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향한 두 가지 길

‘기억’과 ‘자유’ 사이에는 ‘성찰’이 있다.

‘기억’을 잘 펼쳐나가면 ‘물질’적 결핍을 넘어 새로운 삶을 생성할 수 있어요. 이는 수준 높은 ‘정신’이 주어진 삶을 바꾸는 방식이죠. 이는 우리네 삶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양상으로 드러나는 걸까요? 이는 ‘정신(기억)은 어떻게 물질이 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알 수 있을 거예요.


베르그손에 따르면, ‘정신(기억)’은 ‘물질(신체)’을 생성하죠. ‘정신’은 어떻게 ‘물질’화 되는 걸까요? 바로 ‘자유’를 통해서죠. ‘기억’이 전개되면서 생긴 ‘자유(독립성)’를 통해서 ‘물질(신체)’이 새롭게 생성되는 거죠. 무생물과 동식물은 존재론적 생성이 불가능하지만, 인간은 이것이 가능하죠. 이는 무생물·동식물에게는 ‘자유’가 없거나 작지만, 인간에게는 큰 ‘자유’가 있기 때문이죠. ‘자유’가 있기 때문에 인간은 기존의 자신과는 다른 존재로 생성될 수 있죠. 이를 설명하기 위해 ‘기억’과 ‘자유’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봐요.


무기물과 반성 능력이 가장 큰 정신 사이에는 가능한 모든 강도의 기억, 또는 마찬가지이겠지만 모든 정도의 자유가 있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무기물(돌멩이)’과 인간의 차이가 뭔가요? ‘기억’의 차이죠. 정확히는 ‘기억’의 강도 차이죠. ‘무기물’과 동식물과 인간은 “가능한 모든 강도의 기억”이 다르죠. ‘무기물’은 ‘기억’이 없고, 동식물은 매우 약한 강도의 ‘기억’이 있고, 인간은 매우 강한 강도의 ‘기억’이 있죠. 이 차이는 ‘자유’의 정도 차이와 동일해요. 쉽게 말해, ‘기억’이 곧 ‘자유’가 되는 거죠. 그렇다면 ‘기억’은 어떻게 ‘자유’가 되는 걸까요? ‘기억’과 ‘자유’ 사이에는 ‘성찰’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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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펼치면 ‘물질’적 결핍을 넘어 ‘자유’를 얻는다.


가장 강도 높은 ‘기억’을 가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로 “반성(성찰) 능력이 가장 큰 정신”을 가졌다는 사실을 의미하죠. 돌멩이와 개가 부자유(의존성)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기억’의 강도가 약한 만큼 반성(성찰) 능력 역시 약하기 때문이죠. 돌멩이는 ‘기억’ 자체가 없고, 개는 생존에 관련된 ‘기억’ 밖에 없죠. 이 때문에 돌멩이와 개는 어떤 과거도 반성(성찰)할 수 없죠. 그래서 이들은 같은 과거를 반복하며 살 수밖에 없는 거죠, 즉 부자유한 삶을 살 수 없는 거죠.


반면 인간은 어떤가요? ‘사랑·이별·후회…’ 같은 아주 높은 강도의 ‘기억’을 갖고 있죠. 이런 ‘기억’은 큰 반성(성찰) 능력을 촉발하죠. 바로 이 때문에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에)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게 되죠. 가난해서(뚱뚱해서·불안해서) 미처 ‘사랑’을 다 꽃피워보지도 못하고 ‘이별’한 일을 지독히도 ‘후회’하는 이가 있다고 해봐요. 그의 ‘기억(정신)’은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반성(성찰)하게 만들겠죠.


그 과정에서 그는 같은 상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자신 혹은 자신 주변의 ‘물질’들을 바꿔나가게 될 거예요. 게으른(뚱뚱한·불안한) 신체(물질)에서 부지런한(날씬한·평온한) 신체(물질)로 바꿔나갈 테고, 그로 인해 그의 주변 ‘물질’(외부 환경) 역시 변하겠죠. 그는 ‘기억(정신)’을 펼쳐서 ‘물질’적 결핍을 넘어 새로운 삶을 생성한 거죠. 이는 ‘정신(기억)’이 어떻게 ‘물질’이 되는지를 보여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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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기억’을 통한 ‘성찰’로부터 온다.


