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각’은 중추신경계의 진동이다.
이제 ‘진동’과 ‘지각’ 그리고 ‘물질’에 대해서 정리 해 봐요. 베르그손에 따르면 세계 모든 존재는 모두 떨림, 즉 ‘진동’이에요. 돌멩이도, 꽃, 나무, 새도 모두 ‘진동’이고, ‘나’도 ‘진동’이고, ‘너’도 진동이에요. 세계의 모든 존재는 모두 ‘진동’으로 존재하죠. 그렇다면, ‘지각’은 무엇일까요?
우선 지각에 대해서 알아보자. 여기에 ‘지각 중추들’을 가진 나의 신체가 있다. 이 중추들이 진동하면 나는 사물에 대한 표상을 갖는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우선, ‘지각’에서 가장 중요한 건 ‘나’의 신체에요. 외부 대상, 즉 ‘진동’을 받아들일 수 있는 “‘지각 중추들’을 가진 나의 신체”가 가장 중요하죠. ‘진동(외부 대상)’들이 ‘나’의 신체로 들어와서 신경 세포가 모여 있는 부분인 “중추들이 진동하면 나는 사물에 대한 표상을 갖게” 되는 거죠. 바로 이것이 ‘지각’이죠.
즉, “나의 신체”가 외부 진동(대상)을 받아들여 내부(신경 중추)가 진동할 때 ‘지각’이 가능해지는 거예요. 쉽게 말해, ‘지각’은 중추신경계(뇌를 주축으로 하는, 몸의 거의 모든 곳에 연결된 신경계)의 진동인 거죠. 아래 도식을 보며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볼게요.
‘지각’은 ‘진동’과 ‘진동’의 겹침이다.
‘나’의 몸도 ‘진동’이고, 세계(돌멩이·꽃·나무·새·너…)도 ‘진동’이죠. 각자 다른 리듬을 가진 ‘진동’이죠. 세계라는 것은 이 각자 다른 리듬(진동)을 가진 존재들이 세계 속에서 흘러내리는 상태인 거예요. 이때 ‘나’의 몸이라는 ‘진동’과 세계의 특정한 존재(돌멩이·꽃·나무·새·너…)의 ‘진동’이 겹치는 부분이 발생하게 되겠죠? 바로 이 교집합이 ‘지각’이고, 이것이 우리가 ‘물질’이라고 부르는 것이에요. ‘내’가 세계를 ‘지각’한다는 것은 세계 속 존재의 ‘진동’과 ‘나’의 ‘진동’이 만나 교집합을 이루는 상태이고, 그때 ‘물질(꽃)’로서 그 존재를 ‘지각’하게 되는 거예요.
우리가 ‘물질’을 본다(지각)는 것은 세계의 ‘진동’과 ‘나’의 ‘진동’이 겹친 상태인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똑같은 대상을 본다고 하더라도, 각자 다르게 볼 수밖에 없는 거죠. 외부 대상(꽃)의 ‘진동’이 동일하다고 하더라도, 사람마다 각자의 독특한 진동(리듬)이 있기 때문이죠.
제가 보는 꽃과 다른 사람들이 보는 꽃은 달라요. 이를 과학적 관점으로 설명해 볼까요? 색맹을 생각해 봐요. 똑같은 ‘물질’(꽃)을 본다고 하더라도, 색맹인 이는 제가 본 꽃의 색을 ‘지각’하지 못하겠죠. 사람마다 시력이라는 ‘진동’이 다르기 때문에 꽃은 제각각 다르게 ‘지각’될 거예요. 또 사람들의 시력이 동일하다고 가정하더라고 꽃은 다 다르게 ‘지각’될 거예요.
이는 현상학적 관점으로 설명할 수도 있어요. 모든 ‘지각’에는 ‘기억’이 스며들어 있잖아요. 즉 ‘나’의 과거 ‘기억(진동)’에 따라서 ‘꽃’이 슬프게 보이기도, 또는 기쁘게 보이기도 하겠죠. 같은 꽃을 본다고 하더라도, 꽃에 관한 행복한 ‘기억’이 있는 이는 꽃이 기쁘게 보일 테고, 꽃에 관한 불행한 ‘기억’이 있는 이는 꽃이 슬프게 보일 거예요. 베르그손의 이론은 과학부터 현상학(철학)까지 다 아우르는 거예요.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지각’에 대해 조금 더 심층적으로 살펴봐요. ‘지각’은 단지 외부 대상이라는 ‘진동’과 신체라는 ‘진동’의 교집합일 뿐인 걸까요? 그렇지 않을 거예요.
