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와 사랑은 무엇이 다른가?
지각의 세부는 이른바 감각 신경의 세부에 따라 정확히 주조되나, 전체로서 지각은 몸의 운동하려는 경향에 그 진정한 존재 이유를 가진다고 말할 수 있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지각’과 관련된 베르그손의 통찰 중 우리에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에요. ‘섹스’와 ‘사랑’을 혼동하는 경우는 흔하죠. 그저 ‘섹스’하는 사이(혹은 '섹스'할 수 있는 사이)일 뿐인데, 서로 ‘사랑’한다고 믿는 커플들은 흔하잖아요. ‘섹스’와 ‘사랑’은 무엇이 다를까요? 베르그손의 표현을 빌리자면, ‘섹스’는 “지각의 세부”일 테고, ‘사랑’은 “전체로서 지각”일 거예요. 누군가 여러분의 성기를 만져준다고 해봐요. 그 성기 부위의 감각 신경을 통해 상대를 ‘지각’하겠죠. 그것은 상대를 “전체로서 지각”한다기보다 단지 섹스 파트너(전체 중 일부)로서 ‘지각’하게 되는 거죠. 즉, “지각의 세부”죠.
그렇다면 그 상대를 “전체로서 지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사람을 위해 몸을 움직여야죠. 단순히 성기(몸의 일부)의 운동만이 아니라 몸 전체의 운동으로 인해 그 상대를 “전체로서 지각”할 수 있게 되죠. 베르그손의 표현으로는, "전체로서의 지각은 몸의 운동하려는 경향"인 거죠. 배고픈 ‘너’를 위해 맛있는 음식을 해주고, 아픈 ‘너’를 위해 밤새 병간호를 해주고, 가난한 ‘너’를 위해 땀을 흘리며 돈을 벌려는 "몸의 운동하려는 경향", 이를 통해 “전체로서 지각”은 가능하죠. 그 "전체로서의 지각"이 바로 ‘사랑’일 거예요.
'섹스'의 지각, '사랑'의 지각
“지각의 세부(섹스)는 감각 신경의 세부(성기)에 따라” 만들어질 수 있어요. 하지만 “전체로서의 지각(사랑)은 몸의 운동하려는 경향”에 의해 진정한 존재 이유를 갖는 거예요. “지각의 세부”, 즉 어떤 대상의 일부만 지각하는 것은 감각 신경 세부를 통해서도 가능해요. 하지만 “전체로서의 지각”은 그런 감각 신경 세부로는 불가능해요. 그것은 신경계 전체, 즉 몸의 운동하려는 경향에 의해서 가능해질 거예요.
‘섹스’를 한다고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사랑’이 뭐예요? 그것은 한 사람을 위해서 몸이 운동하려는 경향이죠. 한 사람을 위해 내 몸이 운동하는 경향. 그것이 '사랑'이에요. 상대를 위해 내 몸이 어떻게 얼마나 움직이고 있느냐 그 경향성이 ‘사랑’의 바로미터에요. 아이에게 물을 떠주지 않고, 아이에게 물을 떠 오라고 시키는 건 '사랑'의 기만이죠. 마찬가지로, 성기의 운동만으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 역시 ‘사랑’의 기만이죠.
섹스는 하지만, 상대를 위해 고된 삶을 감당하지 않으려는 이들은 얼마나 많던가요? 상대를 위해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사랑해"라고 떠드는 이들은 얼마나 많던가요? 이는 모두 ‘사랑’의 기만이죠. 성기의 운동만으로 "사랑해"라고 떠들었던 이들이 아이에게 물을 떠 오라고 시키면서도 아이를 사랑한다고 믿는 부모가 되는 거죠. '사랑'의 기만은 이렇게 집요하게 반복됩니다.
‘지각’은 감각-운동이 뒤엉켜 만들어내는 복잡성이다.
그렇다면 “전체로서의 지각”, 즉 '사랑' 어떻게 가능하게 될까요? 그것은 우리의 몸이 어떻게 운동하느냐에 달려 있겠죠. 성 혹은 돈에만 ‘습관’적으로 집착하고 있다면 ‘지각’은 점점 좁아지겠죠. 기존의 ‘습관’을 넘어서 몸의 운동 경향성을 더 풍부하게 만들어야 해요. ‘사랑’을 지각하고 싶다면, 성기의 감각 신경뿐만 아니라 온몸의 감각 신경으로 상대를 지각하려고 애를 써야 해요. 손으로, 눈으로, 심장으로 상대를 '지각'하려고 하고, 그 '지각'을 위해 다시 팔로 다리로 온 몸으로 음식도 하고 돈도 벌고 병간호도 해주어야 해요.
