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의식이 없는 이는 없다

‘턱 마스크’보다 ‘노 마스크’가 불편한 이유


피해의식이 없는 이는 없다. 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에게나 피해의식은 있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피해의식을 특정한 이들이 갖고 있는 삐뚤어진 마음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간단한 실험을 하나 해보자.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던 시절, 두 사람이 길을 걸어가고 있다. 한 사람은 마스크를 아예 쓰지 않았고, 한 사람은 턱에 걸친 상태로 쓰고 있다. 우리는 이 두 사람을 보며 어떤 감정이 들까? 당연히 반감이 든다. 바이러스를 전파할 가능성이 있는데도 마스크를 쓰지 않았으니 말이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은 피해의식이 없기에 언제나 이성적‧합리적‧논리적이라고 믿는다. 그들의 생각은 이렇다. ‘마스크를 쓰지 않는 사람에게 반감이 드는 이유는 그 사람이 바이러스를 전파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야.’ 이런 생각은 사실일까? 만약 이런 생각이 사실이라면, 마스크를 쓰지 않은 이와 마스크를 턱에 걸친 이에 대한 반감의 크기는 똑같아야만 한다. 이성적‧합리적‧논리적으로만 접근했을 때, ‘노 마스크’와 ‘턱 마스크’는 완전히 똑같은 사태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노 마스크’와 ‘턱 마스크’에 똑같은 반감을 가지는 이들은 거의 없다. 세상 사람들의 대부분은 ‘노 마스크’에는 큰 반감을, ‘턱 마스크’는 작은 반감을 갖는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이에게는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이기적이야!”라며 큰 반감을 갖는다. 반면 마스크를 턱에 걸친 이에게는 “그래도 마스크 쓰는 흉내라도 냈네.”라며 상대적으로 작은 반감을 가진다. 왜 그럴까? ‘노 마스크’는 너무 얌체 같고, ‘턱 마스크’는 그나마 시늉이라도 한 것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마음은 어디서 왔을까? 피해의식이다. 마스크를 쓰며 답답한 생활을 했던 일이 피해의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노 마스크’에 대한 큰 반감의 속내는 이렇다. ‘나는 마스크를 쓰며 답답하게 생활하고 있는데, 너는 마스크를 쓰지 않아서 화가 난다.’ ‘턱 마스크’에 대한 작은 반감의 속내는 이렇다. ‘너는 나만큼은 아니지만 마스크를 턱에라도 써서 불편하게 살고 있으니 덜 화가 난다.’ 이것이 우리의 보편적인 마음 상태다.


oil-painting-1128693_1920.jpg


피해의식은 인간의 보편적인 마음 상태다


이처럼 피해의식은 예외적인 마음이라기보다 인간의 보편적인 마음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논리적으로 자명하다. 피해의식은 피해받은 기억으로 인한 과도한 자기방어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피해의식이 없으려면 ‘피해’가 없거나 ‘기억’이 없거나 ‘과도한 자기방어’가 없어야 한다. 하지만 이 세 가지 경우는 모두 불가능하다.


피해(상처)를 생각해보자.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피해(상처)를 한 번도 받지 않은 사람은 없다. “삶은 고해”라는 싯타르타의 말을 빌릴 필요도 없다. 삶 자체가 고통(상처)의 연속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누구에게나 삶은 고통이다. 어째서 그런가? 고통 없이 살아가는 이도 어딘가에 존재하지 않을까? 안타깝게도 그런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불교에서 말하는 ‘고苦’는 팔리(인도의 한 지역)어로 ‘두카dukkha’이다. 이는 어원적으로 ‘어긋남’을 의미한다. 즉, 무엇인가 바라는 바가 있는데, 그것에서 어긋나서 발생하는 불만족스러움이 바로 불교에서 의미하는 ‘고’ 즉, 상처이다.


