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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움직여야, ‘사랑’이 보인다.

‘지각’이 ‘표상’을 만든다.

 ‘표상’은 무엇일까요? 실재 대상을 ‘지각’한 뒤, 정신 속에서 그 대상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이 ‘표상’이에요. 눈앞에 사과가 하나 있다고 해 봅시다. 그 사과를 보고 만지고 먹으면서 빨갛고 둥글고 새콤달콤하다고 ‘지각’할 수 있죠. 이 ‘지각’으로 획득한 현상(빨강·둥긂·새콤달콤)이 있죠. 그렇다면 이제 그 사과가 없더라도, 이 현상을 바탕으로 머릿속에 사과라는 구체적인 형상을 떠올릴 수 있죠. 이것이 ‘표상’이에요. 이에 대한 베르그손의 이야기를 들어 봅시다.      


 나의 몸이 공간 속에서 이동함에 따라 모든 다른 사항들이 변한다반대로 내 몸이라는 상은 변하지 않은 채 남는다따라서 나는 그것()을 중심으로 만들고 모든 다른 상들을 거기()에 관계시킬 수밖에 없다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표상’은 ‘지각’을 토대로 만들어지죠. 그렇다면 ‘나’의 지각은 어떻게 이뤄질까요? ‘나’의 몸을 토대로 이뤄지죠. 즉, “나의 몸이 공간 속에서 이동함에 따라” ‘지각’이 이루어지죠. 사과를 ‘지각’하려면 “나의 몸이 공간 속에서 이동”해서 사과를 잡고 먹어야 하잖아요. 이런 과정을 통해 ‘지각’된 정보(빨강·둥긂·새콤달콤)를 토대로 사과를 ‘표상’할 수 있게 되죠. 그런데 여기에는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어요.   


   

‘표상’, 몸이 만들어내는 착시


 ‘지각’으로 ‘표상’된 사과는 실제 사과와 일치할까요? 즉, 우리 머릿속에 떠오른 사과는 진짜 사과와 같은 것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죠. 왜 그럴까요? “나의 몸이 공간 속에서 이동함에 따라 모든 다른 사항들이 변하기” 때문이에요. 사과를 지각하기 위해 안방에서 부엌으로 이동하는 사이에 사과는 미세하게 부식되었을 거예요. 그리고 손으로 테이블 위에 있는 사과를 잡는 순간 체온과 압력으로 인해 사과는 이미 또 미세하게 변했을 거예요. 그런데 우리네 몸은 그 미세한 변화들을 있는 그대로 모두 ‘지각’할 수 없죠.      


 결국 ‘지각’은 특정한 대상(사과)의 정보를 나의 몸을 “중심으로 만들고 모든 다른 상들 거기에 관계시켜” 구성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이는 ‘지각’으로 인해 획득한 현상들은 매우 불완전한 혹은 거짓된 현상이라는 사실을 의미할 거예요. 내 몸이 이동하면서 사과와 그 주변 요소(기온·공기·압력…)들이 변화되었지만, 우리는 그 변화를 파악할 수 없으니까요. 그러니 당연히 우리가 머릿속에 떠올리는 사과에 대한 ‘표상’은 역시 불완전하거나 혹은 거짓된 것(착시)일 수밖에 없죠. ‘표상’은 ‘지각’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니까요.     


 치과에서 사랑니를 뽑는다고 마취를 한 적이 있어요. 그때 마취를 좀 세게 되었는지, 입술 절반 정도 마취가 된 거예요. 그때 입술 반쪽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그건 내 몸이 주변 요소들(기온·공기·압력…)의 변화를 ‘지각’할 수 없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잖아요. 만약 그런 상태가 지속된다면, 입술과 관련해서 아무런 ‘표상’도 생기지 않겠죠. 이처럼 ‘지각’과 ‘표상’은 불완전하거나 혹은 거짓된 것(착시)일 수밖에 없는 거에요.  


   


세계는 모두 연결되어 있고, 그 연결은 유동적이다.

    

 이는 ‘지각’의 논리적 메커니즘으로도 확인할 수 있어요. ‘지각’은 ‘몸-외부 세계(사과)’에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죠. ‘지각’은 나의 몸이 외부 세계를 인식하는 일잖아요. 즉, ‘지각’은 외부 세계(사과)와 분리된 ‘나’가 존재한다는 논리적 전제 아래서 성립하는 거예요. 하지만 이 논리적 전제는 명백한 오류죠.  

   

 질문 하나 해 볼게요. 세계는 모두 연장(연결)되어 있나요? 아니면 비연장(분절)되어 있나요? 세계는 다 연장되어 있죠. 다 연결되어 있어요. 어느 하나 끊긴 게 없어요. 외부 세계 전체도 모두 연장(연결)되어 있고, 그 외부 세계와 ‘나’ 역시 연장(연결)되어 있어요. 또 하나 물어볼게요. 이 연장(연결)은 고정적일까요? 유동적일까요? 세계의 연장(연결)은 유동적이죠.     


