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제국 속의 제국’이 아니라 ‘자연 속의 인간’이다.
베르그손은 ‘지각’과 뇌에 대한 논의에 이어서 몸에 대한 논의로 나아갑니다. ‘지각’(가능적 행동)의 확장은 뇌의 작용(선택적 행동)으로 가능한 것이라고 말했잖아요. 그런데 이 뇌는 우리의 몸을 어떻게 행동시킬 것인지를 판단하는 기관이잖아요. 그러니 ‘지각-뇌-몸(행동)’의 순환 속에서 우리의 지각이 점점 더 풍부해지는 것이죠. 바로 여기에 몸의 중요성이 있는 거죠. 이 때문에 베르그손은 우리의 ‘몸’에 대해서 심층적으로 밝히려 해요.
사람들은 살아있는 신체를 제국 속의 제국으로 표상한다.『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여기서 베르그손이 말한 ‘제국 속의 제국’은 스피노자의 표현을 빌린 거예요. 그러니 스피노자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봅시다.
실제로 세상 사람들은 자연 안의 인간을 제국 안의 제국처럼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에티카』 B. 스피노자.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을 ‘제국 속의 제국’이라고 여기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에요. ‘제국 속의 제국’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거대한 제국 속에 있는 작은 제국을 생각해 봐요. 그 작은 제국이 할 수 있는 것은 둘 중 하나죠. 복종과 반란. 거대한 제국 속에 둘러싸인 작은 제국은 거대한 제국에게 철저하게 복종하거나 혹은 기회를 틈타 반란을 일으켜 거대한 제국 자체를 파괴하는 경우밖에 없죠.
그런데 이것(복종과 반란)이 인간이 ‘자연(법칙)’을 대하는 두 가지 태도 아닌가요? 거대한 제국을 ‘자연(법칙)’이라 생각해 봐요. 어찌 보면, 인간은 ‘자연’이라는 ‘거대한 제국(거부할 수 없는 삶의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형편과 비슷하잖아요. 이때 인간이 ‘자연’(삶의 조건) 대하는 태도 역시 둘 중 하나죠. 무기력하게 복종하거나 오만하게 반란을 일으키거나. 전자는 ‘신앙인’으로 후자는 ‘과학자’로 상징할 수 있죠.
인간은 ‘오만한 신앙인’인 동시에 ‘복종하는 과학자’다.
‘신앙인’은 ‘신’(자연) 앞에서 철저하게 복종하죠. 그들은 창조와 생성은 ‘신’의 몫일 뿐 자신은 그저 그 전능한 ‘신’(거대한 제국) 앞에서 철저하게 복종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죠. 우리는 신앙인의 결말을 알고 있죠. 그것은 무기력함이잖아요. 자신에게 어떠한 창조와 생성의 힘이 없다고 여기게 될 때 패배주의적 무기력에 휩싸일 수밖에 없죠.
‘과학자’는 어떨까요? 오만하게 자연(법칙)을 초월하려고 하죠. 그들은 자신의 힘(과학)으로 자연(법칙)을 초월할 수 있다고 여기죠. 그 결말 역시 우리는 이미 알고 있잖아요.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자연이 심각할 정도로 파괴되었잖아요. 그런데 과학자들은 반성하고 성찰하기는커녕 그들의 힘(과학)으로 인해 발생한 문제들을 다시 과학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있죠. ‘과학자’들 거대한 ‘자연’ 안에 존재하면서도 그 ‘자연’ 자체를 넘어설 수 있다는 오만함으로 반란을 꾀하는 존재들인 셈이죠. 그들은 그렇게 자연(삶의 조건) 자체를 파괴하려 하죠.
인간은 “제국 속의 제국” 같은 존재, 즉 ‘신앙인’도 ‘과학자’도 아니에요. 인간은 “자연 안의 인간”이에요. 이는 어떤 의미일까요? 인간은 거대한 ‘자연’ 안에서 그저 순응하는 존재(‘신앙인’)일까요? 그렇지 않죠. 인간은 분명 여느 생명체들과 다르게 창조와 생성의 능력이 있죠. 하지만 그렇다고 그 창조와 생성의 능력이 ‘자연’의 법칙을 초월할 수 있는 존재(‘과학자’)도 아니죠. 인간의 역사가 이를 잘 증명해 주고 있잖아요.