삶은 이런 ‘어긋남’의 연속 아닌가? 즉, 산다는 것은 어긋남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 어긋남의 종류와 크기는 다를 수 있지만, 누구든 자신이 바라는 바에 대한 어긋남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날 수는 없다. 삶은 시작부터 끝까지 그 자체가 고통(어긋남)이다. 삶의 시작을 생각해보라. 안락한 엄마의 자궁 밖으로 나온 순간부터 강한 빛에 노출되고 폐호흡을 해야 하는 고통(어긋남)이 시작된다. 그 이후, 겪어야 해야 했던 다종다양한 고통(입시‧이별‧취업‧생계‧질병‧죽음…)들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이는 모두 우리가 항상 무엇인가를 바라고 그 바람은 언제나 어긋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발생한 상처들이다. 이처럼 피해(상처) 혹은 고통(어긋남)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삶의 조건이다.


‘기억’은 어떤가? 누구에게나 기억은 있다. 우리가 살아가며 겪었던 일들은 의식이냐 무의식이냐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 기억된다. 아주 예외적인 경우(기억상실증‧치매)가 아니라면 기억이 없는 이는 없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이유는 모두 기억 때문이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기억할 수 없다면 그는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없다. 이처럼 어떤 이라도 ‘피해(상처)’와 ‘기억’에 속박되어 있다. 인간에게 ‘피해(상처)’와 ‘기억’은 인간의 보편적 조건이다. 그러니 어떤 사람이라도 ‘피해’와 ‘기억’으로부터 벗어나 피해의식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KakaoTalk_20221129_104929366_01 (1).jpg


피해의식은 ‘있음-없음’이 아니라 ‘균형’의 문제다


이제 ‘과도한 자기방어’를 생각해보자. 과도한 자기방어가 없는 사람은 분명 존재한다. 지독한 가난(피해)을 기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도한 자기방어를 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그는 피해의식이 없는 것일까? 단언할 수 없다. 과도한 자기방어는 ‘있음’과 ‘없음’이라는 이분법으로 구분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도한’의 반대 개념은 ‘적절한’이다. 지독한 가난을 기억함에도 불구하고 적절하게 베풀며 살 줄 아는 이는 분명 ‘피해의식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어떤 순간의 상태일 뿐이다. 그러니 이 경우는 ‘피해의식이 없다’가 아니라 ‘피해의식이 옅다’고 말해야 적확하다. 지독한 가난을 경험했지만 적절히 베풀며 살던 이를 다시 생각해보자. 그는 영원히 그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까?


단언하기 어렵다. 어떤 상황과 조건 속에서 그는 다시 돈 때문에 자신을 과도하게 보호하려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적절한 자기방어를 하는 순간이 있다고 해서 피해의식 자체가 없어졌다고 할 수는 없다. 설령 적절한 자기방어를 하는 시간이 길어졌다고 해도, 그것 역시 피해의식이 옅어진 시간이 길어진 것이지 피해의식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나(혹은 그)는 피해의식이 없다.’ 이러한 진단은 어느 변화의 한 순간을 고정된 상태로 규정한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 상처받은 기억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자기방어가 작동할 때도 있고, 어느 순간에는 그 상처의 기억 때문에 과도한 자기방어가 작동할 때도 있다. 이처럼 피해의식은 아슬아슬한 외줄타기와 같은 ‘균형’의 문제이지 ‘있음’과 ‘없음’의 문제가 아니다. 피해의식을 ‘있음’과 ‘없음’의 문제로 접근할 때 피해의식이란 문제를 잘 다룰 수 없다. 이쪽(있음)과 저쪽(없음)에 쏠리면 균형을 잡지 못하고 외줄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피해의식은 누구에게나 있고, 어느 순간에나 찾아올 수 있다. 피해의식은 인간의 보편적인 마음 상태다. 피해의식을 다룰 때 이 사실을 분명히 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피해의식에 잠식되는 일은 자신에게는 결코 피해의식이 있을 리 없다는 착각으로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피해의식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자신의 피해의식을 들여다 볼 수 있는 틈이 생긴다.

keyword
이전 11화피해의식의 얼굴:우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