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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혜가 지옥 같은 집을 탈출하고 몇 년 후 명규는 무작정 십 년 전에 그들을 버리고 도망간 엄마를 찾아갔다. 그녀는 사촌 시동생이었던 남편과 새로 아들을 낳고 꽤 잘 되는 빵집을 운영하면서 잘도 살고 있었다. 마치 언젠가는 찾아올 줄 알았단양 놀라는 기색도 없었고 마치 준비했던 것 처럼 매몰차게 명규를 내쳤다. 기댈곳이라곤 없던 명규가 포기하지 않고 자꾸 찾자 결국 빵집 옆의 작은 방을 내어주고 일할 수 있도록 거둬준것은 그녀의 남편 조 상섭이었다.
“그 망할 놈의 씨 받은 놈은 왜 거두는거냐고! 무슨 사단이 날라고.”
“그래도 조카고 당신 아들 아냐. 어떻게 그렇게 모질게 해. 이미 한 짓거리로 치면 우리는 죽어서 지옥 가는거 보장이지만… 여기다 더 얹으면 그 감당을 어찌할라고… 콜록, 콜록”
못 본 몇 년 사이 조 상섭은 지병이라도 얻었는지 마른 기침을 달고 살았다.
“왜 또! 그 놈의 우라질 병도 죄 받은거라는 18번은 왜 안 읊어!”
명규의 어미 신 정애는 눈이 맞아 도망갈 만큼 정을 줬던 상섭도 개 부리듯 구박을 하기 일쑤였다.
“버린 서방보다 몇 살이나 어리면 좀 더 팔팔해야 할거 아냐? 그치나 이치나… 아이고, 이놈의 팔자.”
“어차피 우리가 먹여 살리고 학교 보내줄 나이도 아니고, 가게 일도 잘 하고 기술도 좋은데 뭐가 그리 눈엣 가시라고 못 쫓아내서 안달인겨…. 콜록 콜록”
“아 그 미친 놈이 지 새끼 핑계대고 찾아 나설까봐 그러지! 골치 아프게…”
하루 매상을 정리해서 안 집에 밤마다 가져다 줘야 하는 것도 명규의 일이었다. 들어서기 전에 내외의 싸움을 밖에서 듣던 명규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럴 일 없어요… 어차피… 죽었으니까…”
두 내외에게는 금시초문이었다. 고향을 떠난 뒤 일절 소식을 끊고 살았던 그들은 조 병수가 죽었다는 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아마 그날 밤 그들은 오랜만에 발을 뻗고 잤을 것이다.
조 병수는 죽은지 몇 달이나 지나서야 방구석에서 혼자 썩어가다가 발견이 되었는데 도박빚에 농약을 타 먹었다는 소문이 있었을 뿐 누구도 그가 정확히 어떻게 죽었는지 혹은 그의 자식들은 어찌 되었는지에 관심 조차 없었다.
조금만 들여다보면 인과가 보이겠지만 사람들이란 증가나 개연성 등을 운운하면서 근거를 찾게 마련이다. 배우고 못 배우고의 차이가 아니라 대부분 그런 것들은 상식이라 찜찜하게 걸려도 혼자만 앓게 된다. 정애는 상섭의 이유도 없는 기침이 명규가 들이닥치기 얼마 전 부터란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매일 밤의 악몽도 그 때 부터란 것 또한… 그것은 조 병수였다. 입에서부터 흘러나온 더러운 피로 칠갑을 한 마른 가지 같은 병수가 눈을 감을 때 마다 또렷하게 보이고 목을 조여 와 제대로 못 잔 것이 몇 달 째. 먹어도 살이 마르고 신경이 예민해져 원래도 사근하지 못하던 성격은 광포해져 갔다. 잠들면 또 만날 것이 뻔하지만 그날도 지쳐 결국 눈을 감았던 정애는 처음으로 병수의 소리를 들었다. 늘 나타나 죽일듯 노려보기만 하던 병수는 그날 밤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뭘 그리 잘못해서 새끼한테 죽임을 당해? 나보다 더 악랄한 네년은 이렇게 잘 먹고 잘 사는데? 나는 억울해서 어디 들어가지도 못해! 이렇게 계속 네년놈들 빨아 먹으면서 견딜거야! 흐흐흐흐… 평생 서방복이 없는 것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마!”
조 병수가 밤새 욕지거리로 괴롭힌 이후 정애는 상섭보다 더 몰골이 말라갔다. 정애는 명규가 병수의 막걸리에 농약을 탄 후 집을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고서 명규를 더욱 멀리했다. 어려서 잘 웃었던 명규는 지금도 잘 웃지만 그 미소는 어딘가 모르게 소름끼치는 그것이었다. 정애는 이미 명규가 제 배를 앓아 낳은 친 아들이란 것 조차 잊기 시작했다. 가겟돈을 혹시 빼돌릴까봐 상섭보다 더 악착같이 명규를 조이던 정애가 매일 밤 명규가 장부를 가지고 올 때에도 방문을 걸어잠그고 알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면서 이불 속에 숨어 있는 바람에 결국 빵집은 점점 명규가 알아서 운영하기 시작했고 오히려 상섭이 돌볼 때 보다 더 잘되기 시작했다.
“이 새끼가… 당장 꺼져. 누가 그 방에 들어가랬어!”
여전히 명규는 빵집 옆 작은 방에서 기거했는데 쉬는 날이건 영업을 마친 시간이건 어디 가는 법 없이 항상 그 방에 들어 앉아 걸어잠그고는 꼼짝을 안했다. 집에 가 봤자 아프고 정신 나간 부모와 있어야 하는 것에 질린 덕수는 형이랍시고 있는 명규를 찾아갔지만 번번히 쫓겨났다. 분명 무언가를 숨기는 것이 어린 덕수 눈에도 빤했으나 덩치가 두 배는 크고 나이도 훨씬 많은 명규를 속일 방법은 없었다.
타고난 솜씨로 명규는 새로운 빵을 자꾸 만들었고 원래도 잘 되던 상섭의 빵집은 아침부터 손님이 줄을 섰는데 희한하게 명규는 정신이 반쯤 나간 주인 부부에게 가게가 곧 망할 것 같다는 소리를 했다. 그런 명규가 의심스러워 덕수는 명규가 없을 때 마다 방문 앞을 기웃거렸으나 자물쇠만 더 늘어 있을 뿐 한 번도 열린 적이 없었다…
“구천이 지옥보다 지독한 이유를 아는가, 꼬맹이?”
죽어서도 두통이 있을수 있다는 것이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한주는 윤조에게 들렀다가 다시 미나가 누워 있는 병원을 가려던 참이었다. 잠시 정신을 잃은 것은 그때 그 버스 정류장 근처였는데 눈을 떠 보니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속에 갇혀 있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갈라지고 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이 들자 머리를 도끼로 쪼개는 듯 아파온다.
“훗… 이건 또 뭐야. 드디어 지옥이라도 갈 수 있는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