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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신장은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주가 스스로 번호표 없는 영을 없애는 길을 묻기를…
“강 이쪽으로 이미 밀어내 버린 무번호표영은 스스로 목숨을 버리거나 너 같은 구천영이 지옥갈 작정하고 뭔 짓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 방도가 없어. 그건 천리에 위배된다고. 그런 짓을 했다간 위에서 바로 알아. 그런 짓을 하면 내가 나무에 가둬질 판이라고.
아… 넌 이미 악령이 되어가고 있으니 할 수 있겠군. 좋아. 거래를 하지. 그 것이 더 살수록 악기가 뻗쳐서 감사 뜨기 전에 이미 위에서 알아채게 생겼거든. 그러면 정말 곤란해… 내가 요즘 그것 때문에 술 없이는 못 지내. 그래, 좋아! 그 영을 거둬. 그러면 깔끔하게 이 구질구질한 구천에서 꺼내주지.”
“그게 누구요!”
“그건 네가 찾아내야지. 찾아낼 힘이 생기기 위해서도 넌 하나를 죽여야 하고 그것을 상대하기 위해서도 하나를 더… 그리고 그것을 이기려면 결국 누군가가 너를 위해 가장 아끼는 것 하나를 내놓아야 한다. 흠… 말해놓고 보니 이러나 저러나 불가능하군. 흐흐흐… 뭐 알아서 해봐.”
“인간인데… 내가 상대를 못한다??”
“그것은 번호표 없이 태어나서 인간을 지금까지 셋 죽였지. 그것도 혈육들을… 그래서 악질중 악질이라는거야. 인간 법에서도 패륜이 최악이듯이 그건 여기서도 그래.
아마 곧 더 죽일거야. 그러면 더 세지지. 번호표가 없는 것들에겐 지옥에서 탈출한 악귀들이 붙거든. 그것들은 이승의 생을 뺏으면서 강해지지. 그것은 지금 거의 숙주일 뿐이야. 등에 올라탄건 오천살도 더 된 지독한 놈이야. 여기까지.”
한주는 다시 붙잡으려 해 보았지만 이미 어둠은 걷혔고 윤조네 집 근처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었다. 새 소주병을 따면서 주정뱅이 영이 말을 걸었다.
“에헤이… 완전히 맛이 간걸 보니 사신장이라도 독대했나보구만. 드디어 어떻게 지도편달을 좀 받았는가?”
바로 옆 노숙자의 소주를 훔친 모양 코가 빨간 늙은 노숙자가 빈 소주병을 마구 흔들어대고 있다.
“아니 한 방울도 없는 걸 보니 다 처마셨나 본데 왜이리 정신이 멀쩡하지? 우씨 이것들 물타서 판거 아냐!!”
“저렇게 지가 지를 못 믿는 상태가 되면 그냥 죽는 게 나을수도 있지. 구천을 떠도는게 저거보다 못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갑자기 기분이 좋구만?”
소주를 도둑맞은 줄도 모르고 성질이 난 노숙자를 보고 낄낄대던 주정뱅이 영은 한 입에 소주를 다 털어넣었다.
“… 시끄러워… 죽여버릴까…”
“아따… 무슨 말을 그리… 난 이미 애저녁에 죽었당께.”
“… 아저씨는 자살도 아니고 번호표도 있는데 왜 계속 구천에 있는거죠?”
“아… 그런 복잡시런걸 훅 묻다니… 후… 담배 없는가? 아씨 아까 그 놈한테서 담배도 좀 가져올걸… 그러니께.. 뭐 이제 웬만한건 다 알아낸거 같으니께… 나는 그러니까 뭐시냐… 그짝한테 묶여 있지라… 그짝이 그짝 어미의 한을 풀고 그라면 그짝 에미가 그 뭐시냐 그니까 연옥이든 어디든 좀 가고! 지금은 그짝 에미도 불체중이걸랑. 새끼한테 미련이 남아갖고… 아주 골치 아픈 스타일이야 거기도. 그러니께 그 골치아픈 그짝 어미가 이 바닥을 뜨겠다고 하면서 나를 어찌 좀 봐주면 나도 가게 되어 있지. 뭐 물론 난 지옥에서 엄청 썩어야겠지만서도. 어여 가서 좀 썩고 싶어. 그래도 지옥은 시계라도 돌재. 구천에서 몇 천년 있어봤자 하나 소용 없드라고.”
“그러니까… 아저씨가 우리 엄마를 죽게 했는데… 왜 한은 내가 풀어줘야 합니까?”