 ‘세계 전체=나+외부 세계’ 나와 외부와 세계는 이렇게 도식화할 수 있죠. 즉, 세계 전체는 나(몸)와 외부로 구성된다고 말할 수 있어요. 세계 전체가 ‘바다-물고기-석유-인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가정해 봐요, 이때 ‘바다-물고기-석유’는 외부고, ‘인간’은 ‘나(몸)’가 되겠죠. 이때 ‘바다-물고기-석유-인간’은 모두 연결되어 있죠. 바닷속에 깊은 곳에 석유가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살고, 인간은 그 물고기를 먹고, 그 배설물이 다시 바다로 흘러가겠죠. 이처럼 세계는 모두 연장(연결)되어 있죠.     


 동시에 이 연장은 유동적(진동)이죠. 바닷속에 사는 물고기를 먹은 인간이 바닷속에 있는 석유를 캐서 사용하고 그 찌꺼기를 다시 바다에 버린다고 해봐요. 바다는 오염될 것이고, 그 바다에 사는 물고기 역시 오염될 것이고. 그 물고기를 먹은 인간 역시 오염될 거예요. 이 과정은 마치 매 순간 변화되는 진동처럼 유동적인 상태겠죠.      


 세계 전체는 모두 연결되어 있고, 그 연결은 끊임없이 출렁이는 물살처럼 변화하고 있죠. ‘나’의 몸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나’를 둘러싼 주변의 외부 세계는 변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리고 그 외부 세계의 변화는 당연히 ‘나’의 몸에 다시 영향을 미치게 될 거예요. 이 모든 연결과 유동 자체가 바로 세계 전체죠. 이처럼 세계는 모두 연장(연결)되어 있고, 그 연장(연결)은 매 순간순간 변화하는 과정 속에 있어요.  



‘외부 세계’는 없다.


 외부 세계라는 것에 대한 나의 믿음은 내가 내 밖으로 비연장적 감각들을 투사한다는 사실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또 나올 수도 없다그런 감각이 어떻게 연장성을 획득할 것이며나는 어디서 외부성이란 개념을 끌어낼 수 있겠는가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이제 우리는 ‘외부 세계’가 무엇인지 답할 수 있어요. 흔히 ‘외부 세계’(바다-물고기-석유)가 ‘나’와 분절된 것이라 여기죠. 어리석은 생각이에요. ‘외부 세계’라는 것은 비연장된, 즉 ‘나’와 분절된 감각들에 의해서 나온 것이 아니며, 또 나올 수도 없죠. 더 정확히 말해, 사실상 ‘외부 세계’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죠. 우리가 ‘외부 세계’라고 믿는 모든 것은 사실 ‘나’와 연결된 상태로 존재하는 ‘내부 세계’ 혹은 내부와 연결된 세계일 뿐이니까요.      


 ‘지각’과 ‘표상’은 “외부 세계라는 것에 대한 나의 믿음”에 불과해요.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사과를 ‘지각’할 수도, ‘표상’할 수도 없어요. 사과(외부 세계)의 ‘지각’과 ‘표상’ 모두 사과라는 것에 대한 나의 믿음(‘이런 것이 사과다’)일 뿐이죠. ‘나(몸)’를 중심으로 받아들인 현상(지각)과 그것으로 구성한 형상(표상)을 사과라고 믿는 것일 뿐이죠. 연장을 끊는 감각, 즉 “비연장적 감각”으로는 연장성(세계)를 획득할 수 없죠. 세계(나-외부 세계)는 모두 연장되어 있는데, ‘지각’과 ‘표상’은 그 연장(연결)을 끊을 때만 가능한 것이니까요. 


 세상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그렇게 하듯이 내 몸으로부터 출발해 보라내 몸의 표면에서 받아들여지고 그 몸에 관계될 뿐인 인상들이 어떻게 나에 대해 독립적인 대상으로 구성되고 외부 세계를 형성하러 오는지를 당신은 결코 내게 이해하게 할 수 없을 것이다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세상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그렇게 하듯이”, 우리의 몸으로부터 출발해서 사과(외부 세계)를 바라본다고 가정해 봐요. 그때 우리의 몸 표면에서 받아들여진 빨갛고 둥글고 새콤달콤한 사과가 있겠죠. 그런데 이는 단지 우리의 “몸에 관계될 뿐인 인상들”인 거죠. 우리가 사과를 빨갛고 둥근 물체라고 ‘지각’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눈(몸)이 있기 때문일 뿐이죠. 또 사과를 새콤달콤하게 여기는 것은 우리의 혀(몸)가 미각을 그렇게 느끼기 때문일 뿐이죠.      


