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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놀이터로 가자

아날로그의 경험이 중요해

by 작가의식탁 이효진

<2025년 10월에 작성한 글입니다>


최근 유튜브 '교육대기자TV'에서 트렌드 분석 전문가인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명예교수의 인터뷰를 보았다. 그는 요즘 아이들에게 필요한 역량으로 아날로그적 경험을 강조했다. 그 순간, 우리 가족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지난 2022년, 남편이 시골에 조그만 땅을 사겠다고 했을 때 나는 의아했다. 그 땅은 우리 가족이 살기엔 멀리 떨어져 있었고, 접근성도 좋지 않았다. 길이 험해 차로 이동하기 불편했고, 위치도 외진 탓에 집을 짓고 생활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였다. 투자 가치가 전혀 없어 보이는 땅이었다.



우리 모두의 놀이터가 된 남편의 놀이터


"도대체 이 땅을 어디에 쓰려고?"


내 반응에 남편은 담담하게 말했다.


"나만의 놀이터로 쓰고 싶어. 망치질도 하고, 용접도 하고, 그 안에서 뭔가 뚝딱뚝딱 만들고 싶어."


남편은 그 땅을 집을 짓는 용도로 보지 않았다. 답답한 일상에서 벗어나 몰두할 수 있는 '만들기 놀이터'. 자유롭고 해방감을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는 뜻이었다. 처음엔 남편의 의도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남편에게도, 우리에게도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할 수 있다는 걸.


IE003529519_STD.jpg 남편은 배를 타고 제주에서 육지 땅을 오갔다.


그런데 왜 하필 가족과 멀리 떨어진 육지였을까? 제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우리 부부에게 배나 비행기를 타야 갈 수 있는 육지는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제주 땅값은 이미 하늘 높이 치솟아 남편이 꿈꾸던 놀이터를 마련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던 중 육지 시골에는 의외로 쓸만한 땅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결국 남편은 그곳에서 놀이터의 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다.


"꼭 집이어야 할까?"


스스로에게 물으며 시작된 남편의 시도는 출장 다니듯 주말마다 육지로 향하는 생활이 되었다. 마침내 우리 가족은 그 땅과 더 가까워지기 위해 순천으로 이사를 결심했다.


물론 그곳에 집을 짓고 살 계획은 없다. 우리는 깨달았다. 땅의 의미는 반드시 건물을 세우는 데만 있지 않다는 사실을. 남편은 작은 집 모형을 세우고, 그네를 만들고, 그 안에서 활을 쏘며 놀기도 했다. 땅은 단순한 소유가 아니라 남편이 숨 쉬고 살아가는 또 다른 방식이었고, 동시에 우리 가족 모두의 놀이터가 될 수 있었다.


IE003529520_STD.jpg 활쏘기를 하는 남편


제주에서 그 땅을 오가던 시절만 해도 달랐다. 남편에게는 한 달에 서너 번 찾아가는 그야말로 소중한 땅이었다. 가끔 아이들도 아빠를 따라 육지로 향했다. 그곳은 남편뿐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세상에서 가장 넓은 놀이터였다. 삽을 들고 흙을 파며 땀에 흠뻑 젖던 날들, 나뭇가지를 모아 모닥불을 지피던 순간들, 고기를 구워 먹던 저녁이 겹쳐졌다.


지난 2013년 우리가 제주에서 땅을 사서 집을 짓던 기억도 포개졌다. 그 시절 아이들은 자연 속에서 온몸으로 뛰놀며 웃음을 터뜨렸다. 나무 뒤에 숨어 머리카락이 보일까 조마조마하던 술래잡기, 미니 텃밭에서 따 먹던 오이,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 아래 영화 감상. 아이들은 몸과 감각으로 세상을 배우던 아날로그가 있는 시절을 통과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상황은 달라졌다. 이제 첫째는 중학생, 둘째는 초등학교 4학년. 스마트폰이 손에 붙은 듯 떨어지지 않는다. 게임과 영상에 빠져 하루를 보낸다. 틈만 나면 게임을 하고, 영상을 본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제 그만 해"하고 소리쳐야 한다. 참다 못해 스마트폰을 압수하기도 했다. 그러면 아이는 울면서 스마트폰을 달라고 떼쓰고 어떻게든 숨겨둔 기기를 찾아내려 애썼다. 그 상황이 반복될수록 마음이 무겁다. '내가 아이를 잘 키우고 있는 걸까?'하는 자책까지 밀려온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우리가 아이들을 남편의 놀이터에 자주 데려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가족이 함께 놀이터에 가자며 결심 끝에 육지로 이사까지 했지만 정작 가까이 와서는 오히려 발길이 뜸해졌다. 이유는 늘 같았다. 남편이 일에 치여 바쁘다는 핑계, 피곤하다는 핑계, 도시 생활에 매여 있다는 핑계. 그러는 사이 우리는 자연 속에서 보내는 소중한 시간을 놓쳐버리고 있었다.



IE003529521_STD.jpg 별이 빛나는 야외 극장


예전에는 "저도 삽질하러 갈래요!"하며 뛰어가던 아이가 이제는 스마트폰 작은 화면 속에서만 웃고 있는 현실이 서글펐다.아이들은 디지털 세상을 좋아한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하지만 동시에 삽을 들고 땅을 파는 일, 활을 쏘며 환하게 웃는 일, 모닥불 앞에 앉아 별빛을 올려다보는 일에서도 큰 즐거움을 느낀다.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오가며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디지털'도, '아날로그'도 어느 한쪽이 아니다. 두 세계를 오가며 경험할 수 있는 힘, 그것이 아이들에게 가장 소중한 자산일 것이다.


그래서 이번 추석 연휴, 우리는 다시 아빠의 놀이터로 떠날 계획이다. 아빠가 만든 캠핑 공간 안에서, 모닥불 앞에 둘러앉아 '불멍'을 즐기고 고기를 구워 먹을 것이다. 흙냄새 나는 땅 위에 서성이다가 아빠가 한 땀 한 땀 만든 작은 쉼터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별빛 가득한 하늘을 함께 바라보려 한다. 아이들에게는 스마트폰보다 훨씬 귀한 경험이 될 것이고, 우리 가족에게는 다시 찾은 원초적인 행복이 될 것이다.


김난도 교수가 말했듯, 아날로그적 경험은 아이들의 감각을 확장시킨다. 손으로 만지고, 몸으로 부딪히며, 직접 창조하는 경험은 디지털 화면 속에서는 얻을 수 없다. 그 속에서 아이들은 몰입하고, 상상하며, 진짜로 행복해 한다.


이제 나는 땅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처음엔 쓸모없어 보였던 그 시골 땅이, 우리 가족에게 가장 소중한 놀이터가 되었다. 건물을 짓지 않아도, 돈이 되지 않아도, 그 땅은 우리에게 삶의 또 다른 얼굴을 보여주었다. 나는 요즘 스스로에게 자주 묻는다.


'아이에게 흙냄새 나는 시간을 얼마나 선물하고 있나?'


부모의 작은 선택이 아이의 기억과 성장에 큰 차이를 만든다. 최신형 기기를 사주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더 오래 남는 것은 부모와 함께한 자연 속의 시간이다. 아이가 뛰어놀며 만든 추억은 세월이 지나도 빛바래지 않는다.


이번 추석, 아이들과 함께 다시 그 놀이터로 향한다. 나는 믿는다. 아이의 기억 속에 오래 남을 것은 스마트폰 화면이 아니라, 삽질하며 웃던 얼굴, 별빛 아래 반짝이던 눈빛, 그리고 아빠와 함께 땀 흘리며 보낸 시간일 거라고.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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