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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도 안 먹고 점심 시간 내내 어디 갔다 오는거야?”
종이 쳤는데도 승진은 윤조 자리 근처에서 서성대고 있다가 마침 들어오는 윤조를 몰아세웠다.
“아… 속이 좀 안 좋아서…”
“… 기다리면 언제나처럼 네가 먼저 설명하겠지… 했지만 요즘 집 때문에도 너무 힘든데 너까지 멀리 하니까 정말 죽겠어. 자꾸만 피하기만 하면서 뜬금없이 성숙이랑 다니질 않나…”
“좀!
나 좀 내버려 둘래? 넌 죽을 예정이라던가, 죽었다던가 혹은 죽었는데 살았다던가 이런거 아니잖아? 들었어. 부모님 이야기… 내가 무슨 얘기를 해 줄 수 있겠어. 난 부모가 이혼했으면 바라는 그런 자식인데 말야. 나도 요즘 대체 내가 산 건지 죽은 건지 모르겠거든? 각자 일은 각자가 좀 알아서 하는거 어때?”
“어이고… 세상 없는 단짝들도 싸우긴 싸우는가베? 마 싸우면서 다 크고 그란다 아이가. 대충 하고 퍼뜩 자리에 앉아라.”
경상도 출신인 국사 선생은 모범생 둘이 말싸움을 하는 모양이 신기한지 짐짓 놀렸다. 반 전체가 사실 의아하단 듯 둘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요즘 들어 툭 하면 혼자 사라지는 윤조를 반에서 수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아이는 없었다.
“진짜 그거야? 윤조가 비밀 과외 받으러 다니느라 바빠서 승진이랑 그냥 그런거?”
“아냐, 윤조네 아빠가 피아노 없애서 윤조가 학교 오케스트라 피아노라도 하고 싶어 하는거거든. 아마 별관에 가서 혼자 연습하는 시간이 많아서 둘이 그럴걸?”
“왜 궁금한데??”
결국 당사자인 승진이 나즈막히 소리를 지르자 참새들이 입을 다문다.누군가가 그래서 대체 둘이 왜 그러는거냐고 진지하게 묻는다면 윤조는 뭐라고 대답을 해야할까를 국사 시간 내내 생각했다. 아무래도 이유는 우정도 의무가 되면 버겁다고 밖에…
“내가 아빠랑 친한 편이 아니었단 건 잘 알지? 그런데 그가 한 말 중에 진심으로 동의하는 한 가지는 세상에 필요 없는게 친구라는거였어. ‘친구’라는 이름은 대통령이나 장관보다 더 어렵게 임명하도록 해야 하는거야. 어차피 진짜 친구는 멸종중이라는게 더 맞을테니. 같이 공부 하고, 같이 떡볶이 먹고, 학원 다니고, 좋아하는 연예인 이야기 실컷 하고, 집에 가서 또 서로 전화하고… 이러면 절친이냐? 대충 정의에 맞을라면 네가 미나에게 하는 정성 정도는 되어야 맞지.”
‘걔를 꼭 너무 좋아해서 지금 엮인게 아니거든?’
“그러니까 우정도 궁합이 맞아야 한다는거야. 너랑 저 예쁜이는 그다지 안 맞아. 너는 끝도 없이 무심하고 쟤는 조그만 것도 슬픈 그런 말랑이거든.”
‘됐고, 병원은 어쩌고 온거야!’
“걱정마. 맞고 있는 수액에 내 수액도 좀 넣었지. 아마 지금쯤 목 매달 시점부터 수연이 죽는 순간까지 꿈인듯 현실인듯 생생하게 보고 있는중일테니. 뭐 깨고 나서 좀 미친 듯 굴겠지만…”
‘아… 골치 아파. 걔네 엄마나 누구나 … 수연이 쪽도 그렇고… 지금 아무도 그럼 이 상황은 모르는거야? 걔를 병원에 눕혀 놓은 인간은 누구야?’
“있어. 그 아줌마가 대체 여기에 왜 엮였는지를 지금 조사중… 어쨌건 양아치한테 나쁘게 대하진 않을거야. 두고 봐. 어쩌면 평생 못 갖게 생긴걸 가지게 되어 좋다고 생각할걸. 게다가 핏줄이고… 하긴 핏줄이니까 진 빚도 있군.”
