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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두고서 떼는 뒷걸음

(11)

by Hazelle

연말 종로 한 복판의 편의점에서 가장 잘 팔리는 품목은 온장고에 들어 있는 캔커피나 호빵도 있지만 아무래도 이 시간쯤에는 음주 시에 도움이 되는 건강음료를 사느라 줄을 선 직장인들이 문전성시를 이룬다. 양복쟁이들이 하나 같이 ‘상태’라는 뜻의 숙취해소 음료를 하나씩 손에 들고 줄을 선 편의점 한쪽 구석에 뜨거운 캔 커피를 조심스럽게 마시고 있는 한 대리가 보였다. 키가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한 대리는 대부분 늘 밝은 편이었다. 오늘만 빼고… 갑자기 더 우울해진다. 저 유쾌한 남자가 오늘은 답지 않은 소리를 해야 하니 저렇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대리님!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느라 사람이 오는 것도 몰라요?”


“아, 김 대리 잘 빠져나왔네? 뭐 하긴, 사장이 이미 강을 건넜더만. 항상 합동 회식은 전투적이라니까… 피하느라 혼났네. 오늘따라 안 부장님 왜 이리 물귀신인지… 여기, 추운데 커피 한 잔 먼저 해.”


“설마 편의점에서 이야기하는 건 아니죠?”


“… 김 대리, 나 은근히 세련된 사람이야. 왜 이래.”


“농담이에요. 오늘따라 유머 센스 고장 나셨네요?”


한 대리는 머쓱한 듯 어색하게 웃더니 다시 뜨거운 커피에 집중했다. 마음을 가라앉혀야겠다. 한 대리가 주머니에 두었다가 건넨 캔커피 맛을 보는 중인데 핸드폰이 울린다.


“… 오, 웬일이고. 목소리가 잔뜩 기대했다가 풍선 터진 그런 목소리가 아닌데? “


“뭔데, 또. 오늘은 오빠 못 만난다. 선약 있다.”


며칠 째 신혼부부처럼 붙어 다니려고 하는 고향 선배다.


“진짜?? 누구 만나는데!!”


이 오빠가 진짜… 내가 누구 만난다니까 왜 이리 화들짝 놀라는지 모르겠다.


“왜 이라는데. 그 사람 만나는 거 아니다. 한 대리님이랑 좀 할 얘기 있어서…”


아뿔싸.

갑자기 어젯밤 대만과의 만남이 생각나는 강일이었다. 아무래도 사촌 형이 이 얄궂은 이별 조작단에 영입되었음에 분명하다. ‘새 여자’ 카드를 쓸 모양인데 그렇다면 끝은 나되 자존심에 상처 입은 여인은 한동안 심한 자신감 결여나 끝이 안 보이는 우울의 우물에 빠지거나 하는 부작용이 심히 걱정이 되는 상황이다. 희한하게 어떤 스릴러 영화보다 더 긴장된다. 내가 왜 남의 이별을 이리도 걱정하는가… 온갖 생각이 그 짧은 찰나에 스쳐 지나느라 잠시 침묵하는 사이 수화기 너머 건조하고 담담해서 더 오싹한 윤조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오빠, 할 말 없음 끊을게. 나 지금 가봐야 돼.”


“아! 잠깐, 잠깐만. 나 할 얘기 있어.”


“아, 뭔데!”


“… 그거 알재? 니는 아구찜 제일 좋아하지만 나는 그 콩나물 산 같이 쌓인 거 징그러워서 안 좋아하는 거? 내는 매운탕에 들어간 생선 진짜 좋은데 니는 물에 빠진 생선은 안 먹는 거? 어떤 사람이 나를 좋아해도, 싫어해도 그 인간 하나다. 그 인간 하나의 의견이지 모든 사람이 동의한 게 아니다. 그거 잊지 마라.”


“뭔 소린지… 니 또 술먹었재!”


방금 이코노미 타고 여의도 간다는 사장과 겨우 분리되어 정신을 좀 챙기려 했더니 또 다른 주정뱅이가 전화로 주사를 늘어놓는 중인 것 같다.


“… 깔깔대고 웃는 날 있으면 펑펑 우는 날도 있다이가. 마음 단디 챙기고… 잊지 마라, 내한테는 니가 매운탕에 빠진 생선이다.”


“아, 진짜 입에서 험한 말 나올라하네. 왜 정신없게 전화해서 매운탕 타령이고. 미쳤나.”


“늦게라도 뭐… 누구 필요하면 전화해라. 오늘 안 잔다.”


“연말에 시험이라도 있나, 왜 안 자는데.”


“뭐… 멀쩡하더라도 나중에 한 대리랑 이야기 끝나면 전화해라. 기다린다.”


횡설수설 암호 같은 소리를 잔뜩 늘어놓던 강일이 먼저 일방적으로 전화도 끊어 버렸다.


“… 그 강일 씨? 우리랑 설악산 같이 갔던?”


“네… 뭐 근데 별 이상한 소리만 하더니 먼저 끊네요… 아시죠? 저 요즘 또 그 사람이랑 연락 안 되는 거… 오빠가 보기엔 아마 다른 여자가 생겼다고 생각하는 거 같아요. 오늘 한 대리님이랑 따로 이야기하기로 했다니까 혹시나 싶어 걱정되는지 미리 막 반창고를 발라줄라 하네요… 반창고는… 상처 난 다음에 붙이는 건데… “



“아… 다른 여자… 그다지 나쁘지 않은 아이디어인데…”


이게 무슨 신기술 개발 아이디어 공모전인가… 남의 이별의 이유를 두고 좋은 아이디어, 나쁜 아이디어…


“… 다 마셨지? 내가 저쪽 건물 계속 확인했는데 다행히 우리 찾으러 나오는 인간들은 없네. 하긴, 저 집은 안주가 요만큼씩 나오니까 입이 줄어서 기쁜 건지도 몰라. 우리도 이동할까?”


여전히 직장인들로 붐비는 편의점의 좁은 통로를 비집고 나와 다시 차가운 종로 길 한복판에 섰다. 이 시간에 조용한 카페는 어렵고 또 술집을 가려나 생각 중인데 한 대리가 팔을 살짝 잡아끌더니 대로변에 서서 택시를 무턱대고 잡는다.


“이 시간에… 어디로?”


엉겁결에 따라 오른 택시 안에서 뒤늦게 질문을 해본다.


“아저씨, 남산 하이얏트로 부탁합니다.”


“네?? 이 시간에 하이얏트는 왜?”


“… 김 대리 걱정 마. 나 믿지?”


“우리가… 호텔 가는데 믿고 안 믿고 할…”


“걱정 마. 걱정하는 일 없어. 호텔은 잠만 자는 데가 아냐.”


아니 그럼… 숙박업소인 호텔이 잠만 자는 데가 아니라면… 밤 열 시가 다 되어서 밥을 먹을 건가… 사실 이 시간에 호텔 식당은 밥을 팔지도 않을 텐데… 아니면 지하에 있는 제이제이 클럽을 갈건가. 같은 프로젝트 하는 갑이랑 을이랑 딱 단 둘이서 마주 보고 몸을 흔들자고? 것도 아닐 텐데… 대체 감이 잡히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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