인간은 배고픔과 추위라는 ‘자연(삶의 조건)’ 안에서 그것을 넘어서고자 ‘농경’과 ‘주택’을 창조하고 생성했죠. 이처럼 인간은 자연 앞에서 무기력하게 복종하는 존재가 아니죠. 하지만 인간이 그런 창조와 생성을 이룩했다고 하더라도, 심지어 ‘농경·주택’보다 더 발전된 과학·기술로 새로운 것들을 창조하고 생성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먹지 않으면 배고프고, 밤이 되고 겨울이 되면 추워지는 자연(삶의 조건) 그 자체를 초월할 수는 없어요. 인간은 얼마든지 창조와 생성할 수 있지만, 그 창조와 생성은 거대한 ‘자연(삶의 조건)’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거죠. 말하자면, 인간은 ‘오만한 신앙인’이며 ‘복종하는 과학자’인 거죠.
몸은 신경 체계다.
베르그손 역시 몸에 관해서 스피노자의 이러한 관점을 이어받고 있어요. 베르그손은 우리 몸의 역할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야기 해주고 있어요.
신경계를 독립적인 존재처럼 표상한다. 즉, 지각을 만드는 것이 우선이고, 그다음에 운동을 창조하는 기능을 가진 별도의 존재로 신경계를 생각한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우리의 몸이 무엇인가요? 그것은 신경계라고 말할 수 있죠. 즉, 뇌와 척수로 구성된 중추신경계와 신체 전역에 퍼져있는 말초신경계로 구성된 신경 체계 전체가 바로 우리의 몸이죠. 이 몸(신경계)은 무기력하게 복종하는 ‘신앙인’도, 오만하게 반란을 꾀하는 ‘과학자’도 아니죠. 몸은 외부세계를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신앙인’처럼 외부(자연) 세계를 완전히 받아들이기만 하는 게 아니죠. 몸은 외부 세계를 충분히 변형시킬 수 있지만, 그렇다고 ‘과학자’처럼 외부 세계(자연)를 초월해서 모조리 다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죠.
인간의 몸은 “제국 속의 제국”처럼 외부 대상에 대해 철저하게 복종하지도 않지만, 동시에 외부 대상을 완전히 초월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에요. 몸은 “자연 속의 인간”인 것이죠. 즉, 몸은 내 몸을 진동시키는 외부 대상과 내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대상 사이에 끼어 있는 거예요. 나의 신경계(몸)는 운동을 전달하고 분배하고 억제하는 단순한 ‘전도체’ 역할만 해요. 베르그손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봅시다.
그러나 사실 나의 신경계는 내 신체를 움직이는 대상들과 내가 영향을 행사할 수 있는 대상들 사이에 놓여, 운동을 전달하고 배분하거나 억제하는 단순한 전도체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몸은 전도체다.
‘전도체electrical conductor’는 무엇일까요? ‘도체conductor’는 분자의 운동으로 생긴 전기나 열을 전달하는 물질인데, 그중 전기를 잘 통하게 하는 도체를 ‘전도체’라고 해요. 그렇다면 이 ‘전도체’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바이메탈’이라는 걸 들어본 적이 있나요? ‘바이메탈’은 전도체로 만든 물체인데, 열을 가했을 때 두 금속판의 휘는 정도 차를 이용해서 온도를 제어하는 데 사용돼요. 대표적으로 냉장고나 전기밥솥을 예로 들 수 있죠.
냉장고는 계속 전력이 들어오고 있는 상태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설정해 놓은 온도를 항상 유지할 수 있는 걸까요? ‘바이메탈’을 사용해서 가능한 거예요. 예를 들어, 냉장고 내부 온도를 10°C로 유지 시킨다고 해볼게요. 전력이 계속 흐르면서 온도가 낮아져 9°C가 되면, 온도에 따라 두 금속판의 휘는 정도가 달라져 전도체가 떨어지게 되면서 전력이 차단돼요. 그렇게 다시 온도가 올라서 10°C가 유지되는 거예요.
우리의 몸은 ‘바이메탈’과 같아요. ‘바이메탈’(몸)은 온도(외부세계)를 받아들이고 특정한 온도(조건)에 이르면 휘어지는 “단순한 전도체의 역할”을 하죠(‘신앙인’). 그런데 그 ‘바이메탈’(몸)은 그 단순한 원리로 냉장고 온도의 항상성이라는 창조와 생성을 가능하게 하잖아요(‘과학자’). 우리의 몸(신경계)도 그렇죠. 몸은 외부 대상에 의해 받아들인 운동을 전달하고 분배하고 억제하는 역할을 하는 기관들로 구성되어 있죠. 그 단순한 전달·분배·억제를 통해 새로운 것을 창조·생성할 수 있죠.
인간의 창조와 생성 가능성은 ‘응축’에 있다.
