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행동을 향한다.
이제 또 하나의 ‘정신’ 작용인 ‘기억’에 대해서 이야기해 봐요. ‘기억’은 어떻게 ‘행동’으로 향하게 되는 걸까요?
기억을 고려하면 어떨까? 기억은 현재 지각과 유사한 모든 과거의 지각들을 불러오고, 그것에 앞선 것과 뒤따라온 것을 상기시키며, 그리하여 가장 유용한 결정을 암시하는 것을 첫 번째 기능으로 가진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기억’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어요. 첫 번째는 “가장 유용한 결정을 암시”하는 기능이에요. 예를 들어, 우리 앞에 향기로운 커피, 맛있는 케이크, 섹시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아무리 향기로운 커피, 아무리 맛있는 케이크, 아무리 섹시한 사람이 우리를 유혹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트럭이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면 어떨까요? 커피, 케이크, 섹시한 사람이 눈에 들어오지 않죠. 당장 트럭부터 피하려고 하겠죠.
왜 그럴까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차에 부딪히면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는 거예요. 이처럼 ‘기억’은 “가장 유용한 결정을 암시”하죠. 우리의 ‘정신’은 지금 트럭이 다가오고 있다는 “현재 지각과 가장 유사한 모든 과거 지각” 즉, 사고와 관련된 ‘기억’을 불러오는 거죠. 쉽게 말해, ‘기억’은 ‘지금 이러한 행동을 하는 게 가장 유용한 결정 아닐까?’라고 말해주는 거죠. 이처럼, ‘기억’은 명백한 정신 작용이지만, 이 역시 결국 ‘행동’과 관련되어 있죠.
‘기억’은 기존의 삶에서 벗어날 행동을 촉발한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다. 기억은 우리가 지속의 무수한 순간들을 유일한 직관 속에서 포착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사물의 흐름의 운동으로부터 즉 필연의 리듬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기억’에는 또 하나의 기능이 있어요. ‘기억’은 (사물들을 대하는) 우리의 “필연의 리듬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역할을 해요. 우리는 외부 사물들을 대할 때 각자만의 특정한 리듬이 있어요. 음식을 대할 때 특정한 리듬이 있고, 운동을 대할 때의 리듬이 있고, 공부를 대할 때의 리듬이 있죠.
음식을 대할 때는 신나는 리듬, 운동을 대할 때는 짜증 나는 리듬, 운동을 대할 때는 지루한 리듬을 가질 수 있잖아요.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이러한 필연적인 리듬이 있어요. 우리는 그 필연적 리듬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죠. 우리는 살아왔던(‘행동’했던) 대로 살아가게(‘행동’하게) 되는 경향이 있죠.
그런데 ‘기억’은 그 “필연의 리듬”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줘요. 즉 다르게 ‘행동’할 수 있게 해주는 거죠. 쉽게 말해, 음식을 대할 때 절제하는 리듬, 운동을 대할 때 신나는 리듬, 공부를 대할 때 설레는 리듬을 갖게 될 수 있죠.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기억은 지속의 무수한 순간들을 유일한 직관 속에서 포착하게” 해주기 때문이죠.
‘기억’은 ‘지속’을 응축해서 ‘직관’을 형성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지속’의 순간들을 겪죠. 어떤 사람을 만나서 대화하거나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을 때 질적으로 변화하는 ‘지속’의 순간을 겪게 될 때가 있죠. 이때 ‘기억’은 그 수많은 ‘지속’의 순간들을 어떤 ‘직관’으로 포착하게 해줘요. 제 예를 들어 볼게요.
저는 직장을 다닐 때 아주 강력한 자본주의적 리듬에서 살았어요. 돈이면 뭐든 다 할 수 있고, 돈 버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여기는 삶의 리듬 속에서 살았어요. 그래서 돈을 더 벌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기를 계발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 직장의 ‘기억’ 때문에 자기계발서를 읽으며 ‘지속’의 시간을 보냈어요.
자기계발서가 의미가 없다고 깨달을 즈음, 자기계발서의 ‘기억’으로 경제·경영서를 읽으며 ‘지속’의 시간을 보냈죠. 그 모든 ‘기억’이 더해졌을 때, 좀 더 큰돈을 벌기 위해서는 질적인 도약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철학을 공부하게 되었고, 곧 철학에 빠져들게(지속) 되었어요.
그 무수한 ‘지속’의 순간들이 모여 어느 순간 어떤 ‘직관’을 촉발했어요. “아, 이렇게 살면 안 되는 거구나! 조금 더 인간답게 살아야 하는 거구나!” 그 순간, 저의 “필연의 리듬”이었던 자본주의적 리듬에서 벗어나게 되었어요. 그 길로 회사도 그만두고 철학을 공부하는 글쟁이가 된 거죠. 자본주의적 리듬에서 벗어나 인문주의적 리듬을 생성하게 된 거예요.
이처럼 ‘기억’은 ‘지속’의 순간들을 하나의 ‘직관’으로 포착함으로써 기존의 필연적 리듬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줘요. 이 역시 ‘기억’이라는 정신 작용이 결국 다른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행동’을 촉발하게 된다는 사실을 드러내죠.
삶은 ‘지속’의 문제다.
여기서 우리는 삶의 진실 하나를 할 수 있어요. 삶은 ‘기억’과 ‘지속’의 함수인지도 몰라요. 우리가 어떤 ‘기억’을 갖고 있고, 어떤 ‘지속’의 순간 속에 있느냐 따라 삶은 달라져요. ‘기억’이 ‘지속’을 응축할 때 드러나는 ‘직관’이 우리네 삶을 바꾸게 되니까요. 그런데 긴 호흡으로 보자면, 삶은 오직 ‘지속’의 함수라고 말할 수 있어요. 우리가 ‘지속’하는 순간이 쌓여 ‘기억’이 되는 것이니까요.
동일한 외부 조건의 아래서도 오늘의 내가 어제 행동한 것처럼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나는 변하고 지속하기 때문이다.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앙리 베르그손
우리네 삶의 외부적 조건(가난·외모·학벌…)이 변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어제와 다른 ‘행동’을 할 수 있죠. 베르그손의 말처럼 “이는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죠. 왜냐하면 “동일한 외부 조건 아래서도” 우리는 항상 “변하고 지속”하고 있기 때문이죠.
우주는 지속한다. 우리가 시간의 본성을 심화시켜 볼수록 더욱더 우리는 지속이 발명과 형태의 창조, 절대적으로 새로운 것을 연속적으로 만들어낸다는 의미임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창조적 진화』 앙리 베르그손
우주도 ‘지속’하고, 우리도 ‘지속’하죠 우리가 이 사실을 진정으로 깨닫게 될 때, ‘지속’은 창조, 즉 “절대적으로 새로운 것을 연속적으로 만들어낸다”는 삶의 진실을 깨닫게 될 거예요. 불행했던 삶의 “필연의 리듬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건, ‘직관’이고 이는 ‘기억’과 ‘지속’의 함수예요. 하지만 이는 긴 호흡에서 ‘지속’의 문제로 되돌아오게 돼요. 결국 삶은 ‘지속’의 문제인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