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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된 것은 반드시 채워야 한다.

‘지각’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진행된다.


당신의 지각이 뇌의 내적 운동으로부터 도출된 것이고, 말하자면 피질의 중심에서 나오는 것처럼 모든 것이 진행된다고 해서 놀라서는 안 된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이는 쉽게 말해, ‘지각’은 외부 대상에 의해서 아니라, 몸의 내부에서 진행된다는 거예요. 무엇인가를 ‘지각’한다는 것은 외부 대상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거예요. ‘외부 대상이 존재하기 때문에 지각이 가능하다.’ 이것이 베르그손 당대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의 상식이기도 하잖아요. 이런 상식에 가까운 논의를 정면으로 반박하려고 하기 때문에 놀라지 말라는 거예요.


케이크를 ‘지각’한다고 해봐요. 그 ‘지각’은 그 케이크로 인해서 이뤄졌다고 생각하잖아요? 케이크가 거기(외부)에 있기 때문에 ‘지각’했다고 생각하잖아요.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죠. 케이크에 관심 없는 이는 커피만 보일 뿐, 케이크는 보이지 않잖아요. 케이크는 오직 케이크에 관심을 두는 이들에게만 ‘지각’될 뿐이죠. 이는 ‘지각’이라는 것이 외부(케이크)가 아니라 우리 내부(몸)에서 진행되기 발생하는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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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은 확장 가능하다.


베르그손의 말이 옳다면, 이제 하나의 논리적인 문제가 발생해요. ‘지각’이 우리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논리적으로 ‘지각’은 확장 불가능하죠. 논리 구조상 외부는 무한하고, 자신의 내부는 제한적이니까요. 베르그손의 논의에 따르면, ‘지각’은 확장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는 쉽게 말해, 명품을 ‘지각’하는 이는 영원히 명품만 ‘지각’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죠. 그의 곁에 아무리 많은 외부 대상이 존재한다고 한들, 그것이 ‘지각’될 리 없죠. 그러한 ‘지각’은 자신 내부(관심)에서 일어나는 일이니까요.


그렇다면 그에게 ‘지각’의 확장, 즉 명품 이외에 대상들(우정·사랑·꽃·구름·바다…)이 ‘지각’되는 일은 불가능한 걸까요? 즉, 그는 영원히 명품(관련된 것들)만 ‘지각’하는 삶을 살게 될까요? 아니면 온통 명품 생각뿐인 사람이라 하더라도, 우정·사랑·꽃·구름·바다… 같은 다양한 세계를 ‘지각’할 수 있게 될까요? 베르그손은 이제 이 질문에 대해서 답하려고 해요.


먼저 결론부터 말할게요. 우리의 ‘지각’은 확장가능해요. 심지어 인간의 ‘지각’은 그 어떤 생명체들보다 확장 능력이 크죠. 인간은 배고플 때 먹이를 찾고, 배가 부르면 아무것도 찾지 않은 동물들과는 분명 다르죠. 우리는 능동적으로 ‘지각’을 확장해 나갈 수 있잖아요. 인간의 ‘지각’은 분명 제한적인 측면이 있지만, 동시에 확장 가능해요. 달리 말해, 온통 명품에만 관심이 쏠려 명품만을 ‘지각’하는 사람도 다채로운 세계를 지각할 가능성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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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은 어떻게 확장되는가?


그렇다면 ‘지각’의 확장 가능성은 어떻게 현실화될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먼저 뇌와 지각 사이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부터 알아봅시다. 우리는 뇌를 통해 어떤 대상을 ‘지각’한다고 여기죠.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에요. ‘뇌-지각’은 ‘의지’라는 변수를 매개로 하는 함수 관계를 맺고 있어요. 이에 대해 베르그손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의식적 지각과 뇌의 변화는 엄밀하게 대응한다. 따라서 그 두 항의 상호의존성은 단지 그 둘 모두가 의지의 비결정성이라는 제3의 항의 함수라는 데에 기인한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베르그손에 따르면, “의식적 지각과 뇌의 변화는 엄밀하게 대응”해요, 하지만 이 “두 항의 상호의존성은 의지의 비결정성이라는 제3의 항의 함수”에 의해 결정돼요. 이는 뇌가 직접적으로 무엇을 ‘지각’하는 게 아니라, 뇌가 무엇을 ‘지각’하느냐는 ‘의지’에 따라 (촉발되는 비결정성에 의해) 달라진다는 것이죠. 쉽게 말해, ‘의지’가 있으면 더 많이 볼 수 있고, ‘의지’가 없으면 더 적게 볼 수밖에 없다는 말인 거죠. 이것이 식상한 꼰대 발언처럼 들린다는 것을 알아요. 하지만 때로 꼰대 발언이 삶의 진실일 때가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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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은 ‘가능적 행동’을, ‘뇌’는 ‘선택적 행동’을 그린다.


