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의식의 얼굴:우울함

6. 우울함


우울함은 피해의식의 대표적인 얼굴 중 하나다. 우울한 이들이 모두 피해의식에 잠식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피해의식에 휩싸인 이들은 반드시 우울하다. 흔히 우울함과 무기력을 유사한 상태로 여기지만 이 둘은 전혀 다르다. 우울함이 지속되어 어느 정도 수위를 넘어가면 전혀 무기력하지 않은 상태(예컨대 조증躁症)에 이르기 때문이다. 무기력은 감정기복이 없는 상태이지만, 우울증은 때로 큰 감정기복의 상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울함’이라는 피해의식의 얼굴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앞서 피해의식의 여섯 가지 얼굴을 ‘도구’적 얼굴(두려움‧분노‧열등감‧무기력)과 ‘결과’적 얼굴(억울함‧우울함)로 구분했다. 여기서 ‘억울함’이라는 얼굴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다시 한 번 살펴보자. ‘억울함’은 ‘두려움‧분노‧열등감‧무기력’이라는 도구적 얼굴이 만들어낸 결과적 얼굴이다. 쉽게 말해, ‘두려움-분노-열등감-무기력’이라는 얼굴의 배치가 ‘억울함’이라는 얼굴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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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는 ‘우울함’이라는 얼굴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답할 수 있다. 이는 ‘억울함’의 형성 원리를 확장함으로써 설명할 수 있다. ‘우울함’은 ‘두려움-분노-열등감-무기력-억울함’의 배치가 만드는 결과적 얼굴이다. 피해의식의 여섯 가지 얼굴 중 가장 모호한 얼굴이 바로 우울함이다. 두려움‧분노‧열등감‧무기력‧억울함은 비교적 선명하지만 우울함은 모호하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두려움‧분노‧열등감‧무기력‧억울함이라는 마음은 비교적 분명하게 인지할 수 있지만, 우울함이라는 마음은 좀처럼 분명히 인지하기 어렵다.


왜 그런가? 그것은 나머지 다섯 가지 얼굴(두려움‧분노‧열등감‧무기력‧억울함)의 조합이기 때문이다. 피해의식에는 다섯 가지 표정(두려움‧분노‧열등감‧무기력‧억울함)이 있다. 이 표정은 사람과 상황, 조건에 따라 달라지고, 그 달라지는 표정들이 뒤섞여 한 순간 어떤 표정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끊임없이 순간적으로 미묘하게 달라지는 그 표정이 바로 우울함이다. 이것이 우울함이라는 얼굴이 모호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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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에 관한 피해의식이 있는 이를 생각해보자. 그는 돈 없는 상황이 두렵고 돈 많은 이들을 보면 분노한다. 또 돈이 없다는 사실에 열등감을 느끼고 그 과정에서 점점 무기력해진다. 그렇게 결국은 모든 것이 억울해진다. 이것으로 끝이 날까? 그렇지 않다. 그 모든 부정적인 감정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알 수 없는 우울함이 찾아온다. 이 우울함은 명료한 논리로 설명할 수도 없고 분명한 감정으로 파악할 수도 없다. 이는 피해의식의 다섯 가지 표정들(두려움‧분노‧열등감‧무기력‧억울함)이 뒤엉켜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불쑥 찾아오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피해의식은 때로 우울함이라는 얼굴로 우리를 찾아온다. 우울함만큼 우리네 영혼을 파괴하는 감정도 없다. 가벼운 우울감부터 공황 증세를 유발하는 심각한 우울증까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든 우울함은 우리의 영혼을 좀먹는다. 피해의식에 휩싸인 이들이 삶의 활력과 의지를 잃고 죽음의 잿빛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우울함에 잠식당한 삶이 어떻게 유쾌한 웃음과 아름다운 미소를 담을 수 있겠는가?


우울함은 다른 얼굴들보다 더 심각한 불행을 초래할 수 있다. 우울함은 비상경보기가 없는 불행이다. 그것은 소리 없이 찾아오는 불행이다. 같은 불행이 우리를 찾아오더라도, 비상경보기를 켜지 않으면 더 큰 불행이 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것이 우울함이 더 심각한 불행이 될 수 있는 이유다. 모호해서 소리 없이 찾아오는 불행만큼 위험한 불행도 없다. 피해의식이 우울함이라는 얼굴로 우리를 찾아올 때 불행의 전주곡이 아니라 불행 그 자체가 이미 시작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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