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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몸, 나의 인격

‘지각’은 물음이고, 그 물음에 답하는 것은 몸이다.

 이제 몸과 인격personality에 대해서 이야기해 봅시다. 나의 몸과 나의 인격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형성되는 걸까요? 우리 주변에는 여러 ‘상’들이 있죠. ‘상’은 세계 삼라만상, 즉 세계 전체의 존재자 일반이라고 했잖아요. 그러니 ‘상’에는 꽃도 있고, 파도도 있고, 나무도 있고, 돈도 있고, 사랑도 있고, 우리의 몸도 있겠죠. 이런 ‘상’ 중에서 먼저 우리 몸이라는 ‘상’은 어떻게 구성되는지부터 알아봅시다.     


 우선 상들의 총체가 있고 그 총체 속에 이해관계가 있는 상들이 반사되는 것으로 보이는 행동의 중심들이 있다지각이 생겨나고 행동이 준비되는 것은 바로 이렇게 되는 것이다내 몸은 그 지각들의 중심에 그려지는 것이고 나의 인격은 그 행동에 결부되어야 할 존재이다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우리는 “상들의 총체”(세계 전체)에 관심을 쏘죠. 즉, 우리의 필요, 즉 특정한 이해관계 아래서 각자의 세계가 파악되죠. 세계 전체를 향해 우리의 관심을 쏘면 대부분은 그냥 다 투과되어 버리죠. 오직 우리에게 “이해관계가 있는 상” 즉, 관심을 받는 대상만이 반사되어 ‘지각’으로 되돌아오게 되죠. 세계 전체 중 관심 없는 것들은 투과하고 관심 있는 것들만 반사되어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상황, 이것이 바로 ‘지각’이죠. 책(돈)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세계 전체 중에서 책(돈)만 파악하거나 혹은 세계 전체를 책(돈)과 관련지어서 파악하잖아요. 바로 이것이 ‘지각’이잖아요.      


 이 ‘지각’은 반드시 잠재적 행동을 촉발하죠. ‘지각’은 우리 몸이 받는 물음들이기 때문이에요. ‘지각’(‘이것은 돈이다.’)은 ‘물음’(‘돈을 쓸 거냐? 벌 거냐?’)이기에 우리는 어떤 행동(‘일을 해서 돈을 번다.’)을 통해 그 ‘물음’에 답하는 거예요. 그 행동들이 쌓일 때 어떤 테두리가 생기게 되는데, 바로 그것이 바로 ‘몸’이에요. 즉, ‘지각’이라는 물음에 답하는 과정(행동)에 만들어진 테두리가 몸인 거죠. 베르그손의 표현을 빌리자면, 몸은 지각에 의해 형성된 “행동의 중심지들”인 거죠.  



    

인격은 몸에 새겨진 행동 경향이다.

      

 그렇다면 인격은 무엇일까요? 이는 몸과 깊은 상관관계에 있어요. 흔히 몸은 물질이고, 인격은 정신이기 때문에 둘을 별개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죠. 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이죠. 몸과 인격은 긴밀한 관계성 속에 있어요. 몸과 인격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요? 몸은 “행동의 중심들”이고, 인격은 “그 행동에 결부되어야 할 존재”에요. 즉, 우리의 몸은 ‘지각’에 의해 형성된 물음에 행동으로 답하는 중심이고, 인격은 그 행동들과 깊이 얽어 있는 거예요. 난해할 수 있으니 예를 들어봅시다. 


  온통 운동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해봐요. 그의 몸은 운동하는 몸이 되겠죠. 왜 그럴까요? 그는 세계 전체 중 운동과 관련된 대상(체육관·지식·음식·운동화·운동복…)들만 ‘지각’하고. 세계 전체를 운동과 관련지어 ‘지각’하겠죠. 그는 당연히 그런 ‘지각’에 따른 (운동 관련) 행동들을 하게 되겠죠. 그 행동들이 그리는(만들어내는) 테두리가 바로 ‘운동적 몸’이에요. 돈도 마찬가지죠. 돈과 관련된 것들이 이외의 것들은 다 투과시키고 돈을 벌고 쓰는 것, 그리고 그것과 관련된 것들만 ‘지각’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이들이 있죠. 그의 몸은 철저하게 ‘자본적 몸’이 되겠죠. 즉, 내 몸은 “행동의 중심들”인데, 그 “행동의 중심” 축이 운동 혹은 돈이 되는 것이죠.      