지각은 어디에 있는가? … 나의 신체를 놓음으로써 나는 어떤 상을 놓은 것이지만, 그러나 그 사실에 의해서 또 다른 상들의 전체를 놓은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성질들과 규정들, 그리고 결국 자신의 존재성을 자신이 우주 전체 속에서 점유하는 위치에 의존하지 않는 물질적 대상은 없기 때문이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지각’은 세계의 속 어딘가에 “나의 신체를 놓음으로써” 발생하는 “어떤 상”이죠. 쉽게 말해, 꽃(진동)이 있는 곳에 “나의 신체(진동)를 놓음으로써” 발생하는 (꽃과 나의) 중첩된 ‘진동’(상)이 ‘지각’인 거죠. 그래서 꽃의 ‘지각’이 단순히 꽃(진동)과 ‘나(진동)’의 중첩이라고 생각하죠. 그런데 이는 중요한 세계의 진실 하나를 놓친 관점이죠.
꽃 앞에 우리의 “신체를 놓음으로써” 우리는 “어떤 상❀”을 갖게 되겠죠. 그런데 이 ‘상’은 “다른 상들의 전체를 놓은 것”이에요. 쉽게 말해, 꽃 하나를 ‘지각’한다는 건 세계 전체를 ‘지각’한다는 말과 같다는 거죠. 이는 논리적 자명하죠.
꽃도 ‘나’도 세계의 모든 존재 전체와 연결된 채로 존재하는 거잖아요. 꽃은 세계 전체(토양·물·햇볕·바람·새…)와 연결된 채로 존재하고, ‘나’ 역시 전체 속에서 연결된 채로 존재하고 있죠. 결국 꽃이던 ‘나’이던, “자신의 존재성”이 “우주 전체 속에서 점유하는 위치에 의존하지 않는 물질적 대상은 없는” 것이죠. 이는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불교의 연기법이 의미하는 바이기도 하죠.
베르그손과 불교
베르그손의 철학은 불교와 일치하는 부분이 상당히 많아요. 불교의 핵심은 ‘무상無常’과 ‘무아無我’거든요. ‘무상’은 모든 것은 매 순간 변한다는 의미고, ‘무아’는 ‘나(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예요. 선뜻 이해하기 어렵죠. ‘나’는 지금 분명히 존재하고, ‘나’를 둘러싼 존재(직장·가족·집·자동차…)들 역시 매 순간 변하는 것 같지는 않잖아요. 하지만 이는 ‘나’와 세계를 정확히 보지 못하는 것이죠.
베르그손에 따르면, 세계는 ‘진동’이고, 세계의 모든 존재는 ‘공진共鳴’의 형태로 존재하죠. 즉, 모든 존재는 세계 전체와 연결된 ‘진동’의 형태도 존재하는 거죠. 직장·가족·집·자동차는 정말 변하지 않나요? 이들은 단 한 순간도 같은 형태로 존재하지 않죠. 세계 전체와 연결된 상태로 떨리는 ‘진동’은 매 순간 변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우리가 섬세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를 파악할 수 없을 뿐이죠. 모든 존재는 ‘공진’ 상태이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무상’하죠.
‘나’는 정말 존재하나요? ‘나’는 없죠. ‘나’는 세계 전체(직장·가족·집·자동차…)와 연결되어 ‘진동’하는 ‘공진’ 상태일 뿐이죠. 즉, ‘나’ 역시 매 순간 변화하는 존재인 거예요. 세계의 모든 존재(직장·가족·집·자동차…)가 ‘무상’하기 때문에 ‘나’ 역시 ‘무아’일 수밖에 없어요. 우리가 섬세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를 파악할 수 없을 뿐이죠.
‘무상’은 애틋함이고, ‘무아’는 가능성이다.
불교의 ‘무아’와 ‘무상’에서 허무주의를 읽는 이들이 흔하죠. 영원한 것은 없기에 ‘나’ 역시 곧 사라질 거라고 보면 모든 것이 다 허무하잖아요. 그런데 베르그손이라는 안경을 쓰고 불교를 바라보면 전혀 다르게 보이죠.
‘무상’은 허무한가요? 세계(직장·가족·집·자동차…)는 ‘공진’ 상태죠. 매 순간 변하죠. 즉, 세계는 지금, 이 순간에 한 번뿐인 것들인 거죠. 그래서 우리는 직장·가족·집·자동차를 더 애틋하게 대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마치 곧 돌아가실 부모님을 애틋하게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죠.
또 그래서 우리는 세계(직장·가족·집·자동차…)를 조금 더 소중히 대하려는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요? 우리가 세계(직장·가족·집·자동차)에 조금 더 아름다운 ‘진동’을 더하면, 조금 더 아름다운 ‘공진’ 상태(직장·가족·집·자동차)가 될 수 있으니까요. ‘무상’은 허무하지 않죠. 애틋함이고 소중함이죠.
‘무아’는 허무한가요? ‘나’는 ‘공진’ 상태죠. 매 순간 변하기에 ‘나’는 없는 거예요.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매 순간 조금 더 나은 존재가 될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 아닌가요? 우리가 어떤 ‘진동’을 만나느냐에 따라 다른 ‘나’가 될 수 있잖아요. 조금 더 아름다운 ‘진동’을 만나면 조금 더 아름다운 ‘나’가 될 수 있잖아요. ‘나’는 없기 때문에 더 나은 ‘나’가 되려는 마음이 생기게 되죠. ‘무아’는 허무하지 않죠. 가능성이자 희망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