“그게 원래 자식과 어미는 한 몸이라 본인 한은 본인이 풀어야 하는디 알다시피 어매가 운신이 힘들잖어. 바다에 처박혀 있어서 무당 몸 안 빌리면 말도 못하는데 무당 몸 들어가서 그런 짓 했다가는 진짜 벌 받걸랑. 귀신은 산 사람 조종하는 순간 악령으로 낙인 찍히는거여. 그러면 나무에 갇힐 때 까지 쫓겨야 혀. 그랑께 자신이나 마찬가지인 자식이 해줘야재. 마침 또 자식이 자살해서 나쁜 쪽으론 힘도 센 구천영도 되었고 말여.”
“제기랄… 뭐 하나 받은 것도 없고 받을 수도 없는 엄마 한은 내가 또 풀어야 한다고? 정말 말이 되는게 하나도 없군.”
“그라게… 그게 또 아마 거슬러 풀어보면 그짝이 또 어매한테 빚진게 있을거라. 그리 따져쌌지 말고… 다 이유가 있겠거니 하고 할 일 허소. 시간이 무진장 많은게 아닝께. 나무에 갇히는 이야기 들었재? 아고 진짜 끔찍하지… 그거 피할라고 도망다니다가 인간 몸만 들락거리면서 악령이 되는 경우도 봤어. 그건 못할 짓이잖어?”
한주는 이제 바라봐도 감흥도 없는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죽으면 별이 될 것이라 생각해본 적은 없어도 죽고 이리 복잡한 세계가 있는 줄도 몰랐다.
“… 그 끔찍하다는 나무에 갇히는 벌을 피하려면 난 지금 해결해야할 난제가 있는데… 아무래도 생모 한 따위는 풀 시간이 없겠어요. 안됐지만 아저씨는 계속 구천에서 노시는걸로…”
“고로코롬은 안되제!!”
노숙자가 새로 사 온 소주를 또 슬쩍해서 병나발을 불던 주정뱅이 영이 갑자기 정신이 멀쩡한 모양 소리를 버럭 질렀다. 본 적 없는 무서운 얼굴을 하고…
“아 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에요. 심장마비 걸릴 뻔 했네…”
“또 죽을 일은 없응께 없는 심장 타령은 하지말드라고!
나를 구천에서 건져 주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간단히 말해주지. 방금 자네가 이제사 알게된 숙제가 뭔지 나도 알고 있어. 놀래지마. 나 이래뵈도 사신장이 이짝 세계 연통으로 쓰는 중차대한 인물인께. 그 어럽디 어려운 숙제를 해결할라믄 절대 니 혼자는 몬해. 니는 반드시 내 도움이 필요하니께. 내 도움을 솔찬케 받아 써먹을라면 나도 뭐 중요한 거 하나쯤은 받아야겄제? 그래서 나는 지옥행 티켓을 그짝 도움으로 좀 얻어야겠다… 이말이시. 뭐 이미 한바탕 들어서 대충 알겠지만서도 사신장은 네가 얼른 눈에 안 띠는데로 꺼져야 다리를 뻗고 자게 생겼고 니 말고 그 번호표 없는 괴물도 없애야 하니까 너를 이용하겠다는 거여. 역시 동네 통장 이상 장 자리들은 머리가 좋아야 하는건가벼. 지 손 안대고 너 이용해서 일석이조로 처리하겠다… 이거 아녀 지금. 그란께 내일부터 싸게싸게 움직이자고. 걱정말어. 니 어미 한을 푸는것도 그 숙제 해결하는 일단계니께.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말어. 귀신이 되면 없던 이해력도 생기는 법이여. 내일부터 착수해보면 대충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할거여. 실이 막 엉켜 있을때는 말이여, 끄트머리부터 차근차근히 잡아서 따라나가야 하는거여. 중간에 맴이 찢어지는 일이… 뭐 하긴 그런게 있을리가 없겠지만서도… 여튼간에 그저 내가 동앗줄이라 생각하고 내 말을 매우 명심하면서…”
주정뱅이영은 한참을 떠들고서야 한주가 이미 사라지고 없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런 염병할… 요새 것들은 당최 예의가 없어.”
“아니 뭣이여… 대체 방금 땄는데 소주가 어디로 간거여!! 이런 니미럴!!”
주정뱅이영은 두 병째 소주를 잃어버리고 허공에 소리를 질러대고 있는 노숙자를 바라보다가 그의 허리춤에 남아 있던 마지막 담배도 훔쳐서 노숙자 옆에서 한 대 피기 시작했다.
“… 미안하게 되었수. 벼룩의 간을 빼먹어서… 뭐 어치피 구천에 곧 들어오시게 생겼구만… 들어오면 내 잘해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