베르그손은 지금, ‘지각’과 뇌를 구분하고, 그 관계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뇌 구조는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운동들의 세밀한 지도를 제공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뇌 구조는 지각을 구성하기 위해 스스로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으로 보이는 외부 상의 분량이 바로 그 운동들이 영향을 미칠 우주의 모든 점을 그리고 있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베르그손에 따르면, ‘지각’은 ‘가능적 행동’을 그리고, 뇌는 ‘선택적 행동’을 그려요. 심장이 두근거릴 만큼 매혹적인 사람이 나타났다고 해봐요. 그때, 머릿속으로 떠올릴 수 있는 여러 가지 ‘가능적 행동’들이 있죠. 그저 쳐다만 보거나, 연락처를 달라고 하거나, 집까지 쫓아가거나 등등 여러 가지 가능한 행동들이 있죠. 이것이 ‘지각’이에요. 그렇다면 이때 뇌는 무엇을 할까요? 그 여러 가지 가능한 행동 중에서 특정한 행동을 선택하는 것이 바로 뇌의 기능이에요.


뇌가 ‘지각’하는 게 아니에요. 물론 ‘지각’과 뇌는 서로 엄밀하게 대응하는 상호의존 관계에 있죠. 이는 둘 다 ‘행동’과 관계되어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둘 사이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죠. ‘지각’은 ‘가능한(잠정적) 행동’들을 떠올리는 것이고, ‘뇌’는 그 가능한 행동 중에서 특정한(현실적) 행동을 선택하게 하는 거예요. 다시 예를 들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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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의 확장


A가 오후 2시, 명동에서 매혹적인 C를 만났다고 해봐요. 명동 2시에 C밖에 없었을까요? 그때 명동에는 음악도 나오고, 건물도 있고, 화장품 판매원도 있고 주위에 엄청 많은 것들이 있었겠죠? 그렇지만 A는 그중에서 C만 ‘지각’하고 나머지는 ‘지각’하지 못했죠. 이는 A의 ‘지각’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죠. 그렇다면 A에게는 앞으로 영원히 C만 보일까요? 그렇지 않죠. 곧 음악도 들리고, 책도 보이고, 옷도 보이게 되겠죠.


이 ‘지각’의 확장은 어떻게 가능해졌을까요? 뇌의 작용(선택적 행동) 때문이죠. 뇌는 ‘행동의 중심’이라고 했죠? 뇌가 어떤 행동을 선택하면 우리의 ‘지각’은 확장되는 거예요. A가 매혹적인 C만 ‘지각’했을 때, ‘뇌’는 무엇을 할까요? A가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선택하는 거예요. 바로 여기서 ‘의지’가 개입하는 거예요. A가 C에게 커피 한 잔 마시자고 용기(의지!)를 내어 말을 건넨 뒤, 둘은 연인이 되었다고 해봐요.


그럼 어떻게 될까요? 다시 명동에 갔을 때, A는 이전에 ‘지각’하지 못한 수많은 것들을 ‘지각’할 수 있게 될 거예요. 반대로 A가 쭈뼛거리다가 C에게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될까요? A는 다시 명동에 가도 그 매혹적인 C만 찾을 수밖에 없어요. 즉 ‘지각’이 확장되려면, 특정한 행동을 선택해야 하는데, 그 선택은 ‘의지’라는 제3의 항에 의해서 결정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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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의 선순환 혹은 악순환

‘지각’의 선순환 혹은 악순환의 관계를 이해하나요? 우리의 ‘지각’은 우리 몸 내부에서 일어나기에 제한적 적일 수밖에 없어요. 즉 우리의 관심이 쏠리는 대상만 ‘지각’하게 되죠. 하지만 우리의 ‘지각’은 분명 능동적으로 확장되기도 하죠. 이 논리적 모순을 해결하는 비밀은 ‘의지’에 있죠. 인간에게는 ‘의지’라는 제3항이 존재하기 때문에 제한적인 ‘지각’ 너머 ‘지각’을 무한히 확장할 수 있어요. ‘지각’과 뇌의 변화는 상호의존적이고, 그 상호의존성은 결국 ‘의지’라는 항에 의해 결정되는 거죠. 그러니 결국 ‘지각’의 확장이라는 것은 ‘의지’에 의해 결정되는 셈인 거죠.