그렇게 몸의 운동 경향성을 풍부하게 할 때, '지각'은 점점 커지고 비로소 “전체로서의 지각”이 가능해질 거에요. 부분 지각은 감각 신경으로부터 일어나지만, 전체 지각은 몸을 움직임으로서 일어나는 거예요. 내 몸을 움직이는 것만큼 '지각'이 확대되는 거예요. 베르그손의 말은, 감각 신경만 가지고 지각할 수 있다고 말하지 말라는 거예요. 내가 감각할 수 있는 몸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전체 지각이 가능하다고 이야기하지 말라는 거예요. 전체 지각, 즉 '사랑'은 반드시 몸이 운동하려는 경향에 따라서만 가능한 거죠.
진실은 지각이 감각중추에도 운동중추에도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관계의 복잡성의 정도를 나타내며 그것이 나타나는 그곳에 존재한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이제 베르그손은 '지각'에 관한 진실을 이야기해요. '지각'한다는 것은 외부 대상을 감각하는 것에만 머무는 것도 아니고, 몸을 움직이는 경향성을 나타내는 운동 신경(중추)에만 있는 것도 아니에요. '지각'은 그 둘 사이의 복잡성을 드러내는 거예요. 즉, 지각은 ‘감각-운동’ 관계의 복잡성을 나타내는 것이고, 그 복잡성의 양상이 바로 ‘지각’이라는 거예요. '감각중추'와 '운동중추'가 조합될 때 나타나는 복잡한 양상이 바로 '지각'인 거예요.
'사랑'의 '지각'에 이르는 길
이제 우리는 '사랑'의 '지각'에 대해서 논의할 수 있죠. '사랑'의 지각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로맨스 영화만 본다고 '사랑'에 대해서 지각할 수 있겠어요? 불가능하죠. 왜냐하면 로맨스 영화를 본다는 것은 시신경이라는 감각중추만 작동하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사랑을 잘못 '지각'하는 이들의 특징이 하나 있어요. 로맨스 드라마나 영화를 너무 많이 봐요. “키스하는데 종소리가 들려야 하는데, 왜 안 들리지? 안 사랑하나? 헤어져!” 이런 일이 발생하는 거예요.
자신이 봤던 로맨스 영화에서는 키스할 때 아름다운 음악이 들리고 향기로운 향이 났었는데, 막상 키스해보니 마늘 냄새가 날 수도 있잖아요. 그때 '사랑'이 아니라고 헤어지는 거예요. 이건 '사랑'을 제대로 지각한 게 아니죠. 이는 지각이 '감각중추'만으로 이뤄진다고 믿기 때문에 벌어진 거예요. 그렇다면 어떻게 '사랑'을 지각할 수 있을까요? '감각중추'와 '운동중추'의 복잡성을 통해서죠.
로맨스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사랑을 '감각중추'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 하지만 '사랑'을 제대로 '지각'하려면 '운동중추'까지 사용해야 해요. 로맨스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감각’한 사랑은 항상 즐겁고 아름답기만 하죠. 그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데서 멈추지 말고 '운동중추'를 동원해 한 사람을 만나 직접 연애를 해봐요. 그럼 갖가지 불편하고 짜증 나고 고된 일들이 펼쳐질 거에요. 그 사람을 만나 즐겁고 아름다운 일상도 펼쳐졌지만, 동시에 불편하고 짜증 나고 고된 일도 펼쳐질 거에요
'사랑'은 그런 것이죠. "전체로서의 지각"은 그런 것이죠. 기쁘기에 힘든 것이고, 힘들기에 기쁜 것이죠. '사랑'은 복잡성이죠. 감각중추-운동중추가 뒤얽혀 만들어내는 복잡한 양상. 그 복잡성의 정도가 작을 때 사랑도 작은 것이고, 그것이 클 때 사랑도 큰 것이죠. '사랑'의 지각은 감각-운동이 뒤엉켜 발생하는 복잡한 양상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일이에요.
다른 '지각'도 마찬가지에요. 어떤 지각이든 그것을 전체로서 지각하려면, '감각중추'나 '운동중추'만으로는 불가능할 겁니다. 어떤 대상을 전체로서 잘 '지각'하려면 감각-운동 사이에 발생할 수밖에 없는 복잡한 관계성 받아들이려고 노력해야 하는 거예요. 그것이 비록 때로 불편하고 고된 일이라 할지라도 어쩔 수 없어요. 어떤 대상을 진짜로 '지각'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