         

 ‘운동적 몸’과 ‘자본적 몸’은 다를 수밖에 없죠. 매 순간 운동과 관련된 행동을 하는 몸의 형태와 매 순간 돈과 관련된 행동을 하는 몸의 형태는 현저한 차이가 있겠죠. 전자는 근육질의 몸처럼 보여도 몸 이곳저곳에 부상이 많은 몸일 테고, 후자는 항상 돈에 쫓기며 긴장하고 있기 때문에 얼굴에는 생기도 없고 경직된 몸일 수밖에 없을 거예요. 바로 여기서 ‘인격’이 나오는 거죠.    


 

몸과 인격은 상호순환적 관계다.

    

 ‘인격’이란 게 뭐예요? 쉽게 말해 성격이잖아요. 이는 한 사람에게 일관되게 나타나는 행동 경향을 의미하잖아요. 인격은 몸(행동의 중심들)에 의해 촉발되는 행동들에 결부된 것이에요. ‘인격’은 내 몸이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 경향성의 총체를 의미하잖아요. 쉽게 말해. 몸의 특정한 행동 경향이 곧 나의 ‘인격’인 거죠. ‘자본(운동)적 몸’이 만들어내는 자본(운동) 중심적 행동 경향이 바로 ‘자본주의적 인격’인 거예요.      


 ‘자본적 몸’이라고 해서 한 가지 행동만 하는 건 아니에요. 일도 하고, 복권도 사고, 주식도 하고, 타인을 인색하게 대하고, 돈이 될 사람만 만나는 등등 여러 가지 행동 방식이 있을 거예요. 그 행동 방식에 의해 긴 시간 만들어진 테두리가 ‘몸’이죠. 그리고 그런 ‘몸’이 하는 행동의 경향성이 바로 한 사람의 ‘인격’인 거죠. 그리고 그 인격은 다시 몸을 만들게 되죠. 어떤 행동의 경향성이 다시 몸을 형성하게 되기 때문이죠. 즉, 몸과 인격은 상호순환적 관계인 거죠. 몸이 인격을 만들고, 다시 인격이 몸을 만드니까요.      



인격의 형성 원리


 지혜로워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는 주어진 인격 넘어 새로운 인격을 형성한다는 것을 의미할 거예요. 자본주의적인 인격 넘어 인문주의적 인격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죠. 온통 돈과 관련된 행동 경향을 보이는 게 아니라, 사람, 자연, 사랑과 관련된 행동 경향을 보는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새로운 인격을 형성해서 지혜로워질 수 있을까요? 인격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다시 되짚어봅시다.      


 ‘지각→행동→몸→행동→인격→지각…’ 인격의 형성 원리는 이렇게 도식화할 수 있을 거예요. 우리가 무엇인가를 ‘지각’하고 그로 인해 어떤 ‘행동’을 하게 되고, 그 ‘행동’들이 쌓여서 테두리가 잡히면 ‘몸’이 되죠. 그런 ‘몸’은 다시 특정한 ‘행동’ 경향을 드러내고 그것이 바로 한 사람의 ‘인격’이죠. 그리고 그런 ‘인격’으로 우리는 다시 무엇인가를 ‘지각’하게 되죠. 이 반복의 과정을 통해 우리의 ‘몸’과 ‘인격’이 점점 더 선명해지게 되는 거죠. 이 도식을 이해하면 우리는 인격을 바꿀 수 있는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어요.     


 인격의 시작은 무엇인가요? ‘지각’이에요. 부처가 부처의 인격을 갖고 있는 이유는 부처의 눈에는 부처들만 보이기 때문이에요. 돈벌레가 돈벌레의 인격을 갖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죠. 그들 눈에는 돈만 보이기 때문이죠. 부처(돈벌레)는 부처(돈벌레)의 ‘지각’으로 인해 ‘행동’하게 되고, 그로 인해 서서히 부처(돈벌레)의 ‘몸’이 되고, 그것은 다시 부처(돈벌레)로서의 ‘행동’ 경향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바로 부처(돈벌레)의 ‘인격’인 거예요.     

의지가 인격을 바꾼다.


