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적 결핍 넘어 ‘물질’적 생성으로

수준 높은 정신에 이르는 단계들

“충분히 전개된 정신”에 대해서 조금 더 살펴봅시다. “충분히 전개된 정신”은 단번에 이르게 되기보다 어떤 단계들을 거치며 이르게 돼요. 이에 대한 베르그손의 이야기를 들어 봅시다.


이 잇따르는 단계들은 삶의 증가하는 강도의 척도를 나타낸다. 이 단계들의 각각은 지속의 더 높은 긴장에 상응하며, 감각-운동 체계의 더 커다란 발전에 의해서 밖으로 나타난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여기서 말하는 “잇따르는 단계들”은 “충분히 전개된 정신”이 거치는 단계들을 의미해요. 즉, ‘정신’이 더 높은 수준으로 향하는 단계들이고, 이는 ‘기억’이 전개되는 단계들인 거죠. 쉽게 말해, ‘기억이 전개되지 않은(수준 낮은) 정신’부터 ‘조금 전개된(높은 수준) 정신’, 그리고 “충분히 전개된(높은 수준) 정신”까지 단계들이 있는 거죠. 베르그손은 이 단계들이 “삶의 증가하는 강도”를 나타내게 된다고 말해요.


돌멩이, 개, 인간을 생각해 봐요. 돌멩이는 ‘기억이 전개되지 않은 정신’을 갖고 있고, 개는 ‘조금 전개된 정신’, 그리고 인간은 “충분히 전개된 정신”을 갖고 있는 셈이죠. 이 셋의 삶의 강도는 어떤가요? 삶의 강도는 외부 자극에 대한 능동성의 크기라고 말할 수 있죠. 그런 측면에서 돌멩이의 삶의 강도는 아주 낮죠. 돌멩이는 외부 자극에 대해서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일들이 없으니까요. 반면 개는 그보다 삶의 강도가 높고, 인간은 그보다 훨씬 삶의 강도가 높죠,


개는 돌멩이보다 외부 자극에 대해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일들이 많고, 인간의 능동성은 그보다 훨씬 크잖아요. 이처럼, ‘기억’이 전개됨에 따라 “잇따르는 단계들은 삶의 증가하는 강도의 척도를” 나타내죠. 그리고 “이 단계들의 각각은 지속의 더 높은 긴장에 상응”해요. 돌멩이에게는 ‘공간화된 시간’만이 있을 뿐, ‘지속’은 없죠. 개는 위험을 피하거나 먹이를 먹을 때 ‘지속’을 느끼지만, 이는 인간의 그것보다 높은 긴장의 ‘지속’은 아니죠. 인간은 아주 높은 긴장의 ‘지속’을 느끼죠.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사랑할 때를 생각해 봐요. 그때의 ‘지속’은 여느 동물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높은 긴장을 유지하는 ‘지속’의 시간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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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된 신체가 자유를 만든다.


이런 단계들은 “감각-운동 체계의 더 커다란 발전에 의해서 밖으로 나타나게” 돼요. ‘감각-운동 체계’가 뭔가요? ‘체body’잖아요. ‘감각’하고, 그에 따른 ‘운동’(반응)을 할 수 있는 인간적 체계가 ‘신체’인 거잖아요. 베르그손의 난해한 말은 ‘기억’이 전개되는 정도에 따라, 더 전개(발전)된 ‘체’가 밖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거죠.


돌멩이, 개, 인간의 ‘체’를 생각해 봐요. 점점 더 발전된 ‘체’로 드러나게 되는 거잖아요. 돌멩이의 ‘체’는 ‘감각’하고 ‘운동’하지만, 이는 그저 작용-반작용의 단순 반응일 정도로 조악한 ‘체’죠. 개는 조금 더 복잡하고 다양하게 ‘감각’하고 ‘운동’할 수 있는 ‘체’를 갖고 있죠. 하지만 이러한 ‘체’들은 인간의 발전된 ‘신체’에 비할 바가 못 되죠. 이러한 ‘체’의 발전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때 신경 체계를 생각하는가? 그것의 증가하는 복잡성은 생명체의 활동에 점점 더 큰 자유를, 반응하기 전에 기다리며, 받아들인 자극을 점점 더 풍부한 다양성을 지닌 운동 기제와 관계하는 능력을 남기는 것으로 보인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돌멩이→개→인간’ 이와 같은 ‘체’의 발전은 신경 체계의 발전을 의미하죠. 신경 체계의 “증가하는 복잡성은 생명체의 활동에 점점 더 큰 자유를” 부여하죠. 돌멩이보다 개가 자유롭고, 개보다 인간이 더 자유로운 이유가 뭔가요? ‘체’(신경체계)의 발전 때문이잖아요. 즉, ‘체’가 ‘신체’로 진화함에 따라 가능해진 더 넓은 선택 가능성 때문인 거죠.


