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구스티누스의 '과거', '현재', '미래
과거=기억, 현재=지각, 미래=기대
‘과거=기억’, ‘현재=지각’, ‘미래=기대’ 이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의 개념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주관적인 것이다. 쉽게 말해, ‘기억’, ‘지각’, ‘기대’라는 우리 마음의 세 가지 기능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는 지극히 옳은 이야기다.
‘과거’에 싸웠던 친구와 이야기를 나눴다고 해보자. 그는 내가 잘못해서 싸웠다고 말하고 나는 그 친구가 잘못해서 싸웠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과거’와 내가 말하는 ‘과거’가 달라서다. 이는 당황스러운 일이 아니다. 당연한 일이다. 친구가 ‘기억’하는 내용과 내가 ‘기억’하는 내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과거’는 객관적인 '기록'이 아니라 주관적인 ‘기억’일 뿐이다.
이제 ‘현재’를 생각해보자. 친구와 떡볶이를 먹으로 갔다고 해보자. 그런데 공교롭게도 함께 간 친구가 색맹이다. 그때 ‘현재’ 우리는 똑같이 빨간 떡볶이를 먹고 있는 게 아니다. 그 친구와 나는 다른 ‘현재’에 있는 것이다. 내가 보고 있는 지금과 그 친구와 보고 있는 지금은 명백히 다르다. 이는 친구와 내가 다르게 ‘지각’(지켜봄)했기 때문이다. ‘현재’는 객관적인 '세계'가 아니라 주관적인 ‘지각’일 뿐이다.
‘미래’도 마찬가지다. 나의 ‘미래’에 대해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눈다고 해보자. 나는 가수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말하고, 친구는 가수가 될 수 없을 거라고 말한다. 우리는 각자 다른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내가 나에게 기대하는 것과 친구가 나에게 ‘기대’(기다림)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다. 나에게 대해서 ‘기대’(기다림)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미래’는 객관적인 '예측'이 아니라 주관적인 ‘기대’일 뿐이다.
‘기대’하고 ‘기다리는’ 것이 바로 우리의 ‘미래’다.
이제 우리의 질문으로 돌아갈 수 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미래는 ‘미래의 현재’이고, 이는 우리의 ‘기대’(기다림)다. 어떤 직업을 갖게 될까? 어떤 사랑을 하게 될까? 어떤 내가 되어있을까? 이것은 미래이다. 하지만 이 미래는 모두 ‘기대’(기다림)일 뿐이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간절히 기대하고 기다리는 모습으로 찾아온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미래는 기대(기다림)’라는 말을, ‘막연하게 기대(기다림)만 하면 원하는 미래에 가닿을 있다’는 의미로 오해서는 안 된다. 막연한 ‘기대(기다림)’은 진정한 의미에서 ‘기대(기다림)’가 아니다. 밥을 먹고 싶은 ‘기찬’과 ‘종수’가 있다. ‘기찬’이는 막연하게 밥 먹을 것을 ‘기대’(기다림)한다. 그는 미래에 밥을 먹을 수 있을까? 아니다. 오락을 하거나 친구와 노느라 밥을 먹는 미래를 맞이하지 못할 테다.
‘종수’는 너무나 배가 고파서 간절하게 밥 먹을 것을 기대(기다림)한다. 그는 미래에 밥을 먹을 수 있을까? 그렇다. 반드시 먹을 수 있다. 밥 먹을 미래를 너무도 간절히 기대하고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밥이 애초에 '종수'가 기대했던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밥은 아닐 수 있다. 차가운 밥일 수도 있고 아니면 빵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반드시 어떤 '밥'을 먹게 된다. 간절히 기대(기다림)하기에, 부엌과 냉장고를 샅샅이 뒤질 테니까. 진정한 ‘기대’(기다림)에는 그런 모든 노력이 이미 포함되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을 알고 있는 우리에게 미래를 아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과거는 기억이고, 현재는 지각이고, 미래는 기대다. 그러니 미래를 알고 싶다면, 자신이 무엇을 ‘기대’(기다림)하고 있는지 점검하면 된다. 막연한 ‘기대’(기다림)가 아닌, 너무도 간절한 ‘기대’(기다림). 지금 우리는 어떤 삶을 간절히 기대하고 있을까?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이 바로 우리의 미래다. 우리는 ‘기대(기다림)’하는 ‘미래’를 맞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