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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두고서 떼는 뒷걸음

(15)

by Hazelle

조금 불규칙한 박자로 걸음을 옮기던 여자가 결국 옆의 남자 팔을 붙잡고 점점 멀어져 간다.


“그래도… 오늘도 얼굴을 보긴 한 거니까 오백 원은 줬어야 했나…”


대만은 애써 몸을 숨기지 않은 채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꽤 성공적인 것으로 보인다. 평범하게 잘 자란 여자니까 도박꾼을 미련하게 사랑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로써 되었다. 좋은 결말이다. 욕하면서 쉽게 잊을 수 있을 것이다. 유전력 이야기를 하면서 구질구질하게 평생 생각날 때마다 울게 하지 않아 다행이다. 조금만 더 만나고 헤어질걸… 하는 마음이 한편 안 드는 것도 아니지만 분명하다. 조금 더 지체할수록 갑절로 힘들어졌을 것이다. 내가 택한 ‘이별이 두려워 미리 하는 이별 아닌 이별’이 썩 마음에 든다. 이렇게 오늘 이별함으로써 나는 평생 그녀와 이별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끝까지 보이지 않은 마음이니 멈추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모를 테니 나만 아프면 된다. 그녀는 늘 괜찮아야 하니까.


“네, 접니다. 저 이만 들어갑니다. 아뇨, 다음 주부터는 오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동안 즐거웠어요. 네… 그럼.”


통화를 짧게 마친 대만이 정문 밖으로 나갔을 때 윤조는 이미 떠난 뒤였다. 일부러 늦게 나왔으면서도 혹시나 하면서 두리번거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자 대만은 쓴웃음을 지었다. ‘다른 여자’라는 뻔한 이별 카드를 쓸 수도 있었겠지만 여러 거짓말 중 그것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분명히 이 모든 것을 계획한 이유는 그녀를 향한 사랑인데 그 이유를 거짓말로 가리기는 싫었다. 도박중독도 불치병의 일종이니 이별의 이유가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겠다 싶었다. 대학병원에서 같이 근무했던 선배가 여러 번 포커 하우스에 초대를 했지만 관심 두지 않다가 한 번 참석했던 날 강일에게서 전화를 받았었다. 만화방에서 만난 강일은 윤조가 자리를 비웠을 때 지나가는 소리로 물었었다.


“행님 근데 아까 어디였습니까. 혹시 도서관? 왜 이리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받았습니까.”


“아… 좀 얘기하기 곤란한 데라서…”


“도서관 아니면… 오데 그리 조심스러운 데가… 혹시 도박하는 하우스 이런 데는 아니지예? 윤조 맨날 하는 말이 도박, 폭력, 바람 이거 세 개는 절대 못 고치는 거라서 이런 놈은 쳐다도 보지 말아야 된다 해쌌거든예.”


그때 생각했다. 욕먹는 이별을 하면 쉽겠다고…


역시 겨울바람은 면도날을 품은 양 매섭다. 호텔 앞에 즐비한 택시들을 두고 대만은 한참 그렇게 찬 바람을 맞고 섰다. 잘 된 이별인데… 분명 그런데… 자꾸만 마음이 욱신거린다. 그녀는 어떨까… 오늘은 슬플지도 모른다. 내일쯤부터는 화가 날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며칠이 흐르면 노름꾼인 줄 몰랐다고 욕을 할지도 모르겠다. 어쨌건 조금만 아프고 미워하면서 잊어가면 좋겠다. 그러면 그녀는 괜찮을 것이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해서야 대만은 택시에 올랐다.


“아이고, 손님. 아까부터 저기 서 계셔서 택시 타시는 거 아니고 누구 기다리시는 줄 알았네요. 추운데 어서 타시지… 아, 아니면 기다리시던 분이 못 오셨나?”


사교적인 것과 오지랖 그 어느 중간쯤을 기본 소양으로 갖는 택시기사가 룸미러로 눈인사를 하면서 말을 붙였다.


“아뇨, 카드 좀 치고 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카드 치는 걸 여자 친구한테 걸렸네요. 아무래도 이제 끝났겠죠?”


“아이고… 어쩌다가… 험… 도박 끊겠다고 싹싹 비셔야겠네요. 여자들 도박에 아주 민감합니다.”


“안 빌면요?”


“안 빌면 뭐… 그냥 그대로 끝이죠. 도박은 무릎 꿇고 빌어도 어려운 케이스예요. 어서 비세요. 뭐 잘못한 주제에 자존심 세우고 그런대?”


“안 빌면 끝이라는 거죠? … 그래야죠…”


대만은 피곤에 지친 눈을 창밖으로 돌렸다. 기사는 룸미러로 슬쩍 그런 대만을 훔쳐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인사겸 괜히 말을 걸었다가 생각보다 무거운 대답에 좀 부담스럽던 참이었다.


“빌기 싫은 거면… 뭐 그만큼 마음이 있지는 않구만 뭘…”


그는 마음속 생각을 무심결에 소리 내어 놓고 혼자 흠칫 놀랬지만 대만은 못 들은 양 미동하지 않았다.


‘빌기 싫은 거면 그만큼 마음이 있는 게 아니라고… 그 평범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사치라 없는 죄도 빌고서 잡고 싶은 진심을 숨기는 그런 얄궂은 사랑은 모르시겠죠.’


대만은 답을 바라지 않고 흘린 기사의 혼잣말에 누구도 듣지 못할 대답을 속으로 했다. 출구가 없는 미로를 결국 나오는 길이란 엉성해도 거칠어도 예쁘지 않아도 그저 구멍을 뚫어 나오는 수밖에 없으니 이 이별이 예쁘기까지 한 것은 차마 바랄 수가 없다. 그런 생각을 더듬고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때 여자가 가상공간에서 보았던 그 ‘인어’와 딴 판이었다면, 하다 못해 같이 국수를 먹을 때 좀 더 요란했다면,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배경을 보고 호감을 숨기지 않았다면… 아니, 사실은 그녀와 나 사이에 이 싸늘한 인연의 실이 없었다면… 다 부질없다.


“잠시만요, 기사님.

죄송하지만 차 돌려서 구기동 쪽으로 가주시죠.”


병원을 쉰다 했을 때, 어머니는 아마 알았을 것이다. 병원을 쉬는 참에 아예 다시 미국으로 들어가자 말한 것도 어머니였다. 대답을 미루었을 때 그녀는 여러 번 묻지 않았다. 윤조와 어떻게든 정리를 하게 될 것이란 것은 그녀도 알았을 테니 몇 달간을 그저 기다리고 있는 중이란 것도 알고 있다. 이제 가도 좋겠다고 말할 참이다. 그 한 마디로 알게 되겠지.


‘참 좋은 아가씨더라.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매무새를 보면 사람이 보이니까… 그러니까 덜 아프게 해 줘야지.’


처음으로 소개한 ‘사랑’이라는 이름의 여자를 본 뒤 한참 후에야 그녀가 했던 짧은 조언이었다. 그 말은… 대만을 많이 울렸었다. ‘참 좋은 아가씨’였던 어머니가 얼마나 아팠는지… 밀물처럼 그녀의 아픔이 그대로 덮쳐 왔기 때문이었을까. 아버지가 떠난 이후 그녀는 아무리 오래된 물건이며 가구도 하나 버리지 않았다. 아니, 하나도 버릴 수 없다고 했다. 그렇게 실체도 없는 과거에 평생 묶어 둘 순 없었으니 아무리 가슴이 뚫려도 이것은 잘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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