인간의 ‘신체’는 돌멩이나 개처럼 즉각적인 작용-반작용을 하는 ‘체’가 아니죠. 인간은 외부 자극(비난·칭찬)이 들어오더라도, 즉각적으로 “반응하기 전에 기다릴” 수 있고, 그 “받아들인 자극을 점점 더 풍부한 다양성을 지닌” 형태로 변형(응축)하여 운동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잖아요. 이 때문에 인간은 여느 존재들보다 더 넓은 선택 가능성을 가질 수 있게 되죠. 바로 이것이 인간의 ‘신체’가 가진 힘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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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는 상징이고, 본질은 ‘기억’이다.


그런데 베르그손은 논의를 여기서 멈추지 않아요. 만약 여기서 논의를 멈춘다면, 베르그손은 단순한 유물론자에 지나지 않겠죠. 결국 인간에게는 중요한 것은 ‘신체’(물질)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그것은 겉모습에 불과하며, 물질에 대한 생명체의 더욱 커다란 독립성을 보장하는 것으로 보이는 신경계의 더욱 복잡한 조직은 독립성 자체를 물질적으로 상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신체’가 뭔가요? “물질(외부 자극)에 대한 생명체의 더욱 커다란 독립성을 보장하는 것으로 보이는 신경계의 더욱 복잡한 조직”이죠. 베르그손은 이러한 ‘신체’는 “독립성 자체를 물질적으로 상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해요. 쉽게 말해, 인간은 고도로 발전된 ‘신체’(신경 체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외부 자극(물질)에 대해서 독립적으로(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겉모습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인간이 외부 자극(물질)에 대해서 자유롭게(독립적으로) 행동할 수 있게 하는 본질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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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독립성이란 존재로 하여금 사물들이 가진 흐름의 리듬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고, 미래에 점점 더 깊이 영향을 행사하기 위해 과거를 더욱더 잘 보존하게 해주는 힘, … 기억을 말한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독립성’이 뭔가요? “사물들이 가진 흐름의 리듬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고, 미래에 점점 더 깊이 영향을 행사”하게 하는 힘이죠. 이는 능동성, 즉 ‘자유’죠. 강한 ‘독립성(자유)’을 가진 직장인이 있다고 해 봐요. 그는 직장(사물들)이 가진 “흐름의 리듬(분주함·경쟁·복종·시기·…)”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그로 인해 자신이 원하는 미래(여유·상생·독립·사랑…)에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행동을 할 수 있게 되죠. 그는 능동적이며 ‘자유’로운 존재인 거죠.


인간은 그 어떤 존재들보다 강한 ‘독립성(자유!)’을 갖고 있죠. 이 “독립성 자체를 물질적 상징”하는 것이 바로 ‘신체’인 거죠. 하지만 이는 ‘독립성(자유)’의 상징일 뿐, 본질은 아니에요. 인간이 외부 자극(비난·칭찬·음식·가난·…)이 “가진 흐름의 리듬(미움·오만·탐식·탐욕·…)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고, 미래에 대해 더 깊이 영향을 행사하기” 위한 본질적인 힘은 따로 있어요. 그것은 바로 “과거를 더욱 잘 보존하게 하게 해주는 힘”, 바로 ‘기억’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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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히 전개된 정신이 충분히 전개된 신체를 형성한다.


우리의 ‘자유(독립성)’는 ‘기억’으로부터 오죠. 아메바(원생 생물) 하나가 인간으로 진화하면서 ‘자유(독립성)’를 얻게 되는 과정을 생각해 봐요. 세포 같은 생명 하나가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면서 팔다리가 생기고, 눈과 코가 생기는 ‘체’의 발전(전개!)을 겪게 되죠. 이런 ‘신체’의 발전은 결과, 즉 겉모습일 뿐이죠. 근본적으로 ‘자유(독립성)’는 ‘기억’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거예요.


지나가는 먹이를 놓쳐버렸던 원생 생물의 안타까운 ‘기억’이 쌓이면서 ‘팔·다리’라는 ‘체’를 전개 시키게 되겠죠. 또 ‘팔다리’만으로는 미처 잡지 못했던 먹이를 보며 아쉬웠던 ‘기억’이 ‘손·발’이라는 ‘체’를 전개 시키게 되는 거죠. 시각이 없던 원생 생물이 여기저기 부딪히며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쌓이면서 ‘더듬이’라는 ‘체’를 갖게 되겠죠. 그렇게 ‘더듬이’를 갖게 된 생물이 흐릿한 세계를 보며 답답했던 ‘기억’이 ‘눈’이라는 ‘체’를 촉발하게 되는 거죠.


