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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두고서 떼는 뒷걸음

(13)

by Hazelle

김 대리라는 사회적 이름 말고 본명을 갑자기 불렀더니 여자가 화들짝 놀랜다. 갑자기 깨달았다. 사랑을 할 수 있는 사이란 이렇듯 호칭부터가 달랐어야 한다는 걸… 그리고… 우리는 김 대리, 한 대리로 만난 사이라 여간해선 어렵다는 것을…


“사무실 아니잖아.

내가 훨씬 나이 많으니까… 아, 우리는 장유유서라는 정서가 흐르는 한국인이니까… 사적인 일로 같이 있으니 사적인 이름 부를게. 윤조야, 내가 지켜봤던 윤조는 강한 사람인데… 맞지?… 그렇다고 믿을게. 지금 여기에 대만이 있어…”


“네?? 어머…”


여자가 불에 덴 것처럼 놀래면서 갑자기 자세를 고치고 주위를 급하게 두리번거린다. 감출 수가 없는 것이다… 감출 수 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겠지.


“여기 말고… 하지만 이 호텔 안에 있어…”


“… 정… 말이예요?”


아뿔싸.

호텔방에 남자가 지금 머무는 중이라는 이야기를 밑도 끝도 없이 들었을 때 정상적인 보통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것이 하나란 점을 간과했다. 여자는 이미 혼자 결론을 들은 양 놀란 표정과 함께 벌써 두 눈 가득 양동이 인양 물을 넘치게 담았다.


“아…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고… 사실은… 하… 모르겠다. 볼 자신 있어?”


“… 네.”


잠깐 침묵하던 여자가 보일듯 말듯 고개를 끄덕인다. 결국 속이 시원한 쪽을 택한 모양이다.


“그래… 그럼… 잠깐만.”


한 대리가 나지막이 한숨을 쉬더니 핸드폰을 마지못해 열었다. 어디론가 전화를 한다.


“어… 로비야. 몇 호? 알았어. 곧 올라갈게.”


나이아가라 폭포를 코 앞에서 봤을 때 보다 더 경이로웠다. 그토록 죽은 사람 마냥 전화를 받지 않던 남자가 사촌 형의 전화는 몇 번 울리지도 않아 금방도 받았나 보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멍하게 한 대리를 바라보는데 그도 내가 왜 그리 얼이 빠졌는지를 잘 아는 모양 멋쩍게 뒷목을 몇 번 만지더니 어정쩡하게 일어섰다.


“괜찮지? 갈까?”


대답 대신 큰 한숨을 한 번 쉬고 자리를 떴다. 대체 호텔방에서 뭘 하면 사촌 형이 올라간대도 흔쾌히 맞는 걸까. 금방 마주하게 될 진실인데도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아 궁금함을 넘어 불안하기까지 했다.

아마… 그것은 인생에서 가장 느린 혹은 가장 빠른 엘리베이터였다. 맨 처음 남자가 무턱대고 같이 저녁을 먹자고 회사로 찾아온 날이 떠올랐다. 그때… 남자를 만나러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하나도 설레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은 모르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도 아닌데 심장이 너무 뛰어 금방이라도 입을 열면 튀어나올 판이다.


“대리님, 저 손 좀 잡아 주세요.”


뜬금없는 이상한 요청에도 한 대리는 전혀 당황하는 기색 없이 큰 오빠처럼 손을 꼭 쥐어 준다.


“제가 뭘 보게 될 건지 말씀 안 해주실 거죠?”


그는 대답 대신 애매하게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조용하고 묵직한 분위기의 복도를 따라 걸어가다 어느 방 앞에서 한 대리가 멈췄다. 문 앞에서 잠깐 망설이더니 무거운 손을 들어 벨 대신 노크를 한다. 방음이 잘 되는 건지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한 대리가 다시 노크를 하려던 순간이었다… 문이 열린 것은…


육중한 문이 소리도 없이 열리고 기대했던 대만 대신 처음 보는 남자가 조심스럽게 반쯤 열린 문 사이로 나타났다.


“무슨 일이시죠?”


마르고 왜소한 몸에 사뭇 어울리지 않는 저음의 목소리다.


“장 대만 잠깐 보러 왔습니다…”


한 대리의 대답을 듣고도 남자는 섣불리 문을 열지 않고 망설이다 마지못해 우리에게 길을 내주었다.


“잠깐 기다리세요.”


호텔 스위트 룸은 처음 와 보는데 꼭 무슨 아파트 같다. 이 와중에 영화에서나 보던 맨해튼 아파트를 떠 올리다가 황급히 둘러보니 안쪽 거실처럼 보이는 곳에 원형 탁자가 놓여 있고 거기에 사람들이 둘러앉아 있는 것 같다. 방금 우리에게 문을 열어 준 남자가 안쪽으로 들어가느라 살짝 열어 둔 미닫이 문틈으로 보이는 것은 남자 몇몇이 둘러앉아서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것 정도였다.


“최 선생, 누구야? 우리 아직 야식 안 시키지 않았나?”


처음 듣는 목소리인 걸 보니 대만은 아니다.


“장 선생! 누가 찾아왔는데?”


“잠깐 기다리라고 해. 이 판이 끝나야 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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