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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두고서 떼는 뒷걸음

(12)

by Hazelle

아무리 연말이라 막혀도 종로에서 남산은 가깝다. 호텔 정문에 도착한 택시에서 내리자 한 대리가 아무 말 없이 앞장을 선다. 거침없이 앞장을 서는 한 대리를 뒤에서 잠시 멈춰 바라보니 프런트 쪽도 엘리베이터 쪽도 아닌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무슨 심각한 이야기길래 이 시간에 호텔 커피숍까지…”


“조용하고 좋잖아. 여기 간단하게 요기할 수 있는 샌드위치 같은 것도 파는데 먹고 싶은 거 없어?”


“괜찮아요. 커피 한 잔이면 충분해요.”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얼마나 묵직하게 전할라고 웬만한 동네 탕수육 값만큼 비싼 호텔 커피를 사 주는지 모르겠다.


“아까 편의점에서 커피 마셨잖아. 몸에 좋은 거 먹어… 아, 여기 키위랑 사과같이 갈아서 두 잔 갖다 주세요.”


가끔 사람이 잘 자랐다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잘 자란 사람이란 사실은 기본적인 것을 잘 알고 그대로 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어느 정도가 적당한지 알고 있는 것, 또는 모든 것에 기본적인 예의를 갖고 있는 것, 내가 아는 적정 수준을 나뿐 아니라 다른 이에게도 부드럽게 권유하는 것, 그리고… 내가 갖는 보통의 감정을 상대도 가졌음을 충분히 인지하고 그의 감정도 헤아려 이해해 주는 것… 까지 포함된다. 그래서 한 대리는 잘 자란 사람이었다.


“김 대리… 나 오늘 아니… 사실 어젯밤부터 진짜 머리가 터질 것 같았어. 아니다… 아예 처음부터… 김 대리가 내 이종사촌 동생한테 빠졌다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참 마음이 불편했어. 그런 생각까지 했었어. 같은 사무실에서 일해야 하는 사이더라도 내가 확실히 적극적으로 대시를 할 걸 그랬다… 뭐 그런 생각… 휴… 왜냐면… 왜냐면 말이지… 어쩌면 이렇게 짧게 끝날 줄 알았고, 아무리 짧아도 내가 아는 김 대리는 상처받고 꽤 오래 힘들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했거든. 이유도 없이 연락이 두절된 지 좀 되었지? 이제 그냥 그만해…”


“그 그만해야 하는 이유를 따로 말해주려고 오늘 저 보자고 하신 거 아니에요?”


“… 맞아. 그런데… 알고 끝나나, 모르고 끝나나… 이별에 종류가 있는 건 아니잖아. 그냥 모르고 끝나는 게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 진짜… 딴 사람이 생겨서 그런 거래요? 그렇다면 저한테 직접 말하라고 하세요. 어떻게 그렇게 금방 딴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느냐는 유치한 패악질은 떨지 않을 테니…”


“… 꼭 알아야 접겠구나… 김 대리는… 그 말이 맞네…”


누구의 말이 맞다는 건지… 하지만 지금 이 본문에서 그런 작은 의견을 누가 냈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어떤 말을 해도 결국은 직접 보거나 들어야 확실히 끝을 내겠다는 거지?”


“네. 둘이서 했어요. 좋아서 만나는 거, 같이 밥을 먹고 여행을 가고… 어두운 밤 가로등 밑에서 추위도 모르고 봄처럼 웃을 때도… 그 사람이랑 나랑 둘이 했다고요. 그런데… 헤어질 때는 나 혼자 한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그렇지… 진짜 듣다 보니 비겁한 자식이네…”


한 대리는 거의 처음으로 할 말을 찾느라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하기 힘든 말이라도 해 주세요. 이미 한 대리님도 알고 있는 거라면 제가 모르는 건 더 말이 안 되니까요…”


“휴… 알았어. 어차피 그럴 각오로 오늘 김 대리랑 따로 나온 거니까… 그냥… 막상 말을 해주려니까 차마 입이 안 떨어져서…”


“맞아요? 다른 사람 생긴 거?”


