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무던히도 싫어했던 ‘나’와 ‘그녀’에게
저는 제가 싫었습니다. 가난하고, 뚱뚱하고, 공부도 못하고, 뭐 하나 특기라고 내세울 것 없는 아이였습니다. 그런 제가 싫었습니다. 그런 자신을 싫어하는 제가 더욱 싫어졌습니다. 악착같이 공부하고, 돈을 벌었고, 살을 뺐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저를 싫어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저의 신음을 듣지 못했고, 저는 분명 병들었는데 아프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문제였던 걸까요?
가난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가난했기 때문에 삐뚤어진 마음이 문제였습니다. 뚱뚱한 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뚱뚱했기 때문에 삐뚤어진 마음이 문제였습니다. 공부를 못한 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공부를 못했기 때문에 삐뚤어진 마음이 문제였습니다. 그 삐뚤어진 마음 때문에 마음속 깊은 곳에 스멀스멀 올라오는 우울과 불안, 시기와 질투, 짜증과 무기력, 자기연민이 문제였습니다.
그 삐뚤어진 마음의 정체를 이제 압니다. ‘피해의식’이었습니다. “돈 많은 인간들은 다 도둑놈들이야.” 가난 때문에 삐뚤어진 마음은 돈에 대한 피해의식이었습니다. “내가 친구가 없는 건 뚱뚱하기 때문이야.” 뚱뚱함 때문에 삐뚤어진 마음은 외모에 대한 피해의식이었습니다. “공부 잘하는 애들은 재수 없어.” 공부를 못해서 삐뚤어진 마음은 학업에 대한 피해의식이었습니다.
저는 가난해서, 뚱뚱해서, 공부를 못해서 제가 싫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 안에 있던 그 피해의식 때문에 제 자신이 싫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돈을 벌고, 살을 빼도 저를 싫어하는 마음이 쉬이 사라지지 않았던 겁니다. 한번 삐뚤어진 마음은 좀 쉽게 바로 잡히지 않으니까요. 저는 병들었던 거였습니다. 피해의식이란 병. 그런데 이 병에 걸린 이들의 신음소리는 아무도 듣지 못합니다. 병들었는데, 아프지 않기 때문입니다.
빛이 날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를 만났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녀가 팔짱을 꼈습니다. 그녀의 미모에 주눅이 들어 고백을 망설이고 있던 제게 그녀가 먼저 팔짱을 껴주었습니다. 봄날의 바다 향기가 여전히 제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은 모두 그녀 덕분입니다. 여신을 모시는 마음으로 연애를 했습니다. 그녀 역시 저를 진심으로 아껴주려고 노력했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영원할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연애는 순탄하지 않았죠. 저만큼이나 그녀 역시 저와 같은 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 역시 피해의식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녀의 마음은 삐뚤어져 있었습니다. 그녀와 함께하는 동안, 빛나는 외모 뒤에 가려진 그녀의 한없이 음울한 마음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항상 이유 없이 우울하고 불안했고, 명랑하고 유쾌한 이들을 시기하고 질투했으며,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는다며 짜증을 내었습니다. 그 반복되는 일에 지쳐 무기력과 자기연민에 빠지곤 했습니다. 그녀는 그런 자신을 무던히도 싫어했습니다. 아무도 그녀의 신음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그녀 역시 병들었는데, 아프지 않았으니까요.
그녀를 이해하고 보듬어 주고 싶었습니다. 제 나름으로 애를 썼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습니다. 돌아보면 당연한 일이었을 겁니다. 피해의식에 휩싸여 삐뚤어진 자신의 마음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제가 감히 누구를 이해하고 보듬을 수 있었을까요? 그녀와 함께 있을 때, 그녀를 유쾌하고 즐겁게 해주기보다 오히려 저마저 우울·불안·시기·질투·짜증·무기력·자기연민에 휩싸이기 일쑤였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점점 크고 작게 다투던 날들이 많아졌습니다.
“너는 밑 빠진 독 같다. 이제 정말 지친다. 그만하자.” 두 번의 봄이 더 지난 가을, 그녀에게 이별을 말했습니다. 가을 바다의 향기가 깊은 후회로 느껴지는 것은 모두 제 탓입니다. 후회합니다. 그녀를 더 아껴주지 못했던 것을 후회합니다. 하지만 압니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고 해도, 저는 아마 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요. 자신을 싫어하는 두 사람의 사랑은 결코 해피엔딩이 될 수 없으니까요. 병들었는데 아프지 않은 이들의 만남은 언제나 새드엔딩으로 끝맺게 되니까요.
이제부터 시작하게 될 긴 이야기는 가장 먼저, 언젠가의 나와 그녀를 위한 글입니다. 피해의식에 휩싸여 소중했던 그녀를 더 아껴주지 못한 언젠가의 나를 위한 글입니다. 또한 이 이야기는 ‘그녀’를 위한 글입니다. 철없던 시간을 지나 이제 겨우 그녀를 이해하고 보듬어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겠지만, 지금이라도 그녀에게 못다 해준 이야기들을 해주고 싶습니다.
여전히 피해의식에 휩싸여 자신을 싫어하고 살고 있을지 모를 그녀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를 이제야 전합니다.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만큼이나 그녀의 마음 역시 반짝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습니다. 나의 피해의식 때문에 그녀를 아껴주지 못했던 마음을 뒤늦게라도 전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여러분께 닿은 이글이 스무 해 전의 나와 그녀만의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철학을 공부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종종 이성복 시인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들은 모두 병들었는데 아프다고 말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그날의 신음소리를 들을 수 없었던 겁니다. 마흔을 훌쩍 넘어 자신을 그리도 싫어하는 수많은 ‘나’와 ‘그녀’를 보았습니다. 이 글은 수많은 ‘나’와 ‘그녀’를 위한 글입니다. 스무 해 전 ‘나’와 ‘그녀’를 구원하는 일이 바로 지금 ‘우리’를 구원하는 일이라는 믿음으로 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긴 이야기를 읽으며 병든 이들이 모두 충분히 아파했으면 좋겠습니다. 모두 고통의 신음소리를 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두에게 그날의 신음소리가 들렸으면 좋겠습니다. 이 긴 이야기가 끝날 때 즈음, 병이 사라져 아프지 않아지길 바랍니다. 긴 이야기의 마지막장을 덮을 때, 저도, 그녀도 그리고 이 글을 닿은 모든 분들도 더 이상 자신을 싫어하지 않고, 조금 더 자신을 좋아하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언젠가 어느 시인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두 새살이 돋았기에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