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나’는 무엇인가?
베르그손은 『물질과 기억』의 마지막 부분에 ‘물질’과 ‘기억’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해서 설명해요. 그리고 그것이 우리네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해요.
그 과거는 그 현재에 진실로 주어져 있다. 그러나 다소간 자유롭게 진화하는 존재는 매 순간 무엇인가를 창조한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지금의 ‘나’는 무엇일까요? 달리 말해 “현재에 진실로 주어져 있는” 지금의 ‘나’는 어떤 존재일까요? 이는 자신 과거의 총체예요. “그 과거는 그 현재에 진실로 주어져” 있기 때문이죠. 이는 전혀 어려운 말이 아니에요. 과거에 상처를 입었다면, 현재에 흉터가 남아 있을 수밖에 없잖아요. 한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 역시 마찬가지예요. 그 사람이 지나온 과거의 총체가 곧 현재의 그 사람 자체인 거죠.
그런데 과거는 ‘사실’이 아니라 ‘기억’이잖아요. 즉 한 사람의 과거는 지나온 일들의 ‘사실’이 아니라 그가 지나온 일들의 ‘기억’이죠. 그러니 지금의 ‘나’는 그 자신이 지나온 세월을 어떻게 ‘기억’하느냐에 따라 달리 규정된다고 말할 수 있죠. 바로 여기서 주어진 객관적 조건(환경)을 넘어설 수 있는 인간 존재의 가변성(잠재성)이 나와요.
‘나’는 과거 ‘사실’이 아니라 ‘기억’에 의해 존재한다.
지금 행복한 ‘나’와 지금 불행한 ‘나’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과거 불행했던 혹은 행복했던 ‘사실’이 있었느냐의 차이일까요? 즉 객관적인 조건(환경)의 차이일까요? 그렇지 않죠. (누군가 보기에 행복한 ‘사실’일 수 있는) 과거를 불행하게 ‘기억’하는 이의 현재는 진실로 불행하죠. 반대로 (누군가 보기에 불행한 ‘사실’일 수 있는) 과거를 행복하게 ‘기억’하는 이의 현재는 진실로 행복한 거예요.
인간은 과거 ‘사실’이 아니라 ‘기억’에 의해서 존재하죠. 이 때문에 인간은 같은 조건(환경)에서도 다르게 존재할 수 있죠. 그런데 이는 꼭 희망적으로 들리는 이야기인 것은 아니죠. 어떤 과거가 있을 때, 그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그것을 불행하게 ‘기억’하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죠. 이들은 (인간 존재의 가변성에 불구하고) 불행한 ‘나’로 확정된 경우죠.
이처럼 인간은 ‘기억’이라는 족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인 걸까요? 그렇지 않죠. “다소간 자유롭게 진화하는 존재”인 인간은 “매 순간 무엇인가를 창조”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불행한 ‘기억’은 상흔처럼 현재에 진실로 주어져 있는데 말이죠.
기억의 두 가지 기능, ‘작동’과 ‘상상’
우리는 오직 현재와 미래만이 유동적이라고 생각하고, 과거(기억)는 고정적이라고 생각하죠. 왜냐하면 과거(기억)는 지나간 일이니까요. 하지만 이는 삶의 진실이 아니에요. 과거(기억)는 고정적이지 않아요. 이 낯선 이야기에 대해서 베르그손은 이렇게 말해요.
과거는 물질에 의하여 작동되어야 하며, 정신에 의하여 상상되어야 한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베르그손에 따르면, 과거(기억)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어요. ‘작동’과 ‘상상’이죠. “과거는 물질에 의하여 작동”되고, “정신에 의하여 상상”될 수 있어요. 지독히도 가난했던 과거를 안고 사는 사람을 알고 있어요. 그는 그 과거로 인해서 받았던 크고 작은 상처의 ‘기억’이 있어요.
그 ‘과거(기억)’는 돈이라는 특정한 ‘물질’에 의하여 늘 다시 ‘작동’되곤 했죠. “과거는 물질에 의하여 작동”되니까요. 그가 긴 시간 늘 돈, 돈, 돈거리는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던 건, ‘물질(돈)’에 의해서 작동되었던 ‘기억’ 때문이었죠. 하지만 그는 지금 돈에 매인 삶에서 벗어났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바로 여기에 ‘기억’의 두 번째 기능인 ‘상상’의 역할이 있어요. ‘기억’은 “정신에 의해서 상상”되기도 해요. 지독한 가난의 ‘기억’을 겪은 이들 중 더 이상 돈에 매여 살지 않게 된 이들도 분명 존재하죠. 생활이 팍팍하더라도 소중한 이들과 함께 여행을 가고, 돈이 없더라도 주변 사람들을 도우면서 사는 이들이 있잖아요. 이는 과거(기억)가 “정신에 의하여 상상”될 수 있기 때문이에요.