이는 다이어트로 쉽게 설명할 수 있어요. 우리 몸(신경계)은 음식(외부 대상)을 보면 식욕(운동)이 들죠. 그 식욕을 신경계 전체로 전달하고 분배하고 때로 억제하기도 하죠. 이러한 전달·분배·억제라는 단순한 원리를 통해서 날씬한 몸매라는 새로운 것을 창조·생성할 수 있게 되잖아요. 잠깐 옆길로 새자면, 바로 여기서 ‘응축’이라는 개념이 나오는 거예요.
생물이 무생물하고 다른 게 뭐예요? 무생물은 운동을 ‘응축’하지 못해요. 돌멩이를 발로 차면 가만히 있다가 내일 튀어 나갈 수 있나요? 지금 세찬 바람이 부는데, 꽃이 다음 날 꺾여질 수 있나요? 아니잖아요. 하지만 인간은 어때요. 뺨을 맞으면 지금 화낼 수도 있지만 내일 화낼 수도 있죠. 심지어 그것을 ‘응축’했다가 그림을 그릴 수도 있어요. 우리에게 알려진 예술 작품(창조·생성!) 중 일부는 그런 감정(분노)을 쌓아둔 ‘응축’의 결과에요.
신경계(몸)는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대상과 자신이 영향을 행사할 수 있는 대상 사이에 놓여 운동을 전달·분배·억제하는 “단순한 전도체”에요. 한 사람이 제 뺨을 때렸어요. 그때 바로 나 역시 상대의 뺨을 때릴 수도 있고, 왜 때렸는지 이유를 물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참을 수도 있죠. 즉, 우리 몸은 어떤 식으로 운동을 전달(뺨을 되돌려주기)할 수도, 분배할 수도(이유 묻기), 억제할(참기) 수도 있잖아요. 그러한 과정을 통해 어떤 변화(창조생성)을 가능하게 게 바로 우리의 몸이라는 거예요.
건강한 몸은 감정을 잘 흘러가게 하는 몸
몸이 전도체라면, 건강한 삶을 위한 중요한 삶의 태도를 하나 발견할 수 있죠. 화나는 상황이 벌어졌는데, “참아”라고 말하는 사람들 있죠. 그런 사람들은 빨리 정리해야 돼요. 만나면 안 돼요. 감정이 참아지나요? 바보 같은 소리죠. 지금 터지느냐 나중에 터지느냐 차이만 있을 뿐, 감정은 결국 다 터져 나오게 되어 있어요. 감정을 참으라는 건 사실 “내 앞에서 터트리지 말고, 다른 사람한테 가서 터트려”라는 말이에요. 이게 얼마나 못된 이야기예요.
감정은 사라지지 않아요. 그래서 참으면 안 돼요. 우리 몸은 전도체이기 때문이에요. 만약 억지로 계속 참으면 어떻게 될까요? 감정을 계속 눌러두다가 터지면 어떻게 되겠어요? 진짜 크게 터지는 거예요. 바이메탈을 생각해 봐요. 냉장고 내부의 온도가 -20°C까지 내려가서 전도체가 떨어져야 하는데 그걸 억지로 막고 있다고 생각해 봐요. 온도는 계속 내려가고 있는 상황이에요. 나중에 어떻게 되겠어요? 어느 순간 팍 터져버려요.
우리의 몸이 그렇지 않나요? 감정을 가진 몸(신경계)이 그런 거 아닌가요? 물론 상황과 조건이 따라 즉각적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게 항상 좋은 거라고 이야기할 순 없겠죠. 하지만 우리의 몸이라는 것은 결국 운동을 전달하고 분배하고 억제하는 단순한 전도체 역할을 한다는 삶의 진실을 잊으시면 안 돼요. 우리에게 특정한 운동(사건)이 들어올 때, 그것은 특정한 감정으로 우리에게 전달되고 분배되며 때로 억제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아요. 그것이 자연의 법칙이니까요.
감정을 참는 것과 감정의 응축은 전혀 달라요. 감정의 응축은 참는 게 아니죠. 오히려 더 건강한 방식으로 감정을 흘러가게(방출) 만드는 방식인 거죠. 증오든 사랑이든, 우리에게 유입되는 운동(사건)으로 인해 발생한 감정을 때로는 전달하고 분배하고 때로는 잘 억제해야 할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 전달·분배·억제는 결국 우리 몸(신경계)가 원활히(건강히) 잘 작동하기 위해 필요한 거예요. 누군가를 증오하는 마음도 사랑하는 마음도 잘 표현해야 해요. 그 감정이 몸이라는 전도체를 타고 잘 흘러갈 수 있도록 해야 해요. 그것이 우리의 몸을 잘 이해하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