 좀 더 나은 인격이 되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겠어요? 가장 먼저 ‘지각’을 바꿔야 해요. 달리 말해, ‘지각’을 확장해야 해요. 기존에 보던 것 말고 다른 것들을 볼 수 있어야 해요. 그렇다면 ‘지각’은 어떻게 확장할 수 있을까요? 앞서 ‘지각’이 ‘의지’의 함수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나나요? ‘지각’은 ‘의지’의 함수에요. 꼰대 같은 이야기 같지만, ‘지각’을 확장하려면 ‘의지’적 인간이 되어야 해요. 꼰대 같은 소리가 다 맞는 건 아니지만 때로 그것이 삶의 진실을 반영할 때가 있어요.     


 돈만 지각하던 사람이 어떻게 돈 이외의 것을 ‘지각’할 수 있을까요? ‘더 이상 돈벌레로 살고 싶지 않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 이런 ‘의지’를 가져야 해요. 그런 ‘의지’가 있을 때, 돈 이외의 것들, 음악, 소설, 시, 친구, 사랑 등등 인간다운 삶을 위한 많은 것들이 ‘지각’될 거예요. 그렇게 확장된 ‘지각’은 새로운 행동을 촉발할 테고, 그렇게 촉발된 행동들이 쌓여 새로운 몸이 될 테고, 그 새로운 몸은 당연히 새로운 행동 경향(인격!)을 드러내겠죠. ‘돈벌레’도 ‘부처’가 될 수 있어요.      


 부처가 되려는 ‘의지’만 있다면 부처가 될 가능성은 항상 열려 있는 거예요. 어려운 말이 아니에요. 새로운 인격을 형성하고 싶다면, ‘의지’를 갖고 여러 삶을 횡단해 봐야 해요. ‘의지’를 갖고 연애도 해보고, 퇴사도 해보고, 읽지 않았던 책도 읽어보고, 그림도 보고 음악도 들어보고, 낯선 곳으로 여행도 해보고, 그렇게 나이도 들어봐야 해요. 그렇게 삶을 횡단할 때 ‘지각’은 점차 넓어지게 돼요.    

 


주어진 인격 넘어 지혜에 이르는 길


 여러 삶을 횡단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내 몸이 계속 다른 위치에 서게 된다는 걸 의미하잖아요. 즉, 나의 몸과 행동을 고정시키지 않고 계속 이동시켜 본다는 거잖아요. 그 과정에서 지각과 표상은 점점 넓어질 수밖에 없어요. 서 있는 위치가 달라지면 보이는 풍경도 달라질 수밖에 없잖아요. 그 새로운 ‘지각’과 ‘표상’이 새로운 인격(행동 경향)이 형성될 수 있는 틈을 만들 거예요.    

  

 앞서 ‘표상’ 너머 ‘상’, 즉 출렁이는 거대한 세계 전체를 보는 게 중요하다고 했죠. 이는 기존의 인격 넘어 새로운 인격을 형성한다는 말과 같은 말이에요. 주어진 인격으로 볼 수 있는 건 ‘표상’의 세계죠. 모든 것이 연결되어 출렁이는 세계(상) 속에서 돈만 ‘표상’하는 건 주어진 인격으로만 행동하기 때문이잖아요. ‘표상’ 너머 ‘상’을 보려면 끊임없이 인격을 새롭게 만들어 나가야 해요. 좀 더 나은 인격으로 좀 더 나은 행동을 하게 되면 점점 더 많은 것들을 ‘지각’할 수 있게 될 테니까요. 그렇게 계속 조금씩 더 나은 인격을 형성해 나갈 때, 우리는 ‘표상’ 너머 ‘상’에 점점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거예요. 그것이 바로 지혜예요.     


 ‘나’의 자리에서 ‘너’의 자리로, ‘우리’의 자리로, 다시 ‘자연’의 자리로 삶을 횡단하며 새로운 인격을 형성하는 것. 그렇게 고정된 ‘표상’ 세계 넘어 모든 것이 연결되어 출렁이는 ‘상’의 세계를 볼 수 있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지혜잖아요. 지혜로운 이들이 더 많은 것들을 이해하고 더 많은 것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에요. 그들은 ‘나’의 자리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자리를 옮기며 더 새로운(고결한) 인격을 형성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세계(상)를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에요. 지혜로운 이들은 자신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들은 단 하나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진짜로 아는 이들이에요. 그래서 그들에게는 이해하지 못할 존재도, 사랑할 수 없는 존재도 없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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