한 대리도 윤조가 이러는 것은 처음 본다. 불 같은 사랑을 믿지 않는 엘리트 직장인 한 대리가 한 때 윤조를 적당하게 보았던 이유는 그녀가 꽤 비슷한 종류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안전하고 안정적인 삶을 지향하는 둘이 잘 맞추어 나가면서 은근하게 식지 않는 정을 쌓으며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었다. 언젠가 아들 머리는 모계 유전이라는 기사가 화제였을 때 나이 찬 또래의 대리들이 농담처럼 김 대리를 거론하며 좋은 아내, 엄마가 될 여자라며 수긍했듯 그녀는 여러 가지로 ‘적당했다’. 일 년을 보아 오면서 단 한 번도 흐트러지는 것을 보인 적 없던 여자다. 파견 나온 첫날부터 묵묵하고 성실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까다롭고 보수적인 상무에게도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어째서 남자 친구가 없는 걸까 남직원들끼리 뒤에서 여러 번 쓸데없는 토론도 있었다. 데이터베이스를 기가 막히게 짜는 친구니 아마 남자도 그만큼 철저한 검산 끝에 고를 것이라는 나름의 결론을 모았었는데 그러던 그녀가 어느 날 낯선 모습들을 보이기 시작했다. 사랑이라는 것에 빠지더니 감추지를 못 했다. 침착하고 냉정했던 김 대리는 사라지고 하루 종일 윗 볼을 발그스름하게 밝힌 채 저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다 수시로 핸드폰을 열었다 닫았다 하고 봄도 아닌데 화장이 화사해졌다. 그런 그녀를 매일 지켜보는 것은 조금 놀라웠다. ‘적당했던 그녀’가 사랑에 빠지니 사랑스러워 보였기 때문이랄까. 그렇게 빨리도 익어가는 것을 보았지만 그 상대가 이종사촌 동생인 것은 참 얄궂다. 김 대리의 볼에 홍등을 단 자가 대만이란 것을 알자마자 따로 연락을 했었다. 막다른 골목으로 같이 데리고 들어갈 거냐고, 아니면 모르는 채로 데리고 갔다가 혼자 돌아 나오게 할 작정이냐고… 굳이 신경을 쓸 이유는 뭐냐고 묻는다면 딱히 할 말이 없었지만 그녀가 사랑을 숨기지 못하듯 그런 그녀가 신경이 쓰이는 것 또한 감출 수 없었다. 여러 번 다그쳐도 입을 닫던 대만이 결국 며칠 전에 연락을 해 왔다. ‘세상 사람 모두 공감할 지독한 이별의 이유’를 만들 테니 협조하라고… 시험계획을 세워 공부를 하던 것처럼 이별도 계획하는 놈이라고 욕했지만 어려서부터 철이 일찍도 나서 동생이라도 껄끄럽기만 했던 놈이 태어나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것에 빠져 자꾸만 미적대는 모양을 보이는 것이 사뭇 마음이 아팠다. 그는 ‘이별이 두려워 미리 이별하는 거’라며 이 계획된 이별의 이유를 댔다. 두 번 세 번 읽어도 감이 잡히지 않는 난해한 시의 마지막 연 같은 소리지만 또 희한하게도 그냥 절로 이해가 되기도 한다. 살면서 누구랑 누구를 소개한 적은 몇 번 있어도 이별에 가담하기는 또 처음이라 하루 종일 내가 이별하는 양 힘들었었다…


“… 다른 사람이 생긴 거라면? 깔끔하게 뒤도 안 돌아보고 차 버릴 수 있겠어?”


이 여자는 이별의 이유를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다.


“저 그다지 질척거리는 타입 아니에요. 마음에 제가 없다는데… 어쩌겠어요. 마음이라는 방은 관 사이즈라 원래 딱 한 명만 들어가는 거니까요… 쉽게 마음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그런 거라면 제가 아직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거겠죠.”


“그렇게 본인 탓을 하면 안 돼. 잘못한 쪽이 명백할 때는 그 편만 비난하는 거야.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나를 갉는 것은 옳지 않아. 그리고… 맞아, 그놈은 이제껏 쉽게 마음을 준 적은 없어. 내가 알기로도 마음에 들어온 여자는 김 대리가 처음이야.”


“아, 그럼 뭔데 이리 뜸을 들여요! 다른 사람이 생긴 게 아니라면… 뭐가 그렇게 이별의 이유가 된대요? 무슨 범죄자예요? 아님 시한부래요?”


결국 인간이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궁금증인가. 아니면 실낱 같은 희망일까. 다른 여자가 생긴 건 아니라니 여자는 여전히 닦달을 하면서도 순간 얼굴 한켠에 다시 홍등이 켜진다. 갑자기 더 마음이 쓰려온다.


“… 윤조야…”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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