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걔 오늘… 아니 당분간 전화 안 해.
이모한테 무슨 일 있는 것 같다고 엄마한테 전화 왔었어.… 걔 친가 쪽에 좀 문제가 있나 봐. 그 잘난 놈 트라우마라곤 딱 그거 하난데… 그게 많이 크긴 해도… 어쩐 일로 이번엔 여자를 만나나 했더니…”
잘 생긴 자기를 안 받아주는 나를 탓하면서 이미 동동주 단지를 두 개나 비운 장비 한 대리가 화장실로 사라진 지 한참 지나서야 나타나자마자 하는 소리였다.
“그래서… 그 트라우마가 뭔지 물어보면 말해줄 건가요?”
“아니. 그건 직접 들어. 내가 말했다간 또 그 미친놈이 난리 나.”
“동동주를 한 단지 더 마시게 해도?”
“그러면 나 토하는 동안 두드려 줘야 할걸?”
“…”
한 대리는 호빵맨으로 통했는데 굳이 얼굴이 그렇게 콤파스로 돌린 듯 동그랗다기보다는, 술에 취하면 희한하게 볼 중앙만 동그랗게 빨개지는 현상을 띠어서 내가 지어준 별명이었다. 호빵맨이 그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를 띠고 아직도 반이나 차 있는 내 사발에 동동주를 채워 준다.
“김 대리야.
우리 그래도 꽤 역사가 있는 사이잖아? 그 재미없는 미시간 출장도 같이 가고, 나이아가라 민박집도 같이 가고…
김 대리 한국 돌아왔을 때 좋다던 동창 놈이 후배랑 눈 맞은 거 바로 알고 울고 불고 난리 났을 때도 내가 야밤에 뛰어나와서 달래줬잖아. 기억나제? 내캉 안 사겨도 된데이. 그래도 잘 들어레이. 그놈은 아니데이. 이 오빠야 말 잘 들어라이. 더 속 썩기 전에… 어쨌거나… 제주도 가서 별일 없었고?”
분명 무언가를 알면서도 말을 못 하는 모양 한 대리는 미안한지 쓸데없는 말이 많았다. 나도 더 이상 캐고 싶지 않았지만 아직 많이 알지도 못하는 한 남자 때문에 내 기분이 이토록 롤러코스터를 탄다는 것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오빠야, 일단 이 동동주 한 사발 더 싸나이답게 쫙 들이키고, … 일단 다 들이키고!! 오케이. 자 이제 말해봐라.
왜 그놈아는 아닌데?”
“생각을 해봐.
김 대리 얼마나 잘 컸어? 얼마나 부모님이 애지중지 키웠어? 공부 잘 시켜서, 시골에서 서울 유학 보내 가지고, 잘 졸업해서 엘리트로 잘 살다가 좋은 남자, 파지티브한 남자 그니까 내 같은 놈 만나서 결혼해서 토끼 같은 새끼들 낳고 에버 애프터 잘 살아야지! 안 그래? 그런 면에서 그놈은 전혀 아니라고. 갸는 지향하는 바가 전혀 그런 방향이 아니라고.”
“그러니까, 아무리 이종사촌 형이지만 한 대리님이 어떻게 그렇게 잘 안다고요!!”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나…
좌중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회식 자리에서 드물게 재수 없는 타이밍이란 마침 우연히 입 다문 순간 나만 혼자 딴 소리 크게 할 때랄까…
“있어봐 봐… 김 대리, 그 한 대리 사촌 형 장 선생이랑 진짜 잘 되는기가? 마, 우리 김 대리 의사 사모님 되어서 이런 노가다 안 할랍니다… 하고 때려치우면 우리 예산 시스템은 우예 되는기고? 우히히히”
뭔 쌍팔년도도 아니고, 세 번 만나고 결혼할 거면… 우씨 좋겠다… 우씨… 내가 미쳤나 보다…
수요일이 되도록 남자는 연락이 없었다.
나에게는 미친 듯 긴 사흘이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짧디 짧은 사흘일지도 모른다.
“대체 을이 왜 갑의 워크샵까지 따라가야 하는 건데요?”