‘지각’은 결정(제한)적이고, 뇌는 (행동을) 결정할 뿐이죠. 누군가는 돈만을 ‘지각’하고, 돈을 벌건지 쓸 건지(혹은 어떻게 벌건지 쓸 건지) 결정하는 삶을 살뿐이죠. 하지만 인간은 그런 삶을 넘어서 ‘지각’을 확장할 수 있어요. 인간에게는 ‘의지’ 즉 비결정성이 있기 때문이에요. A가 C에게 가서 말을 걸지 혹은 쳐다만 보고 있을 건지는 자신의 ‘의지’의 문제가 분명히 개입해 있잖아요. 그 ‘의지’에는 결정된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는 어떤 대상을 ‘가능적 행동’으로만 ‘지각’할 수 있어요. 뇌는 그 가능한 행동 중에서 어떤 행동을 선택할 것인지를 결정하죠. 그런데 이 뇌의 선택에 아주 중요하게 개입해 있는 요소가 있죠. 바로 우리의 ‘의지’에요. 뇌가 어떤 행동을 선택할 때 그 선택은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아요. 사람마다 갖고 있는 ‘의지’, 즉 비결정적 요소의 영향 아래서 결정하게 되는 거예요. 이것이 인간의 '지각'이 제한적인 동시에 확장한 가능한 이유죠.


‘뇌’는 특정한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우리를 ‘의지’ 앞에 갖다 세우죠. 우리가 어떤 ‘의지’(“대충 살겠다” 혹은 “사랑하겠다!”)를 갖느냐 따라 뇌는 가능한 행동(쳐다만 보기 혹은 말걸기)들 중에서 특정한 행동을 결정하게 되죠. 이 ‘의지’를 통한 선택으로 인해 우리는 더 많은 대상을 ‘지각’하게 되는 거예요. 지각의 확장은 결국 ‘의지’를 통해 가능한 것이죠. ‘의지’라는 변수가 약하면 ‘지각’도 약하게 발휘되고, 강한 '의지'가 들어가면 강한 ‘지각’이 발휘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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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된 것은 반드시 채워야 한다.


‘삶에서 결핍된 부분이 있다면 꼭 해봐야 한다’고 종종 말하곤 해요. 돈이 결핍되었다면 ‘의지’를 가지고 벌어 봐야 해요. 힘들다, 어렵다는 그런 이야기할 때가 아니에요. 안 벌면 어떻게 돼요? 죽을 때까지 “돈, 돈, 돈“ 거리면서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어요. 이는 죽을 때까지 돈만 '지각'한다는 뜻이에요. 섹스가 결핍됐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섹스를 충분히 해 봐야 돼요. ‘내가 지금 나이가 몇 살인데 섹스야.’ 이렇게 이상한 도덕적 관념 뒤에 숨으면 어떻게 돼요? 죽을 때까지 섹스만 ‘지각’하는 거예요. 시도 못 읽고, 영화도 못 보고, 음악도 못 들어요. 섹스에 관련된 것만 봐요. ‘지각’이 협소해지는 거예요.


돈에 대한 결여 때문에 돈만 보인다면 어쩔 수 없어요. 지각을 확장하려면 ‘의지’를 가지고 돈을 벌어야 해요. 피해 갈 수 없어요. 돈을 벌어서 그 결여가 채워져야만 다른 게 보여요. ‘돈이 중요한 게 아니구나. 돈 말고 소중한 게 많구나.’ 섹스도 그래요. 온통 섹스 생각밖에 없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섹스를 해봐야 해요. 방법은 저한테 묻지 마세요. 본인이 ‘의지’를 갖고 방법을 찾는 거예요. 저한테 방법을 묻는다는 건 ‘의지’가 없다는 뜻이에요. ‘의지’를 가지고 본인이 가진 결여를 해소하려고 노력하면 지각은 커져요.


이런 논의에 어떤 이들은 또 이렇게 반문을 하죠. ‘의지도 이미 결정되어 있는 거 아닌가요?’ 돈을 벌 ‘의지’나 섹스를 하려는 ‘의지’도 이미 사람마다 이미 결정되어 있는 거 아니냐는 거죠. 답답한 소리예요. 이런 운명론적 태도를 갖고 있는 이들은 결국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거예요. ‘의지’는 결정되어 있나요? 아니죠. ‘의지’는 완전히 비결정성의 영역이에요.


돈을 벌 ‘의지’ 있는지 없는지 미리 결정되어있는 게 아니에요. 돈을 버는 행동을 하면 ‘의지’가 있는 것이고, 하지 않으면 ‘의지’가 없는 것일 뿐이죠. 행동하기 전에는 ‘의지’는 항상 비결정성의 영역에 가려져 있다가 행동하는 순간 결정의 영역이 되는 거예요. 삶에는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스스로가 채워야 하는 여분이 있어요. ‘의지’를 갖고 결여된 것을 채워야 ‘지각’이 넓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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