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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주는 센 척을 하고 싶었지만 무언가 영혼을 옥죄어 오는 섬뜩한 느낌에 눌려 입을 다물었다.
“꽤 간이 큰 녀석인 줄 알았더니 전에 깝치던 것들이랑 비슷하군. 몇 천 년 동안 네가 처음일 줄 알았느냐? 자살령들은 이승에서 제대로 배운 게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니까… 또 골치 아픈게 들어와서 내 할일을 늘여놓는군.”
여전히 어둠속이지만 끝도 없이 긴 얼굴, 이상한 갓… 얼굴 한 가운데 뚫린 역겨운 눈… 저것은 처음 보는 것이 아니다. 죽었던 날 한주를 거두러 온 그것과 닮았다.
“그래, 너를 수거하러 왔던 그 뜨내기 계약직보다 난 좀 급이 위지. 알아보는군. 난 훨씬 나은 대우를 받지만 대신 그만큼 너 같은 것들이 애 먹이면 책임을 져야 하는 뭣 같은 직책이기도 해. 넌 좀 애매한 종류지. 태어날 때 부터 희한하게 정해진 번호가 없었거든. 그건 뭐랄까… 태어나지 말았어야, 혹은 태어날 수 없는… 혹은… 태어나자마자 죽게 되어 있는 그런 경우인데 그런 것 치곤 꽤 오래 살아와서 곧 번호가 발부될 판이었지. 그런데 스스로 목숨을 버렸으니 너는 어떻게 보면 안 지어도 되는 죄를 지은 이상한 종류라 너 때문에 회의를 세 번이나 하던 참이었어. 이런건 특별 케이스로 받아줘야 하는거 아닌가 하고… 그런데 그 새를 못 참고 일을 저질렀군. 아무도 다치지 않고 너 하나만 제대로 사라지게 될 참이었는데 말이지…”
“… 나를 데리러 왔던 그 괴물은… 아무 말도 안 해줬어…”
“흐하하하하하.
저승이 나은 이유.
아무리 몇 천년짜리 형을 받아도 저승에선 만기란게 있어. 구천에 갇히면 몇 백 년을 기다려도 뜰 수 있을지 없을지를 몰라. 차이를 알겠나? 기약할 수 없는 것. 기대할 수 없는 것. 기다릴 것이 없다는 것. 이것이 바로 가장 큰 형벌임을? 조용히 백 일을 기다렸어야 하는데 그건 글렀군. 너는 이미 인간사에 주제넘게 너무 많은 손을 담궜어. 그나마 네가 지옥을 가려면 이젠 수가 없다. 와중에 하나를 쓸데 없이 살려내기까지 했으니… 백일날 그믐달이 지기 전에 다른 목숨을 살릴 목숨 셋을 달고 와. 그 영 셋이 구천에 풀리는 날 너는 지옥행 배를 탄다.”
“… 그러지 않으면?”
“훗.
여전히 질문이 많군. 별로 대답하고 싶진 않지만 꼭 알아야겠다면… 목숨 셋 중 하나라도 모자라면 너는 갇힌다. 영원히… 적어도 몇 백 년이 넘은 나무 혹은 돌에… 그것에 너를 살리고자 하는 인간의 피가 닿지 않는 한 너는 영원히 그곳에 남는다. 움직일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이… 다시 살아날 수도 없고 무엇이 될 수도 없이… 그것은 지옥보다 몇 배는 더한 고통이란 것을 곧 알게 된다.
잊지 마라. 꼭 셋이다. 아무 목숨이 아니라 다른 목숨을 살릴 목숨이어야 한다. 웬만하면 해내기를 바란다. 너 같은 영을 하나 영겁에 가둘 때 마다 내 에너지 소모가 꽤 되니까… 그런 일이 생기면 너는 나의 무거운 저주를 받아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에 잘수도 살수도 없이 기약 없는 고문을 당해야 할거야.
