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 밤 이후,
현대판 노예, 세경 받는 직장인의 삶은 그대로다.
몸뚱이가 찢어지게 아픈 거 아닌 다음에는 키우는 개가 죽어도, 바닥을 치는 실연을 해도 밭은 매야 하고, 주인 눈치는 여전히 봐야 한다. 다행히 처절한 실연은 어떻게든 소문이 났고 보수적이지만 마음 여린 온실 속 화초 아저씨들이 전 보다도 더 따사롭다. 집에 일찍 가면 혼자 더 심란할까 봐 더욱 배려해서 일도 적절히 야근할 만큼 더 만들어주고, 회식도 더 자주 한다. 사랑은 잘 되어가도, 못 되어도 이렇듯 불편하다.
참 진부하게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 남자를 만나기 전날이나, 끝이 난 지금이나… 사실 그 얼마간의 짧은 기억만을 들어낸다면 나는 여전히 별일 없고 안정적인 파견 엔지니어일 뿐이다. 그런데… 그런 거 있잖아. 아주 힘을 빼고 흐리고 자신 없게 쓴 연필 글씨는 지우개로 힘들이지 않아도 잘 지워지지만, 확신에 차서 꼭꼭 눌러쓴 답은 아뿔싸 싶어 지워도 여전히 자국은 남는다는 거… 나는 오답을 너무 힘주어 눌러썼나 싶다… 지워내려 노력을 하는데 쉽지 않다. 이건 헷갈리는 답도 아니고 명백한 오답인데도 말이다… 종 치기 전까지 오답이 맞나 싶어 여전히 망설이는… 딱 그 꼴이다. 사랑이 진행 중일 때는 그렇게나 하고 싶은 것도, 할 일도 많더니 끝나고 나니 지우는 것 말고는 할 것이 없고 그 지우는 것이 어떤 것보다 어렵고 짜증이 난다. 의미도 없이 남자의 연락처를 그날 밤에 바로 지워냈다. 어차피 또렷한 머릿속 번호는 남았으면서…
복사기 앞에서 회의에 들어갈 자료를 준비 중인데 복사기라는 존재는 비싸건 싸건, 혹은 크건 작건… 원래 잘 작동하지 말라고 만든 기계임에 틀림없다. 오늘따라 일 하기 싫은 나를 닮은 복사기가 몇 번째 넣어 준 종이가 걸려 체했다고 켁켁거리는 걸 달래주고 있는데 그림자가 옆에 드리워져 돌아보니 안 부장이다. 손에 내 핸드폰을 들고…
“어머, 깜짝이야… 왜 이렇게 기척도 없이… 어머… 부장님, 우리 사장님 신발 훔쳤어요?”
사람이 일 있어서 슬프다고 내내 슬픈 건 또 아니란 것이 어쩔 땐 조잡스럽다. 세상 맨발처럼 편하다지만 일단 원래 발 사이즈보다 한 두 사이즈는 작게 보이게 하고 발 편한 거 찾아내는 기술자한테만 연봉을 너무 줬나, 디자이너는 삼류로 뽑아 쓰는 게 분명한 효도신발을 신은 안 부장이 무슨 물 위를 미끄러져 다니는 귀신마냥 옆에 서 있었다.
“아, 이거 김 대리네 사장님이 출장 갔다 오면서 상무님 선물로 사 온 건데 상무님이 발목이 나가도 불편하고 예쁜 신발만 신는 패셔니스타잖아. 평생 받을 복 넘치는 내가 또 주웠지. 진짜 마약이네, 이거. 한 번 신으니까 벗지를 못하겠어. 완전 중독이야. 이거…"
“나약해 빠진 인간들… 중독은 어찌나 잘 되는지…”
상사에게 지른 말은 아니었다. 마약 중독, 도박 중독, 알코올 중독… 무심코 쓰던 그 ‘중독’이란 말은 갑자기 세상에서 가장 저주스럽고도 무서운 말이 되었다.
“응, 응?? 김 대리 지금 나 효도신발 중독이라고 그렇게 모질게 말하는 거야?”
“아, 아니에요. 저한테 한 소리예요. 저도 알고 보니 나약한 인간이었더라고요.”
