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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은 '지각'을 방해한다.

 지각=물음·의지

 ‘우리의 몸은 어떻게 작동하고 기능하는가?’ 이는 우리네 삶에 매우 중요한 질문이죠. ‘삶을 산다’는 것은 ‘몸을 움직인다’는 말에 다름 아니니까요. 흔히, 몸에는 뭔가 복잡한 작동 원리가 있을 것처럼 생각하죠. 하지만 베르그손에 따르면, 우리의 몸은 전기적 신호를 흘러가게 하는 전도체처럼 단순한 원리로 작동하고 기능해요. 몸이라는 전도체를 조금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이 전도체는 주변에서 중심으로그 중심에서 주변으로 연결된 엄청난 수의 섬유들로 이루어져 있다주변에서 중심으로 향해 가는 선들이 존재하는 그만큼나의 의지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말하자면 나의 운동적 활동에 기초적인 물음을 제기할 수 있는 공간의 점들이 있다이 제기된 각 물음이 바로 사람들이 지각이라 부르는 것이다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실제 전도체는 그 중심과 주변 사이에는 엄청난 수의 선들, 즉 감지 섬유들이 있어요. 그 감지 섬유들에 의해 열 혹은 전기가 흘러가게 되죠. (몸은 전도체이기 때문에) 우리 몸에도 그런 섬유들이 있죠. 바로 감각 신경 섬유죠. 베르그손의 말처럼, 우리의 몸은 “주변(손·발끝)에서 중심(뇌·심장)으로, 또 중심(뇌·심장)에서 주변(손·발끝)으로 연결된 엄청난 수의 섬유들로 이루어져” 있잖아요.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베르그손이 이 감각 섬유들이 존재하는 만큼 “나의 의지를 불러일으킬 수 있고 … 나의 운동적 활동에 물음을 제기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한 부분이에요. 베르그손은 이 ‘물음’이 바로 ‘지각’이라고 말하죠.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누군가 우리의 머리를 만졌다고 해봐요. 그때 우리는 엄청난 수의 감각 섬유들을 통해 그 사실을 파악할 수 있죠. 그때 우리의 몸은 일종의 ‘물음’을 받고 있는 상황인 거잖아요. ‘그 사람에게 화를 낼 것인가?’ ‘그 사람을 안아 주고 키스를 할 것인가?’                     


 이 ‘물음’은 특정한 ‘의지’를 요청하죠. 쉽게 말해, 누군가 우리의 머리를 만질 때, 화를 낼 혹은 키스할 ‘의지’를 요청하게 되는 거죠. 이렇게 ‘물음’이 제기되고, ‘의지’가 촉발되는 일련의 과정 자체가 바로 ‘지각’이죠. 누군가 우리의 머리를 만지는 사건은 상황에 따라, 상대에 따라 화를 낼 수도 있고 사랑을 나눌 수도 있는 반응으로 이어지겠죠. 이는 그 상황과 상대가 주는 ‘물음’에 답하는 ‘의지’를 표출하는 과정이고, 이것이 바로 상황과 상대를 ‘지각’하는 것이잖아요. 이처럼 몸(전도체)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신경 섬유를 통해 제기된 ‘물음’과 그로 인해 촉발된 ‘의지’가 바로 ‘지각’인 것이죠. 간단히 말해, ‘물음·의지=지각’인 거죠.     



‘지각’은 ‘명령’이 아니다.

 ‘지각’을 일종의 ‘명령’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즉, 무엇인가를 ‘지각’하는 것을 어떤 ‘명령’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누군가 나를 때린다는 사실을 ‘지각’했다고 해봐요. 이때 사람들은 그 ‘지각’을 참으라(혹은 되받아치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여요. “나는 어쩔 수 없었다.” 세상 사람들의 이 흔한 입버릇이 이를 잘 드러내죠. 이게 얼마나 바보 같은 소리예요. ‘지각’은 아무것도 명령하지 않아요. 그저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일 뿐이에요. “이제 어떻게 할 거니?”     


 ‘지각’은 ‘명령’이 아니라 ‘물음’이에요. ‘명령’과 ‘물음’은 너무 다르죠. ‘명령’은 수동적인 거예요. ‘하라’는 거예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거잖아요. 하지만 우리가 ‘물음’을 받을 때를 생각해 봐요. 그때 아무 대답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야 할 답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어떤 답을 하게 될지 스스로 정할 수 있는 폭이 있잖아요. 그 폭이 바로 우리의 ‘의지’인 거죠. ‘누군가 나를 때렸다’는 ‘지각’은 ‘참아라(혹은 때려라)!’라는 ‘명령’이 아니에요. “이제 어떻게 대응할 거야?”라는 ‘물음’이에요.      


 사르트르가 말하잖아요. 누군가 우리에게 총부리를 겨눠도 우리에게는 상대에게 복종할 것인지 저항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권이 있다고요. 누군가 우리를 총으로 겁박하고 있다고 ‘지각’할 수 있죠. 그 ‘지각’은 ‘내 말을 들어!’라는 ‘명령’이 아니에요. ‘나는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물음’이죠. 우리가 어떤 상황을 ‘지각’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명령’이 아니라 ‘물음’인 거죠. 우리는 그 ‘물음’에 대해 각자 실존적인 답을 할 자유가 있다는 것. 이것이 사르트르가 말한 ‘실존주의’에요.      