말하자면, ‘기억’이 “충분히 전개된 정신”이 ‘충분히 전개(진화)된 신체’를 만들게 되는 거죠. ‘체’의 진화(전개)는 ‘기억’이라는 근본적인 힘이 만들어내는 표면적 형상의 발전인 거죠. 이처럼, ‘독립성(자유)’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과거를 더욱 잘 보존하게 해주는 힘”인 ‘기억’을 통해서 형성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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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과 관념론 넘어


바로 여기서 유물론과 관념론을 넘어서는 베르그손 철학의 탁월함이 빛을 발하죠. 긴 시간 유물론과 관념론은 서로 모순 관계에 있어 왔죠. 어떤 이는 세계의 근본이 ‘물질’이라고 말하고(유물론), 또 어떤 이는 그것이 ‘관념(정신)’이라고 말해왔죠(관념론). 이 두 이론이 모두 한계를 가지죠.


유물론은 단순하고, 관념론은 허망하죠. 유물론자는 세계는 오직 ‘물질’로 구성된다는 단순한 논리를 펴죠. 정말 그런가요? 인간은 정말 단순한 유기물 덩어리인가요? 그렇지 않죠. 인간에게는 분명 자신의 ‘물질’적 한계를 극복해 나갈 ‘정신’이 있잖아요. 반대로 관념론자는 세계는 오직 ‘관념’이라고 말하죠. 이 역시 삶의 진실이 아니죠. ‘신체’(물질)가 없어도 ‘정신’이 존재할 수 있다는 논리는 철학이 아니라 종교적 담론처럼 허망하잖아요.


베르그손은 유물론과 관념론의 한계와 모순을 넘어 새로운 철학을 기초 세웁니다. 베르그손은 단순한 유물론자도, 허황된 관념론자도 아니에요. 베르그손은 ‘물질(신체)’의 중요성에 대해서 부정하지 않아요. 인간의 ‘자유(정신)’가 발전된 신경 체계, 즉 ‘신체(물질)’에서부터 비롯된다고 말하잖아요. 이런 측면만 놓고 보면, 베르그손은 영락없는 유물론자죠. ‘정신(자유)’은 ‘물질(신체)’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베르그손은 다시 ‘정신’의 중요성으로 돌아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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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적 결핍 넘어 ‘물질’적 생성으로


베르그손에 따르면, 인간이 가진 ‘자유’는 분명 ‘신체(물질)’로부터 오지만, 그 ‘신체’를 발전시키는 근본적인 힘이 ‘기억(정신!)’인 거죠. 즉, ‘기억’이 “충분히 전개된 정신”이 “충분히 전개된 신체”를 형성한다는 것이죠. 베르그손은 엄밀히 말하자면, 관념론자라고 말할 수 있어요. 결국 중요한 것은 ‘기억’이라는 ‘관념(정신)’이니까요. 하지만 ‘물질’적인 측면을 아주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는 측면에서 여느 관념론자와 다르죠. ‘물질(신체)’은 오직 ‘정신’(기억)에 의해서만 전개되니까요.


이러한 베르그손의 철학적 빛은 어두운 우리네 삶을 비춰줍니다. 우리네 삶은 수많은 ‘물질’(돈·외모·건강…)들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죠. 이런 ‘물질’들은 우리네 삶에서 매우 중요해요. 이 사실을 부정할 순 없을 거예요. 우리에게 여러 가지 ‘물질’적 결핍들이 있죠. 가난일 수도 있고, 못난 얼굴일 수도 있고, 작은 키일 수도 있고, 약한 체력일 수도 있겠죠. 그런 ‘물질’적 결핍들은 우리네 삶에 큰 영향을 미치죠.


하지만 그렇다고 ‘물질’이 우리네 삶의 전부는 아니에요. ‘물질’은 돌멩이와 개에게는 삶의 전부일 수 있겠지만, 우리에게는 그렇지 않죠. ‘물질’이 중요하다고 하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네 삶을 완전히 지배하는 것은 아니에요. 인간은 그 어떤 존재보다 수준 높은 ‘정신’을 갖고 있으니까요.


인간에게는 수준 높은 ‘정신’이 있어요. ‘물질’을 새롭게 형성해 나갈 ‘정신’이 있잖아요. 그러니 어떤 ‘물질’적 결핍이 있다고 해서 낙담하거나 좌절할 필요 없어요. ‘기억’을 충분히 전개해서 수준 높은 ‘정신’에 이르게 되었을 때, 우리는 ‘물질’적 결핍 넘어 새로운 ‘물질’적 ‘생성’을 해나갈 수 있으니까요.


지독히도 가난했던(못생겼던, 체력이 약했던) ‘기억’ 너머의 ‘기억’들을 잘 펼쳐나가면 우리는 그 가난(외모·체력)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생성할 수 있어요. 못생겼지만, 음악을 들으며 설랬던 ‘기억’을 펼쳐서 음악적 ‘신체(물질)’를 ‘생성’할 수 있죠. 그렇게 우리네 삶을 변화시켜 나갈 수 있죠. 마찬가지로 가난했지만, 부모에게 사랑받았던 ‘기억’을 펼쳐서 우리는 삶을 변화시킬 수 있죠. 베르그손의 철학은 단순한 ‘사유’가 아니에요. 우리네 삶의 구체적으로 변화시킬 ‘운동’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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