그래, 엔지니어가 되기로 한 것도 그런 것이었다. 직장인이라는 것에 다른 점은 없다 하더라도 좀 더 개인적이고 나와 컴퓨터와의 대화만 잘 통하는 직군이라 좋았었다. 세상에 답 없는 질문이 천지인데 그래도 답이 있는 수학을 좋아하듯이… 그렇게 나와 컴퓨터… 심심해도 나름 평화로왔었다. 하루 종일 일 하고 또 하고, 퇴근 시간에 아랑곳하지 않고 또 일하고… 그런 나를 일 중독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지만, 딱히 일 말고 할 것이 없었을 뿐이다. 사람을 만나며 어색함을 피하려고 뭐든 노력을 해야 하는 그런 수고보다 일이 더 쉬웠을 뿐이다. 그런데, 사람이 싫다던 나도 결국 중독된 것은 한 남자다.
“뭐에 중독인데? 회식 너무 자주 해서 알코올 중독 걱정되면 절대 그런 걱정 말어. 나를 봐. 내가 한 회식 자리 소주 양에 김 대리가 자유형 오십 메타를 할 수 있을 정도인데도 멀쩡하잖아. 하하.”
“아니… 아직도 본인이 중독인 걸 모르세요?”
“어허, 아니래도. 그나저나 왜 그 신줏단지 같은 핸드폰 안 데리고 다녀? 전화 오는 것 같던데? 기다리는 전화 있는 거… 이제… 아닌가?”
안 부장은 역시 알콜성 치매기가 있다. 그 밤이 있었던 다음날, 출근은 했지만 하루 종일 산송장처럼 넋을 잃고 있는 데다 이미 한 대리가 언질을 모두에게 날려서 다행히 이유는 모르는 것 같지만 헤어진 것만큼은 온 사무실이 다 아는 판에 잠시 그 중대한 최근 뉴스를 잊고 무심코 말을 꺼내다가 혼자 민망해하고 있다.
“네, 맞아요. 저의 속만 썩이던 연애는 끝났어요. 그러니까 핸드폰 울려봤자 서버실 아님 본사라고요. 줘 보세요. 분명히 제 사수일 거니까..”
“김 대리… 지금은 너무 힘이 들어 죽겠지만 조금만 지나면 또 잊어지는 거야. 밀레니엄 시대를 맞이하여 속 안 썩이고 착한 남자 만나면 싹 다 잊을 거야. 지나간 버스 계속 쳐다보고 있지 말고 다음 호를 기다리자고. 달래줄 술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고. 난 알코올 중독은 아니지만 애주가니까.”
알코올 중독 아니고 애주가인 안 부장이 잊혀진 가수의 잊혀진 노래를 흥얼거리며 오늘 아침 네 번째 커피를 가지러 사라졌다. 그렇게 쉽게 좋아하는 감정이 잊힌다면서… 왜 본인은 이십 년 전 노래를 매일 같이 흥얼거리는 걸까… 안 부장이 사라지고도 한참 동안 복사기를 달래 보느라 그가 두고 간 핸드폰을 잊고 있다가 프린트물을 제대로 챙기고서야 부재중 전화를 확인했다.
연락처에 없는 번호…
그것은 ‘서버실’도, ‘여의도’로 저장된 본사 사무실도, ‘독종’이라고 저장되어 있는 내 사수도, ‘셀프 효도’로 저장되어 있는 효도신발 매니아 사장도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이 번호를 안다. 번호를 다 누르면 별이 되는 이 번호를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한참을 핸드폰 액정만 바라보고 섰다. 아무 생각도 나지가 않는다. 그의 말대로 우리는 그다지 정리할 것도 없는 사이인데… 무슨 일인지 다시 전화를 해 볼까 하다가 그냥 닫아 버렸다. 문득 그 마지막으로 보았던 무표정한 그의 냉담함이 되살아나 온몸에 한기가 들었기 때문에…
그래… 잘했어… 중독을 끊는 건 죽을 듯 힘들어도 조금씩 참는 것부터 하는 거야.
“김 대리, 금요일 뭐 할 거야?”
한 대리는 다정하게 ‘윤조야’라고 부르던 친한 오빠에서 다시 직장 동료로 돌아와 있었다.
