE003541461_STD.jpg 메모 노트


물론 이 노트 안의 글씨는 깔끔하지 않다. 나 혼자만 알아볼 수 있는 메모들이 뒤섞여 있다. 누군가에게는 낙서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줄 간격도 제멋대로고, 어떤 장에는 동화의 단서만, 또 어떤 장에는 짧은 한 문장만 적혀 있다. 하지만 나에게 이 낙서들은 곧 삶이고 꿈이다.


요즘 나의 하루는 여유롭지 않다. 사춘기에 접어든 초등 4학년 아이와 이제 막 중학생이 된 아이, 두 아이의 감정선은 하루에도 몇 번씩 요동친다. 엄마인 나의 마음도 덩달아 흔들린다. 말 한 마디에 아이는 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리고, 나는 그 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인다.


'내가 뭘 잘못했을까?'


아이를 이해하고 싶으면서도 나 역시 지친다. 사춘기는 아이의 성장통이지만, 동시에 엄마의 성장통이기도 하다. 그래서 요즘의 아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자연스레 내 메모 안으로 들어온다. 그 안에는 아이의 말투, 표정, 미묘한 감정선이 짧은 문장으로 잠들어 있다.


게다가 나는 무인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무인이라 하루 종일 자리를 지킬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손이 안 가는 일도 아니다. 상품을 정리하고, 청결을 유지하는 일에는 생각보다 많은 정성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요즘은 매출도 줄어 마음이 뒤숭숭하다. 불안이 고개를 들면 글을 쓸 여유는 더 줄어든다. 그럴 때마다 나는 노트를 펼친다. 노트 안에는 순간순간 떠올랐던 생각들이 빼곡히 적혀 있다.


"아이는 왜 갑자기 울었을까?",

"엄마의 말 한마디가 아이의 하루를 바꿀 수도 있을까?",

"상처가 별이 되는 이야기."


이런 단편적인 문장들이 어느 날에는 동화의 한 장면이 되고, 또 어느 날엔 나를 위로하는 문장이 된다. 지금 나는 글을 몰입해 쓸 만큼의 여유는 없지만, 그래도 이 노트에 한 줄 한 줄 적어가는 시간은 내 마음을 정돈해준다. 나는 오늘도 짧게라도 메모한다.


"이건 나중에 꼭 써야지."


그렇게 한 줄씩 모인 메모들이 언젠가 한 권의 책이 될 것이다. 누군가는 저축 통장을 보며 금액이 늘어가는 걸 보며 뿌듯해하지만, 나는 이 노트를 보며 마음의 통장을 확인한다. 여기에는 돈 대신 '이야기'가 쌓인다. 그건 나를 작가로 이끄는 힘이 된다.


얼마 전에는 이 노트 속의 한 장면이 실제로 한 편의 동화로 태어났다. 메모 덕분에 글을 쓰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금방 엮어서 한 편의 이야기가 되었고 옆에서 지켜보던 아이가 말했다.


"엄마는 진짜 능력자야! 어떻게 이렇게 한 편의 글을 뚝딱 완성해?"


그 말에 웃음이 났다. 그 원고는 지금 출판사와 계약을 마치고 편집 중이다. 그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벅차다. 아직은 작고 미약한 첫걸음이지만 분명히 나는 한 걸음 나아갔다. 이 노트 속에서 피어난 씨앗이 실제로 세상 밖으로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 이후로 나는 더 자주 노트를 펼치게 되었다. 노트를 보면 마음이 조금씩 안정된다. 이 안에는 내가 걸어온 시간, 엄마로서의 고민, 작가로서의 열망, 그리고 살아가는 사람으로서의 흔들림이 모두 담겨 있다. 때로는 아무런 수입을 주지 않고, 겉으로 보기엔 낙서에 불과하지만, 이 노트는 분명히 내 삶을 지탱하고 있다.


나는 알고 있다. 지금 당장은 불안하고, 가게 매출도 줄고, 아이와의 대화는 여전히 쉽지 않지만, 이 노트 안에는 내가 살아온 시간의 흔적이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방향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노트를 펼친다. 새로운 이야기를 적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마음을 다시 다잡기 위해서다. 노트는 내게 '괜찮다'고, '조금씩 나아가면 된다'고 말해주는 친구 같다.


이 메모 노트에 나는 여전히 믿음을 둔다. 언젠가 자그마한 이 씨앗들이 또 다른 진짜 책, 동화책 안에서 살아 숨 쉴 그날을 기다린다. 그날이 오면 나는 조용히 이 노트를 다시 펼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적을 것이다.


"이 모든 시작은, 바로 이 노트 한 권이었다."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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