다른 방도가 하나 더 있지만 그건 말해주나 마나 한 것이니 생략한다. 인간들은 절대 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인간이 아닌 구천영은 더 못 할 짓이고.”
“잠깐!!
너무 불공평하지 않나… 나는 내가 그런 벌에 처하게 될 줄 알고서 그런 짓을 한 건 아니다. 그런데 마치 내가 그런 짓을 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양 이제야 나타나서 그런 이야기를 해 주는건 이미 계획했던 것 아닌가!!”
“후훗.
영 바보는 아니군. 그래… 번호표가 없는 놈이 목숨을 던졌을 때 예외로 건져 주자고 하는 이상한 동정심을 가진 사신들도 있었지. 번호표 없이 강 이쪽으로 급하게 태워 보낸건 사실 우리 실책이니까. 하도 일이 많아 그런 것 까지 위에서 들여다보진 않지만 가끔 우리도 감사라는게 뜬 단 말야. 간 작은 놈들은 그런 것 때문에 겁을 내지. 그래서 티 안나게 번호표 없는 놈이 이승생에서 어느 정도를 채우면 살짝 원래 주어야 했던 번호표를 늦게 빼돌려 달아주기도 하거든. 대신 그 번호표였던 놈이 장부에 적힌 대로가 아닌 사고로 죽어야 가능하긴 하지만 말야. 그러면 그 놈을 구천에 두고 그 놈 번호표를 바꿔치기하는 식인데… 그런 의미에서 넌 사실 우리가 잘만 봐주면 어차피 번호표 없던 놈이니 지옥이니 연옥이니 법정엔 못 들어가도 어디든 구겨 넣어줄 순 있었지.
실책으로 나온 무번호생이 돌아댕기고 있을 때 번호표 쥐고도 자살하는 것들은 우리한테 참 고맙지. 우라질. 그래서 내가 미나 번호표를 요긴하게 쓸려고 했단 말이다. 네 놈이 그걸 가로채는 바람에 내 실책으로 번호표가 없는 것이 아직도 이승에서 숨쉬고 있는데 이 시점에 재수없게 감사 뜨면 난 한직으로 떨어진다고. 그래서 네 놈을 그대로 두라고 한게 나다. 네가 갚아야 할 일이니까… 어차피 네놈은 그런 짓을 벌일 줄 알았기에… 너 같은 놈들을 자꾸 쉽게 지옥으로 넣어주니 일이 많아서 휴가란 걸 가 본 지가 250년 전이다. 신경 쓸 필요 없이 집어 넣을 때 좀 힘들어도 나무에 가두자고 내가 말했다. 좋아. 어렵게 셋을 죽이지 않고 구천을 뜰 방법을 하나 말해주지. 너를 위해서 가장 소중한 것 하나를 내놓을 영혼을 찾아라. 그 영혼이 심장을 돌게 하는 소중한 것을 너로 인해 내놓는다면 너는 비로소 죽을 수 있다. 죽어야만 다시 살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나무에 갇히면 너는 영원히 죽지 못한다. 죽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인지 이미 맛을 보는 중이니 알겠지… 안됐지만… 가장 쉬운 상대는 너를 낳은 어미지. 무엇이든 내놓을 만한 너를 위한 유일무이한 존재. 하지만 너는 그것조차 갖지 못했으니 거의 불가능한 수를 내가 장황하게 늘어놓았군. 뭐 그래도 또 비겁하다는 소리를 떠들어대기 전에 규칙은 이제 다 말한 셈이다. 그러면 백일째 그믐날 밤에 보겠군.”
쥐어 뜯을 듯 옥죄어 오던 통증이 사라져나가는 것을 느끼는 순간 한주는 사신이 떠나고 있음을 알았다. 겨우 목을 쥐어 짜 다시 그를 필사적으로 부른다.
“잠깐!!
그 번호표가 없는 인간을 거두면 되는거 아닌가? 왜 골치아픈 존재를 보고만 있지?”
“거참… 귀찮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