‘기억’은 ‘성찰’을 촉발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물질’화가 이뤄지는 거예요. 이 과정에서 ‘자유(독립성)’가 생기는 거죠. 이는 ‘기억→성찰→물질화→자유’라고 도식화할 수 있겠죠. 이는 우리네 일상이 증명하잖아요. 우리는 외부 자극(비난·칭찬·음식·가난…)에 대해 ‘자유’롭게(독립적으로) 행동할 수 있죠. 누군가 우리를 비난하지만 당당하게 삶을 살아갈 수 있고, 누군가 우리를 칭찬하지만 겸손하게 삶을 살아갈 수 있죠. 또 맛있는 음식이 널려 있지만 다이어트를 할 수도 있고, 가난하지만 타인을 도울 수도 있죠. 이처럼 우리는 ‘물질’적 결핍에도 불구하고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어요. 이런 ‘자유’는 강도 높은 ‘기억’으로부터 촉발된 ‘성찰’ 능력으로부터 오는 거죠.


우리에게는 어떤 ‘기억’이 있나요? 비난받아서 위축되었던 ‘기억’, 하지만 용기를 내어서 또 하루를 살아내었던 ‘기억’. 칭찬받아서 오만해졌던 ‘기억’, 그로 인해 소중한 것들을 떠나보내야 했던 ‘기억’. 음식을 많이 먹어서 살이 쪘던 ‘기억’, 그리고 음식을 줄이고 운동을 해서 살을 뺐던 ‘기억’. 지독히도 가난했던 ‘기억’, 그래서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벌었던 ‘기억’.


이런 수없이 많은 혹은 강도 높은 ‘기억’을 통해서 우리는 나름의 ‘성찰’ 능력을 얻게 되고, 이를 통해 ‘자유(독립성)’을 얻게 돼요. 비난 앞에서 위축되지 않을 ‘자유’, 칭찬 앞에서 오만해지지 않을 ‘자유’, 음식 앞에서 절제심을 가질 ‘자유’, 가난 앞에서 당당해질 ‘자유’. 이처럼, 한 존재의 ‘자유(독립성)’란 결국 ‘기억’으로부터 오는 거예요. 강도 높은 ‘기억’은 더 큰 반성(성찰) 능력을 촉발하고, 그 촉발된 성찰 능력만큼의 강도 높은 ‘자유’가 생기게 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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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자유로워질 것인가?


‘어떻게 자유로워질 것인가?’ 우리는 이제 이 오래된 질문에 답할 수 있어요. 흔히 ‘자유’를 능력의 문제이거나 의지의 문제라고 말하죠. 쉽게 말해, ‘자유’롭게(독립적으로) 살 능력(돈)이 있거나 ‘자유’롭게(독립적으로) 행동할 의지(용기)가 있어야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는 삶의 진실이 아니에요.


자유에 이르는 과정을 다시 생각해 봐요. ‘기억→성찰→물질화→자유’잖아요. ‘자유’는 근본적으로 ‘기억’으로부터 와요. ‘성찰’을 촉발할 만큼의 강도 높은 ‘기억’ 말이에요. 자유롭게 살 능력이나 의지는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결과물일 뿐인 거죠.


‘자유’롭지 못한 이들이 있죠. 일에 매여 사는 이들, 돈에 매여 사는 이들이 그런 경우죠. 이들은 왜 부자유(의존성)하게 사는 걸까요? ‘기억’이 없어서죠. 정확히는 ‘성찰’을 촉발할 만큼의 강도 높은 ‘기억’이 없어서죠. 일과 돈에 매여 사는 이들 중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직장을 그만두고 돈에 집착하지 않게 되는 경우가 더러 있어요. ‘자유’로워진 거죠. 이들이 어떻게 자유로워진 걸까요? 바로 죽음이라는 사건이 남긴 ‘기억’ 때문이죠. 죽음보다 더 큰 ‘성찰’을 촉발하는 ‘기억’은 없죠. 그 강렬한 ‘기억’이 (일과 돈으로부터의) ‘자유’를 선물해 준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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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폐된 ‘기억’을 찾아서