 ‘지각’이 ‘물음’이자 ‘의지’라면, 그것은 수동적이면서 동시에 능동적인 거예요. ‘지금 나는 가난하다’라는 ‘지각’을 생각해 봅시다. 이는 ‘어떻게 돈을 벌지?’라는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물음’이죠. 하지만 그 질문에 어떤 ‘의지’를 갖고 응답할지는 천차만별이죠. 도둑질을 할 수도 있고, 성실하게 일을 할 수도 있잖아요. 즉 능동적으로 대응해 나갈 수 폭이 있는 거죠. 이처럼 ‘지각’은 매 순간순간마다 우리의 몸이 요청받고 있는 ‘물음’이고, 그로 인한 ‘의지’인 거죠.      


‘습관’은 ‘지각’을 방해한다.

 지각은 이른바 감각 섬유 중 하나가 잘려 나갈 때마다 그 요소들 중 하나만큼 감소된다왜냐하면 그때 외부 대상의 어떤 부분이 행동을 요청할 수 없게(무력하게되기 때문이다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지각’은 우리의 몸(신경계)을 구성하는 감각 섬유와 관계되어 있죠. 즉, 감각 섬유가 줄어들면(늘어나면) ‘지각’은 약(강)해지겠죠. 극단적으로 말해, 감각 섬유가 모두 잘려 나가면 “외부 대상이 행동을 요청할 수 없게” 되겠죠. 팔 어느 부분의 감각 섬유가 다 잘렸다고 해 봐요. 감각 섬유가 잘린 부분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겠죠. 그 부분을 누군가 만져줄 때, 팔을 빼야 할지, 안아 주어야 할지 등등 어떤 ‘물음’ 앞에도 서지도 못하게 될 거예요. 즉, 감각 섬유가 잘려 나간 만큼 ‘지각’이 감소하는 거죠.     


 그렇다면 불행한 사건으로 감각 섬유가 잘려 나가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매번 충분한 ‘지각’에 이를 수 있을까요? 시각·청각·촉각적 ‘물음’을 충분히 받을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대상을 충분히 ‘지각’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아요. ‘지각’은 명백히 신체적인 문제이지만, 우리의 ‘지각’을 치명적으로 제한하는 비非신체적인 문제가 하나 있어요. 바로 ‘습관’이에요. ‘습관’은 정신적인 문제이기에 감각 섬유(신체)와 아무 상관 없지만, 우리의 ‘지각’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칩니다. 어쩌면 감각 섬유의 부재보다 ‘습관’이 우리의 ‘지각’에 더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건지도 모릅니다.     


 안정된 습관이 형성될 때마다 또한 (지각은그만큼 감소한다왜냐하면 이번에는 완전히 준비된 대답이 물음을 불필요하게 만들기 때문이다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습관’은 ‘지각’을 제한해요. 확고한 습관을 갖고 있다는 것은 감각 섬유가 잘려 나간 것과 같은 효과를 내요. 왜 그럴까요? ‘습관’은 감각 섬유를 통해 유입되는 외부 대상(진동)을 애초에 차단하거나 혹은 감각 섬유로 유입된 외부 대상(진동)을 반사(반응)하지 않고 투과시켜 버리는 역할을 하죠. 늘 돈 생각만 하는 습관에 빠져 있는 이를 생각해 봐요. 그에게 꽃은 애초에 보이지 않거나 혹은 보이더라도 ‘뭐야 꽃이잖아’라면서 그 대상을 투과시켜 버릴 거예요. 둘 중 어느 경우든 ‘습관’은 감각 섬유가 잘려 나간 것과 마찬가지로 작동하는 거죠.


      


‘습관’은 “완전히 준비된 대답”이다.

      

 ‘습관’은 “완전히 준비된 대답”이에요. 그래서 “물음(지각)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거예요. 항상 습관적으로 사는 이들을 살펴봐요. 늘 방안에 홀로 있는 것이 습관이 된 이들이 있죠. 그들은 어떠한 새로운 외부 대상 앞에서도 ‘물음’이 발생하지 않죠. 꽃이든, 친구든, 매혹적인 이성이든, 어떤 외부 대상 앞에서도 그들은 “완전히 준비된 대답”을 갖고 있어요. ‘혼자 있는 게 제일 편하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어떤 ‘물음(지각)’도 제기될 수 없죠. 이처럼 ‘습관’이 안정화될 때마다 ‘지각(물음)’은 그만큼 감소하게 될 수밖에 없어요.    

  

 물론 ‘습관’이 항상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에요. 긍정적으로 작동할 때도 있어요. 예를 들어, 매일 운동하는 것이 습관이 된 이들을 생각해 볼까요? 그들은 ‘오늘 힘든 데 운동하지 말까?’ ‘오늘 몸이 조금 아픈데 그냥 쉴까?’ 이런 ‘물음’을 불필요하게 만들죠. 그들은 이미 “완전히 준비된 대답”을 이미 갖고 있기 때문이에요. ‘매일 밥을 먹듯, 운동도 매일 한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어떤 ‘물음(지각)’도 제기될 수 없죠. 이런 ‘습관’이 안정화될수록 운동을 방해하는 ‘지각(물음)’은 그만큼 감소하게 될 수밖에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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