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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두고서 떼는 뒷걸음

(14)

by Hazelle

대만의 목소리가 드디어 흘러나왔다… 그의 목소리다… 그토록 듣고 싶었던… 나도 모르게 걸음이 옮겨지고 있었다. 뇌가 명령하기도 전에 발이 먼저 움직인 것은 태어나 처음이다. 그 몇 발자국을 걸으며 다행이다… 그가 온전히 거기에 있다, 또는 세상 누구보다 밉다. 저렇게 멀쩡하면서 나에게만 존재하지 않았던 그. 대체 무엇을 하는 중일까… 하는 터질듯한 궁금함… 그래, 그것은 길지 않았다. 짧디 짧은 그 순간이 그저 멈춘 듯 길게 느껴졌을 뿐… 넓은 스위트룸은 커다란 응접실이 두 개나 있었고 그 중간은 예스러운 느낌의 미닫이 문으로 갈렸다. 조금 열린 미닫이 문을 아무 생각 없이 활짝 밀자 고풍스러운 가구들로 가득한 안쪽 응접실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한가운데 커다란 원형 탁자를 빙 둘러 남자 넷이 진지하게 앉아 카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게… 뭐지…?

기다리랬는데 밀고 들어오니 당황한 문지기 남자가 나를 향해 걸어오는 것과 동시에 대만이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섰다. 대만은 매우 난감해 보였지만 나만큼 크게 놀란 것 같지는 않다. 꽤나 전문적으로 짙은 녹색의 도톰한 천까지 깔린 탁자 위에는 미국 영화에서나 보던 칩들이 널려 있고 서로의 호칭을 보아 다들 의사인 듯한데 탁자 가운데 재떨이에는 꽁초산이 쌓여 있고 얼음이 다 녹아버려 잔뜩 물을 탁자에 흘리고 있는 위스키 잔들이 사람 수 대로 놓여 있다.


“김 대리, 거기 왜… 이 자식! 그런 독주를 마시면 어떡해!! 이러면 나 진짜 이모한테 말하는 수밖에 없어!”


한 발 늦게 발견한 한 대리가 더 당황하며 팔을 끌다 말고 사촌동생에게 벼락 같이 소리를 질렀다. 지금… 도박판에 있는 게 더 문제여야 하지 않나? 다 큰 성인이 위스키 좀 마셨다고 포커판에 앉아 있는 것을 제치고 이 정도로 화를 낼 일인가… 그런 걸 다 떠나, 대체 이 순간에 뭐라고 해야 하는 것인지, 화를 내야 하는 것인지, 울어야 하는 것인지 조차 모를 만큼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오빠… “


“어… 어. 일단 나가자.”


하나같이 충혈된 눈의 남자들이 신경질적으로 불청객들을 쏘아보고 있지만 내 눈에는 이 남자 하나만 지금 보인다.


“형도… 빨리 나가.”


대만이 일행들 눈치를 살피면서 한 대리와 함께 문 쪽으로 몰았다. 순식간에 그 은밀한 방에서 밀려 나나 싶더니 정신을 차려보니 다시 일층 라운지 커피숍이다.


“아직 크로와상 햄 치즈 샌드위치는 가능하다는데 이제 뭐 좀 먹을래?”


한 대리는 오늘 무슨 엄마로 빙의했나, 뭘 못 먹여서 안달이다. 이 상황에 대체 뭘 먹으란 건지…


“오빠, 그거 뭐야? 방금 내가 본 거?”


“… 눈으로 봤잖아. 그런데 왜 묻지?”


잠시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빤히 쳐다보던 대만이 가슴이 철렁하게 담담하고도 차가운 어조로 답했다. 남자가 뭐라 대답을 하건 화를 내고 울어버릴 준비가 완벽히 되어 있었는데… 그 차가운 한마디에 모든 것이 아득해졌다.


“… 그래, 봤어…. 봤는데도 혼란스러워서 묻는 거잖아. 오빠 친구 없다며?”


“어, 그 사람들 친구 아냐. 그냥 멤버일 뿐이지… 포커… 몰라?”


친구가 아니란다. 그러면 사교 게임이 아니란 건가…


“너 그 방에 지금 며칠째 있는 거냐?”


한 대리가 다그쳐도 대만은 별 표정에 흔들림이 없다.