“직장인이 뭐 화요일 다르고 금요일 다르나요 어디… 뭐 또 동네에서 고등학교 동문들이랑 만화나 읽던가 하겠죠. 그래도 금요일이니까…”
이 놈의 복사기는 오늘 좀 맞아야 정신을 차릴라나… 한참 밀레니엄식 코드 표기법 변환에 관한 매뉴얼을 복사 중인데 애를 먹여서 오늘은 거의 하루 종일 복사기 옆에 붙어 서 있다가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흠… 연애가 끝나는 순간 세상 어떤 날도 의미가 없어지는 건가… 나도 금요일에 뭐 따로 잡은 약속 없는데… 나랑 놀까?”
“아, 금요일이 뭐길래 이러신대요?”
“아이고… 금요일이 크리스마스이브여. 이십 대는 그런 날에 좀 민감한 거 아녀?”
가만 보면 사무실에서 가뿐히 하루 만보를 채우는 안 부장이 또 지나가다가 끼어든다. 아… 크리스마스이브…
불현듯 혹시 그래서 그가 전화를 했나…
어쨌거나 크리스마스이브에 눈이 온다면 압구정 라리에서 만나자고 했었던… 그 약속을 안 잊은 걸까… 아니다, 그럴 리 없다. 분명히 그는 나보다 먼저 이별을 했던 듯 보였기 때문이다. 부질없는 가짜 희망을 또 만들어 내려는 자신에게 화가 치민다. 그 부재중 전화 한 통은 하루 종일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김 대리, 오늘 언제 퇴근할 예정이야?”
잠깐 핸드폰을 들여다보는데 기척도 없이 물 위를 걷는 안 부장이 옆에 언제 다가왔는지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아, 진짜… 깜짝이야. 좀 기척을 내시던가… 헛기침 이런 거… 아님 제가 걸을 때마다 뽁뽁 소리 나는 지압 슬리퍼를 선물하겠어요.”
“에헤이… 안돼. 그거 발바닥 아파.”
“발바닥 아파야 머리 좋아진다던데요?”
“안돼. 여기서 더 좋아지면… 원래 직장에서 머리 너무 좋으면 미운털 박혀.”
“… 오늘 저의 퇴근 시간은 뭐 아직 정해지지 않았는데요, 워낙 일을 열심히 해서 잔업도 없는데 그래도 신촌을 빨리 들어가긴 싫고… 그런 상태라고나 할까요.”
“왜? 거기 커플 너무 많아서?”
“그거 아시죠, 부장님. 머리가 너무 좋아도 미운털 박히지만, 부장님처럼 눈치 너무 좋아도 약간 밉상인 거…”
“하하… 눈치만 빠르면 밉상이지만 어떤 해결책을 가지고서 아는 체하는 건 배려라고 하잖아. 안 그래?”
“흠… 이런 거에도 해결책이 있나요? 혹시 어디 괜찮은 청년 소개하실 요량이면 노 땡큐예요. 지금 만사가 회의적이라 잘하면 머리 깎게 생겼으니까…”
“뭐여, 카톨릭 아니었어? 실연 한 번에 그렇게 쉽게 종교를 바꾸면 쓰나… 내가 오늘 법인 카드 아닌 내 카드로 저녁 쏠게. 한 대리랑 셋이서 쏙닥하게 맛난 거 먹자구. 오랜만에 미국출장팀 단합하지 뭐. 어차피 예산 프로그램도 우리 셋이서 다 만지는 거니까… 우리끼리 송년회 한 번 해야지 했었는데… 김 대리님께서 너무 연애사업에 열중해 계셔서 언제 할까… 내사마 고민이 많았지. 오늘 딱 좋네. 크리스마스이브는 나도 가족이란 게 있으니 어려울 거 같고 말야.”
딱히 거절해서 내년에도 두고두고 봐야 하는 갑 상사의 비위를 거스를 것까지는 없다. 사실 고맙다고나 할까. 누군가가 약속을 쥐어 주는 것은 실연한 자들에게는 큰 배려이기도 하다.
작년 크리스마스이브엔 뭐했더라… 강일이 오빠랑 조약돌 삼겹살 구워 먹고 만화방 갔었지… 재작년엔? 그때도 휴가 나온 강일이 오빠랑 사당동 마포 갈비에서 돼지갈비 구워 먹고 신촌 넘어와서 만화방에서 밤샜지… 어쩌면 올해는 나도 춥지 않고 포근해서 봄 같은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낼 수 있으려나… 기대했었기에 지금 이리도 슬픈 건가…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올해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아야겠다.
다행히 주말이 아니고 여전히 일하는 날인 금요일이라 차라리 다행이랄까… 온종일 심란하진 않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