 아니 애초에 우리가 특정한 외부 세계(사과)를 지각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몸이 그 외부 세계(사과)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일 뿐이었을 수도 있어요. 우리에게 몸(눈·혀)이 없다면 혹은 그것이 잘 기능하지 않는다면 사과는 전혀 다른 대상으로 지각되거나 혹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외부 세계일 거에요. 그러니 그 사과가 “나에 대해 독립적인 대상으로 구성되고 외부 세계를 형성”한다고 말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는 거죠.      



있는 그대로의 세계, 끊임없이 출렁이는 거대한 그물망

     

 그렇다면 (우리가 결코 ‘지각’할 수도, ‘표상’할 수도 없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 전체는 어떤 모습일까요? 그것은 끊임없이 출렁이는 거대한 그물망 같은 거예요. 그것이 바로 베르그손이 말한 ‘상’이에요. 이 ‘상’, 즉 있는 그대로의 세계는 모든 것이 연결되어 떨리고 있기에 흐릿하고 모호한 세계예요. 인간은 모호하고 흐릿한 ‘상’을 볼 수 없기에 ‘지각’을 통해 ‘표상’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비유하자면, ‘상’이 음속으로 날아가기 때문에 흐릿하고 모호해 보일 수밖에 없는 제트기라면, ‘표상’은 그 제트기를 분명하고 선명하게 보기 위해 카메라로 찍은 사진인 셈이죠. 진짜(있는 그대로의) 세계는 항상 모호하고 흐릿한 거예요. 우리가 분명하고 선명하게 볼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불완전하거나 거짓된 세계예요. 이것이 삶의 진실이에요.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우리는 그를 분명하고 선명하게 볼 수 있죠. 키는 177cm이고 몸무게는 80kg이고, 좋아하는 음식은 햄버거이고, 항상 즐겁게 이야기하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이런 분명하고 선명한 ‘지각’과 ‘표상’은 사실 지극히 불완전한 착시일 수밖에 없어요. 그의 키와 몸무게는 매 순간 조금씩 변하고 있을 테고, 홀로 있을 때 그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한없는 슬픔에 빠져 있을 테니까요. 이처럼 한 사람의 진짜 모습은 항상 모호하고 흐릿할 수밖에 없죠.     



‘지각’과 ‘표상’은 생존의 조건


 그렇다면 인간은 왜 불완전하고 거짓된 세계를 보게 되었을까요? 생존하기 위해서예요. 인간은 진짜 사과, 즉 세계 전체와 연결되어 끊임없이 변화되는 사과 그 자체(상)를 볼 수 없죠. 그 진짜 사과를 볼 수 없으면 그걸로 끝인가요? 아니죠. 사과를 볼 수 없다면 그것을 잡을 수도, 먹을 수 없게 되잖아요. 이런 상황에서 인간은 생존할 수 없겠죠. ‘지각’과 ‘표상’은 생명(인간)이 생존하기 위한 진화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어요.      


 진짜 사과(상)는 흐릿하고 모호하지만, 일단 그것을 획득할 수 있도록 진화한 거예요. 즉, 불완전한 ‘지각’과 ‘표상’은 인간의 생존 조건인 셈이죠. 이는 물리적 생존뿐만 아니라 정서적 생존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사과’가 없다면 물리적으로 죽지만, ‘사랑’이 없다면 정서적으로 죽게 될 겁니다.      


 사랑하는 이의 진짜 모습은 모호하고 흐릿하기에 결코 볼 수 없죠. 진짜 그를 볼 수 없으면 그걸로 끝인가요? 그렇지 않죠. 그를 볼 수 없다면, 그와 대화할 수도, 만질 수도 없게 되잖아요. 그건 너무 비극적인 일이잖아요. 그를 ‘지각’하고 ‘표상’하는 것은 사랑하기 위한 진화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을 거예요. 항상 모호하고 흐릿한 그를 사랑하기 위해 우리는 착시일지라도 그를 분명하고 선명하게 보려는 거죠. 즉, 불완전한 ‘지각’과 ‘표상’은 사랑의 생존 조건인 셈이죠.      



‘표상’ 너머 ‘상’으로, ‘생존’ 너머 ‘사랑’으로 


 그렇다면 이런 불완전한 ‘지각’과 ‘표상’은 인간(혹은 사랑)의 생존 조건이기 때문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렇지 않죠. 인간의 불완전한 ‘지각’과 ‘표상’은 생존을 위해 유리한 조건이지만 때로 우리네 삶을 불행으로 밀어 넣곤 하기 때문이에요. ‘지각’과 ‘표상’은 근본적으로 우리 몸(나)을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거잖아요. 인간은 몸의 활동에 따라 “모든 다른 상들(세계 전체)을 거기에 관계시킬 수밖에” 없으니까요. 즉, ‘지각’과 ‘표상’은 우리의 몸이 어디에 있는지에 따라 세계를 다르게 포착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에요.    