“오늘이 3일짼가… 몰라. 밥은 거의 룸서비스시키고 졸리면 자고 그랬어서…”


“설마 사흘 내내 위스키 끼고 있었던 거 아니지? 야이 새끼야, 너 진짜 그러다가…”


한 대리는 또 술 이야기다. 잔뜩 화가 나서 급하게 소리를 지르던 그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내 쪽을 흘끗 보더니 아차 하는 표정으로 입을 닫았다.


“… 네가 본 대로 나는 포커를 하고 있었어.

친구가 아닌 멤버들이랑… 시간이 가는 것도 모르고 호텔방에 처박혀서…”


“그러니까… 지금 오빠가 도박을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야?”


“어. 걱정 마. 난 도박마저도 잘하니까…”


한 번도 본 적 없는 냉소적인 미소를 띠며 꼬인 말투를 쓰는 이 남자가 정말 낯설다.


“왜… 갑자기?”


“어째서 갑자기라고 생각하는 거지? 우리가… 그렇게 서로를 많이 알던 사인가? 만난 지 고작 한 달쯤인데? 그리고… 난 결혼할 생각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나?”


“내가 지금 결혼하자고 온 거야?”


“이해력도 많이 떨어졌나?

왜 와이프처럼 구는 거냐고 묻는 거잖아.”


“나… 여자 친구잖아. 아니야?”


“내 사생활까지 간섭할 수 있는 게 여자 친구라면 난 그런 거 없어. 너를 만나기 훨씬 전부터 하던 취미야. 말했잖아. 병원 쉬면서 그동안 못 해 본거 실컷 해 보기로 했었다고… 그중 하나일 뿐이야. 그 어떤 것보다 짜릿하고 스릴 넘치지. 나를 보고 싶으면 너도 같이 끼던가…”


“정말 왜 이래. 내가 알던 그 장 선생 맞아?”


“너야 말로 왜 이래. 채팅방에서는 그렇게나 쿨하고 남자 따위는 신경도 안 쓰는 것처럼 하더니… 왜 이리 현실에선 질척대니?”


“뭐?? 이게 질척대는 거라고? 정말… 할 말이 없다.”


“그래. 그게 맞지. 할 말이 없어야지… 그럼, 난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서 먼저 일어설게. 형이 잘 데려다줘.”


“미친놈… 너 술 그만 마셔!”


이 정신없는 와중에 술 걱정만 해 대는 사촌 형과 충격에 몸을 가눌 힘도 다 빠진 여자를 남겨두고 그는 정말 일어섰다.


“가지 마…”


“… 왜?”


“하나만… 물을게. 그럼 내 전화 안 받은 것도 다 저거 하느라고 그런 거야?”


“그렇지… 매너가 아니잖아. 같이 게임하는 사람들한테…”


갑자기 언젠가 만화방에서 강일이 한 말이 떠올랐다. 전화를 했더니 도둑놈 목소리로 받더라며… 영혼이 빠져나간 듯 머릿속이 하얘졌다. 도박이라니… 상상조차 해 보지 않았었다. 정신을 겨우 차렸을 때 대만은 이미 사라지고 한 대리가 세상에서 가장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한참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 대리님… 알고 있었어요?”


“… 처음부터 내가 말렸잖아…”


“이것 때문에요?”


“그게 애매했지. 딴 사람도 아니고 이종사촌이라… 우리 외가 쪽이 우애가 깊어서 어렸을 때부터 이모네와 가까웠거든. 말해주기도 참 그렇잖아. 내 얼굴에 침 뱉는 것 같고… 인생 허무주의자라 어렸을 때부터 이룬 게 많으니까 저런데 쉽게 빠지게 되었나 봐. 쓰리겠지만 그냥 여기서 그만해. 김 대리. 그게 맞아. 봤잖아, 이미 식었어. 세상에서 카드보다 재미있는 게 없는 거야. 거기 같이 치는 놈들도 죄다 강남 출신 의사들이야. 사람이 많이 배웠다고 반드시 반듯한 건 아니라고. 중독은 누구나 될 수 있어… “


그러고 보니 처음부터 남자는 연락으로 속을 썩였다.

그때마다 이렇게 호텔방에서 도박을 한 걸까…

생각하면 분명 만정이 떨어 저야 하는데…


“진짜… 나쁜 인간… 오늘은 오백 원도 안 주고 갔네…

가요, 대리님. 저 졸려요.”


“오백 원? 무슨 소리야? 오백 원 내가 줘?”


“아니에요. 아무것도… 얼른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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