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구스티누스의 '과거', '현재', '미래'
미래가 궁금하다면?
미래가 궁금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어떤 직업을 갖게 될까? 어떤 사랑을 하게 될까? 나이든 내 모습은 어떨까? 등등 미래에 어떤 삶을 살게 될지 궁금하다. 하지만 이런 궁금증은 헛된 것처럼 보인다. 타임머신이 없다면 해소되지 않을 궁금증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임머신 없이도 이 질문에 답해볼 수 있다. 그 답을 듣기 위해 먼저 해야 할 질문이 있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미래가 어떤 모습이건 간에, 그 미래는 반드시 과거를 지나 현재를 거쳐 도달하게 된다. 즉, 어떤 미래든, 그 미래는 과거에서 현재를 지나 도착하게 된다. 그러니까 미래를 알고 싶다면 먼저 시간, 정확히는 시간의 세 가지 층위(과거, 미래, 현재)가 무엇인지부터 물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질문해야 한다.
‘과거·현재·미래란 무엇인가?’ 그 답은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라는 철학자에게 들어보는 것이 좋겠다. 그는 초대 그리스도교 교회의 대표적인 철학자였다. 또한 동시에 중세의 새로운 문화를 탄생하게 한 선구자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론」이란 저서를 통해 서양 철학사에서 처음으로 ‘시간’에 관한 문제 전반을 깊이 있게 연구하고 기록했다.
시간의 난해함
생각해보면 ‘시간’이란 것은 참 묘하다. 시간은 항상 우리 곁에 있다. 아니 시간이 바로 우리네 삶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시간 없이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도 느낄 수도 없으니까. 그만큼이나 시간은 우리와 밀접하다. 하지만 그런 밀접함에도 불구하고 시간 무엇인지에 대해 명쾌하게 말하기 어렵다. 시간은 그저 흘러 갈 뿐, 눈에 보이는 것도, 손에 잡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시간’의 난해함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다.
“도대체 시간이란 무엇입니까? 아무도 묻는 사람이 없으면 아는 듯하다가, 막상 묻는 사람에게 설명하려 하면 말문이 막혀버립니다.”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론」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를 마치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라고 여긴다. 과거, 현재, 미래를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어제, 오늘, 내일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시간에 관해서 아무도 묻는 사람이 없을 때는 그것을 아는 것도 같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과 달리, 과거, 현재, 미래는 객관적이지 않다.
과거가 무엇인가? 그것은 이미 지나가버린 것 아닌가. 현재가 무엇인가? 곧 사라질 지금 찰나의 순간 아닌가. 미래란 무엇인가? 아직 오지 않은 것 아닌가. 그것은 모두 뜬 구름 같은 것이다. 그 어느 것 하나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막상 시간에 관해 설명하려고 하면 말문이 막혀버리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난해한 시간에 관해 놀라운 통찰을 보여준다.
과거, 현재, 미래의 정체는 무엇일까?
“내가 알고 있는 시를 읊조린다고 해보자. 내가 시작하기 전에 나의 ‘기다림’은 시 전편에 뻗친다. 그러나 막상 시를 읊조리기 시작하면, 벌써 몇 구절은 과거로 되어버린다. 그렇게 과거로 따돌려진 시 몇 구절은 내 기억 안으로 들게 된다. 이리하여 내 행동의 존재는 두 군데에 걸치게 된다. 그 하나는 이미 읊조린 것을 ‘기억함’이고, 또 하나는 읊조릴 것을 ‘기다림’이다. 이때 ‘지켜봄’은 현재인 것으로, 미래이던 것이 과거가 되어 이를 거쳐 가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론」
아우구스티누스는 시를 읽는 자신의 모습을 통해 과거, 현재, 미래를 설명한다. 이를 우리의 모습으로 바꿔 이야기해보자. 보고 싶었던 유튜브 영상을 보는 상황을 떠올려보자. 먼저 영상을 보기 전에는 영상을 보는 것은 ‘미래’의 일이다. 그리고 영상을 보는 순간은 ‘현재’다. 그리고 보았던 영상의 내용은 ‘과거’가 된다. 이때 우리의 마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까? ‘기다림’ ‘지켜봄’ ‘기억함’이 일어난다. 즉, 영상을 보기 전에는 영상을 보기 위한 ‘기다림’, 영상을 보는 동안에 영상을 보는 ‘지켜봄’, 영상을 보고나서는 영상을 ‘기억함’이 발생된다.
바로 이것이 미래, 현재, 과거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버려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과거를 있는 것처럼 말할 수 있을까? ‘기억’하기 때문이다. 현재는 결코 붙잡을 수 없는 찰나의 순간이다. 그런데 어떻게 현재를 말할 수 있을까? ‘지켜보기’ 때문이다. 미래는 아지 오지 않았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미래를 있는 것처럼 말할 수 있을까? ‘기다리기’ 때문이다. 이제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에 대한 관점을 이해할 수 있다.
과거, 미래는 없다. 현재만 있을 뿐
“엄밀한 의미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세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엄밀하게는 세 개의 시간은 과거의 현재, 현재의 현재, 미래의 현재입니다. 사실 이 세 가지는 의식(anima) 속에 있으며 의식 이외에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과거의 현재는 기억이며, 현재의 현재는 지각이며, 미래의 현재는 기대인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론」
그의 말처럼, 과거·현재·미래라는 세 가지 종류의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현재’라는 하나의 시간 밖에 없다. 찰나의 ‘지켜봄’의 시간. 그 현재의 시간만이 존재한다. 과거와 현재는 실제로는 없는 것이다. 이것을 아우구스티누스는 ‘과거의 현재’, ‘미래의 현재’라고 말한다. 그는 실제로 시간은 ‘과거의 현재’, ‘현재의 현재’, ‘미래의 현재’라고 말한다.
과거 있다면 그것은 그 과거가 진행 중일 때였던 ‘과거의 현재’ 뿐이다. 어제 유튜브 영상을 보았던 것은 과거고 이미 지나가버렸다. 그 과거는 어제 영상을 보고 있었던 중이었던 ‘과거의 현재’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미래가 있다면 그것은 앞으로 다가올 미래가 현재가 될 때뿐이다. 내일 유튜브 영상을 볼 일은 아직 오직 않았다. 그 미래는 내일 영상을 보고 있을 ‘미래의 현재’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 ‘과거의 현재’, ‘현재의 현재’, ‘미래의 현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은 모두 우리의 마음(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과거의 현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기억’하기 때문이다. 어제 보았던 영상을 기억하기 때문에 과거를 알 수 있다. ‘현재의 현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지각’(지켜봄)하기 때문이다. 지금 영상을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현재를 알 수 있다. ‘미래의 현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기대’(기다림)하기 때문이다. 내일 영상을 볼 것을 기대(기다림)하기 때문에 미래를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