‘자유’롭게 살려면, ‘성찰’을 촉발할 만큼 강도 높은 ‘기억’이 필요해요. 여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어요. ‘기억을 찾는 방법’과 ‘기억을 만드는 방법’이죠. 전자는 우리가 은폐한 ‘기억’을 찾는 방식이에요. 사실 우리에게는 이미 ‘성찰’을 촉발할 만큼의 강도 높은 ‘기억’들이 다 있어요. 하지만 이런 우리는 이런 ‘기억’들을 대부분 무의식 속으로 은폐 해두죠. ‘성찰(반성!)’은 고통스러운 일이니까요.


누군가로부터 큰 상처를 받았거나 혹은 누군가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면, 우리는 그것을 무의식 깊은 곳에서 숨겨두려 하죠. 거창하게 큰 상처까지 갈 필요도 없고, 떠올리면 창피함에 얼굴이 붉어질 사소한 ‘기억’조차도 다 무의식으로 넣어 버리잖아요.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아프게 ‘반성’해야 할 테니까요. ‘성찰(반성)’하지 않기 위해서 수많은 ‘기억’들을 무의식 속에 묻어두는 것은 우리의 아주 오래된 습관이죠.


‘그는 왜 나에게 상처를 주었나?’ ‘나는 왜 그에게 상처를 주었나?’ 이런 ‘반성’을 계속하는 건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잖아. 그래서 우리는 그런 ‘기억’들을 무의식 깊숙한 곳에 넣어두는 거예요. ‘자유’롭게 살고 싶다면, 그런 은폐된 ‘기억’들을 찾아야 해요. 크고 작은 고통을 감내하며 ‘성찰’을 촉발할 ‘기억’들을 찾아나가야 해요.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유’를 얻게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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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기억’을 찾아서


두 번째는 ‘기억을 만드는 방법’이죠. ‘성찰’을 촉발할 ‘기억’이 없을 수도 있고(사실상 이런 경우는 거의 없어요), 혹은 아무리 노력해도 그런 ‘기억’을 찾지 못할 수도 있겠죠. 이럴 때는 ‘기억’을 만들어야 해요. 지금 행동해서 ‘성찰’을 촉발할 강도 높은 ‘기억’을 만들어야 해요.


‘여행’과 ‘사랑’이 그런 ‘기억’을 만드는 대표적인 두 방법이죠.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난 적이 있나요? 그 ‘여행’에서 돌아와 그것이 ‘기억’이 될 때, 그것은 ‘성찰’을 촉발할 강렬한 ‘기억’이 되죠. ‘시에스타’를 즐기는 스페인의 어느 작은 마을을 여행하고 왔다고 해봐요. 그 ‘기억’은 지나치게 바쁘게 사느라 삶의 의미를 놓치고 있다는 ‘성찰’을 촉발하지 않을까요? 그 ‘성찰’로 인해 우리는 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될 수도 있을 거예요.


‘사랑’ 역시 마찬가지죠. 한 사람을 ‘사랑’해 본 적이 있나요? 그 ‘사랑’이 지나고 그것이 ‘기억’이 될 때, 그것은 ‘성찰’을 촉발할 강력한 ‘기억’이 되잖아요. 돈을 아끼느라 그 사람을 더 많이 사랑해 주지 못했다고 해봐요. 그 ‘기억’은 돈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인해 ‘사랑’의 의미를 놓치게 되었다는 ‘성찰’을 촉발하지 않을까요? 그 ‘성찰’로 인해 우리는 돈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될 수도 있죠. 이처럼 과거로 돌아가 ‘기억’을 찾을 수 없다면, 지금 행동해서 ‘기억’을 만들어야 해요.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유’를 얻게 될 거예요.


너무 늦지 않게, ‘기억’을 찾거나 만들어야 할 거예요. 그렇지 않다면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후, 너무 때늦은 ‘자유’를 얻게 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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