가난했던 ‘기억’은 분명 특정한 ‘물질(돈)’에 의해서 돈, 돈, 돈거리는 삶을 ‘작동’시킬 거예요.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삶의 진실이죠. 하지만 동시에 그 ‘기억’은 어떤 ‘상상’을 촉발할 수 있어요. 가난했던 ‘기억’ 때문에 돈에 매인 삶이 ‘작동’되기도 하지만, 바로 그 ‘기억’으로 인해 조금 더 인간다운 삶을 살고 싶다는 ‘상상’을 하게 될 수 있죠. ‘기억’이 “정신에 의하여 상상”된 상태를 ‘욕망(꿈)’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거예요.
‘현실성’과 ‘잠재성’, ‘기억’의 두 가지 힘
가난한 이들 역시 ‘욕망(꿈)’이 있어요. 그런데 이 ‘욕망’은 종종 오해되곤 하죠. 부자가 되는 것은 가난한 이들의 ‘욕망(꿈)’일까요? 그렇지 않죠. 이는 ‘기억’이 “정신에 의하여 상상”된 상태가 아니라, “물질에 의하여 작동된” 상태에 가까울 거예요. 달리 말해, 부자가 되려는 ‘욕망’은 가난했던 ‘기억’ 때문에 늘 돈에 매여 사는 것과 같은 상태인 거죠.
진정한 ‘욕망(꿈)’이란 ‘기억’이 (물질에 의하여 작동된 상태가 아니라) “정신에 의하여 상상”된 상태를 의미하죠. 가난한 이들에게도 이런 ‘욕망’이 있죠. 가난한 과거(기억)가 있다고 해서 항상 먹고 사는 문제만 생각하며 사는 건 아니잖아요.
어떤 이는 그 가난했던 ‘기억’ 때문에 더 아름다운 세상을 ‘욕망’을 하게 되기도 하죠. ‘가난 때문에 상처받는 아이들이 없었으면 좋겠다.’ 누군가는 가난한 과거(기억)가 있기 때문에 이런 꿈을 갖게 되기도 하죠. 이런 꿈은 과거(기억)가 “정신에 의해서 상상”된 결과예요. 우리의 ‘정신(기억)’에는 능히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이 있어요.
‘기억’에는 두 가지 힘이 있어요. ‘현실성’과 ‘잠재성’이죠. ‘현실성’은 ‘기억’이 “물질에 의하여 작동”될 때 드러나는 힘이고, ‘잠재성’은 ‘기억’이 “정신에 의하여 상상”될 때 드러나는 힘이죠. 가난했던 ‘기억’ 때문에 ‘현실’적으로 돈을 벌려고 할 수도 있지만, 그 ‘기억’ 때문에 자신 안에 숨겨져 있던 ‘잠재’적 욕망이 드러날 수도 있어요. ‘기억’은 ‘현실’적 삶(생존)을 추동하는 힘인 동시에 지금의 현실적 삶 넘어 ‘잠재’적 삶(꿈)을 추동하는 힘인 거죠.
‘물질’과 ‘기억’, 삶의 두 축
‘과거(기억)’는 지금 우리네 삶을 지배합니다. 이는 벗어날 수 없는 삶의 진실이에요. 하지만 이것이 우리가 ‘과거(기억)’를 항상 똑같이 반복하며 살 수밖에 없다는 퇴행적 태도를 의미하는 건 아니에요. ‘기억’에는 ‘현실성’도 있지만, ‘잠재성’도 있기 때문이죠. ‘기억’은 오직 과거를 향한다고 믿죠. 이는 반만 맞는 말이에요. ‘기억’은 단순히 과거로 향하는 퇴행적 흐름이 아니에요. ‘기억’에는 ‘진보’적 흐름이 있어요. ‘기억’은 현재 속에서 과거와 미래 양쪽으로 분출되고 있는 흐름이기 때문이죠.
이제 우리는 ‘물질’과 ‘기억’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있죠. ‘기억’은 ‘물질’에 의해서 작동되고, ‘정신(전체 기억)’에 의해서 상상될 수 있죠. 가난했던 ‘기억’은 돈(물질)에 의해서 퇴행적으로 작동할 수도 있지만, 그 가난의 ‘기억’은 그 자신의 ‘정신’, 즉 ‘전체 기억’에 의해서 진보적으로 상상될 수 있어요. 즉 ‘기억’의 퇴행적 흐름은 ‘물질’로, ‘기억’의 진보적 흐름은 ‘정신(전체 기억)’으로 드러나요.
‘물질’이 우리네 삶을 ‘생존’을 위한 ‘현실’적 삶으로 이끈다면, ‘정신(전체 기억)’은 우리가 ‘욕망’하는 ‘잠재’적 삶으로 이끌 거예요. ‘기억’은 그 양쪽 모두를 실현할 힘이 있어요. ‘물질’과 ‘기억’은 우리네 삶을 이끌 두 축이에요. ‘현실’적 삶(생존!)을 잘 구축하기 위해서는 ‘물질’이 필요하고, 그 너머 ‘잠재’적 삶(꿈!)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전체 기억’이 필요한 거죠. 한 인간으로서 삶을 잘 산다는 건, ‘기억’을 통해 ‘현실’과 ‘욕망’ 사이에서 절묘하게 균형 잡으며 살아간다는 말과 같은 말일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