  

 ‘서 있는 자리가 달라지면 풍경도 달라진다.’ 우리의 ‘지각’과 ‘표상’을 상징하는 말이에요. 서 있는 자리에 따라 다르게 보는 건 생존에는 유리하겠죠. 하지만 바로 이 때문에 인간다운 삶에서는 점점 멀어질 수 있어요. 배가 고플 때 사과가 ‘지각·표상’되고, 배가 고프지 않을 때 사과가 ‘지각·표상’되지 않는 것은 생존에 유리하죠. 하지만 내가 배고프지 않을 때도 사과를 ‘지각·표상’해야 할 때가 있잖아요. 주변에 배고픈 이들이 있을 때가 그렇잖아요.      


 이것이 우리가 ‘지각’과 ‘표상’을 너머 모호하고 흐릿한 ‘상’(세계 전체)을 보려고 애를 써야 하는 이유에요. 우리가 겪고 있는 많은 다툼과 갈등이 바로 ‘지각’과 ‘표상’ 때문에 발생한 것 아닌가요? 내 몸을 중심으로 세계를 포착하기 때문에 서로 다투고 갈등하게 되잖아요. 윗면이 네모 모양이고 아랫면은 동그라미 모양인 물체가 있어요. 키가 큰 사람은 단지 자신의 키가 크기 때문에 윗면(네모)이 보인 것일 뿐이고, 키가 작은 사람은 단지 자신의 키가 작기 때문에 아랫면(동그라미)을 본 것일 뿐이잖아요.      


 그런데 이 둘은 이런 그 물체 전체(상)를 모르기 때문에 끊임없이 싸우죠. “야, 그게 네모지 어떻게 동그라미냐? 뭔 소리야 동그라미지”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세계를 ‘지각’하고 ‘표상’하는 모습일 거예요. 의자 위에 올라서서 윗면을 보면 네모가 보이고, 고개를 숙여서 밑면을 바라보면 동그라미가 보이는데, 그 생각을 못 하는 거예요. 그저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보이는 것만 보는 거예요.      



몸을 움직이면 ‘상’과 ‘사랑’이 보인다.

 그렇다면 모호하고 흐릿한 진짜 세계(상)를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면 ‘지각’과 ‘표상’의 세계 넘어 ‘상’의 세계에 이를 수 있을까요? 끊임없이 우리의 몸을 움직여 서 있는 자리를 바꾸어야만 해요. 인간은 결국 유한한 몸을 가지고 ‘지각’하고 ‘표상’할 수밖에 없어요. 몸은 분명 유한하지만 동시에 움직일 수 있죠. 우리의 몸이 무한해지질 수는 없겠지만, 몸의 이동을 점점 넓혀갈 수 있잖아요. 이것이 몸의 특징이잖아요.


 몸을 이동시켜 보는 과정이 많아질수록 ‘지각’과 ‘표상’은 점점 넓어지게 돼요. 우리가 몸을 움직여 서 있는 자리가 다채로워졌을 때, 우리의 ‘지각’과 ‘표상’ 역시 다채로워지겠죠. 그 다채로움이 점점 커질 때 우리는 그만큼 ‘상’의 세계에 이를 수 있을 거예요. 사랑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는 사랑하는 이가 어떤 존재인지 분명하게 볼 수 없어요. 우리는 우리가 자라온 방식에 따라 상대를 볼 수밖에 없죠. 부유하게 자랐던 이는 가난한 연인을 이해할 수 없고, 가난하게 자랐던 이는 부유한 연인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에요. 

     

 우리는 각자 서 있는 자리에서 상대를 '지각'하고 '표상'할 뿐이죠. 하지만 우리는 몸을 움직일 수 있죠. 몸을 움직여 사랑하는 이의 자리로 조금씩 옮겨 갈 때 우리는 그만큼 모호하고 흐릿한 ‘너’(상)에 이를 수 있을 거예요. 가난하게 자랐던 이는 힘껏 돈을 벌어 부유해졌을 때, 연인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될 거예요. 반대로 부유하게 자랐던 이는 기꺼이 가난 속으로 몸을 던졌을 때, 연인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될 겁니다.    

  

 ‘너’는 모호하고 흐릿해서 결코 있는 그대로의 ‘너’를 볼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나’의 몸을 움직여 ‘너’가 서 있는 자리로 가보려는 것. 그렇게 ‘너’라는 ‘상’을 조금씩이라도 더 보려고 애를 쓰는 것. 사랑은 그런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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