‘핏줄?? 무슨소리야? 그나저나 난 뭐 누구한테 빚진 거 없어?’
“넌 나 한테 빚졌지. 그러니 내가 너한테 붙어 있는거야.”
‘아 뭔 빚!! 얼른 말해. 갚고 치워버리게.’
“내가 받아야겠다 싶을 때 말할거야.”
‘귀신 되면 단체로 답답이병 이라도 걸리나… 맨날 ‘네가 찾아내야지, ‘ , ‘때가 되면…’, ‘건 나도 모른다네’ 타령이냐!’
“됐고, 너 거기 5번 틀렸다야.”
마침 성적에 반영 되는 수학 쪽지 시험 중이었는데 한주가 갑자기 나타나 지껄이고 있었다.
‘헷갈리게 하지 말고 얼른 꺼져!’
한주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자 윤조는 냉큼 5번 답을 지우고 다시 풀기 시작했다.
‘앗싸, 하마터면 3점 날릴 뻔 했네…’
조 병수가 처음부터 개차반인 것은 아니었다. 물려받은 재산도 있었고 하던 방앗간도 인근에서 제일 맛있기로 유명해 매일 저녁 일을 파하고 집으로 귀가하는 손에는 현금이 빼곡히 든 자루가 쥐어져 있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탄탄해 보이던 돌 다리가 무너지는 일이 생기듯 영원히 튼튼한 것이란 없다. 현금이 남아도니 기웃거리던 도박판이 터가 되고 수족처럼 믿었던 사촌동생이자 방앗간 총무가 돈을 빼돌리는 것도 모르다 어느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껍데기 뿐인 방앗간과 빚만 잔뜩 쌓여 있었다. 그나마 남은 방앗간을 처분하고 며칠간 도박판을 떠돌다 돌아온 집에 마누라는 없었다. 잘 살던 시절에는 방앗간 잡부와 다정하게 인사만 해도 뺏길까 눈을 부라리던 아내는 기울어지자 빼돌린 돈으로 이미 다른 지방에 빵집을 차린 사촌동생에게 도망가 버렸다.
아내의 난 자리가 확연하게 엉망이 된 집안에는 아직 사람 구실을 하기에 어른 두 남매만 배를 곯으며 남아 있었다. 애초에 책임감이 있었다면 집안을 이렇게 망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유난히 어미를 닮은 어린 딸은 취기가 오르면 더욱 병수의 분노를 치솟게 만들었다. 병수의 학대에 견디다 못한 명혜는 또래들이 중학교 진학을 하던 해 4월 어느 밤, 아직도 꽃샘 추위에 떨어야 하는 손에 부엌칼을 모아 쥔 채 초저녁부터 소주 몇 병을 들이키고 곯아 떨어진 아비를 내려다 보고 섰었다.
“이러지마… 명혜야. 그냥 떠나. 이 인간 일어나기 전에 얼른…”
두 살 위 오빠인 명규는 동생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이 그것밖에는 없었다. 돌처럼 굳어서 칼을 여전히 부여잡고 있는 동생의 손을 간신히 풀고 업어가도 모르게 뻗은 병수의 허리춤에 반쯤 풀려 있는 전대에서 몇 장 안 되는 지폐를 긁어다 그녀의 손에 쥐어 주었다.
“얼른 가… 빨리… 되도록 멀리… 자리 잡더라도 편지 따위는 하지 말고… 만날 운명이면 우린 다시 만날거야.”
“도박할 돈 없어진 거 알면 너도 죽을만큼 맞을텐데…”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을 떼는 순간까지는 조 명혜도 꽤나 인간적이었다. 결석하는 날이 더 많긴 해도 그나마 다니던 중학교를 관두게 된 것은 밥 해주고 욕받이 해주던 동생을 탈출시킨 댓가였다. 명규는 한 때 그들이 주인이었던 떡 방앗간을 다니면서 일당을 벌어 아비의 도박비를 대야만 했고 돈이 모자라면 어김없이 병수의 허리띠로 두드려맞다가 도망을 쳐야 했다. 집 밖 담벼락에 기대 끊어지지 않는 병수의 술주정을 듣고 섰던 밤, 명규는 알았다.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악연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