정말 기가 차는 노릇이다. 99퍼센트 남자, 그중 80퍼센트 아저씨인 갑 무리가 설악산으로 워크샵을 가는데, 어째서 계약직인 경리 아가씨와 프로젝트 파견 엔지니어인 내가 따라가야 하는지 모를 일이다.
“워크샵 프로그램 중에 예산 시스템 인수인계 간략화 방안 연구가 있대잖아. 그러면 김 대리가 설명해야지 누가 해.”
“아우… 그걸, 그러니까, 11시에 술 처먹고 논의한다고요??”
“… 뭐 다 그렇지… 그리고 교육도 잡혔던데?”
“쳇… 제정신에도 집중 안 하는 그 아저씨들이 술 드시고 수업도 듣는다굽쇼??”
“휴… 진짜 미안하지만서도… 그 지금 김 대리가 하고 있는 예산 프로그램이 문제가 아니고, 다음 시즌 정보계 갈아엎을 때 탑 파트는 우리가 해야지. 그러니까 지금 꼬와도 좀 참아야 된데이…”
여의도 구 증권가 한 복판에 있는 본사에 복귀했지만 오후에는 갑들의 워크샵에 동원되어야 할 판이다.
“아니 그 아저씨들이랑… 2박 3일 동안. 말이되요?
저 그냥 밀레니엄 버그 잡을게요. 한양증권 보내주세요.”
“안 된대도. 상무가 김 대리 꼭 와서 예산 시스템 설명도 신입들한테 하라고 했어. 따로 보너스 준대.”
보너스를 준다는 소리에 입을 닫은 것은 아니다. 어차피 워크샵을 가면 핸드폰도 잘 안 터질 테고… 그러면 기다리지 않을 핑계가 생기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랬다. 그 남자의 연락을 일분일초 기다리고 있었다.
“근데… 설악산 어떻게 가요? 부장님이 데려다줘요?”
“당연하지. 어차피 나도 다음 프로젝트 설명 때문에 가야 하는데 뭐. 같이 가면 되지.”
서울대 공대를 조기 졸업하고, 마흔이 넘은 나이에 단 한 번도 연애를 해 보지 못한 수재 출신의 부장은 분명 갑이고 나이도 더 많을 기름집 부장보다 훨씬 센 연봉을 받지만 그들에게 충실해야 하는 을이다. 외국계 컨설팅 회사가 대부분 그렇듯 프로젝트를 두세 개 맡은 엔지니어들은 정신없이 본사와 사이트를 날아다녀야 했다. 그렇다 해도 독립된 회사 직원인 내가 갑들의 워크샵까지 참석하는 것은 여전히 이해 불가하다.
“야, 그래도 넌 돈 벌잖아. 대충 그러려니 하고 살아. 나처럼 아직 학교에서 빌빌대면 얼마나 삶이 팍팍한지 아냐? 요새같이 취업난에 그만 불평해. 그나저나 오빠가 설악산까지 태워줘?”
“뭐?? 오빠 차 없잖아.”
나는 서울 사람들이 부르기로 ‘시골’이라 지칭되는 그런 지방 소도시 중 한 곳의 남녀공학을 졸업했다. 말이 남녀공학이지 철저한 남녀 분반이었는데 고등학교 시절엔 그리 내외를 해대다가 같은 지역 대학이라도 와서 동문회를 하다 보면 세상에서 그리 친한 사이가 될 수 없다.
나 보다 한 기수 위인 강일이 오빠는 연대 세라믹공학 전공 중이다. 집은 잘 살지만 부모 욕심에 못 미치는 학과를 갔다고 집에서 별로 지원을 못 받아 늘 궁상스러운 편이었다. 입은 또 고급이라 점심때면 70번 버스를 타고 여의도 한 곳을 정해 근처 취직한 후배들을 벗겨먹기로 유명했다. 오늘은 내가 당첨.
“어머, 얘 촌스럽기는? 나 오늘 여기 올 때 버스 안 탔잖니. 나 내 차 타고 왔잖니. 나 오너드라이버잖니. “
“차 샀다고?? 백수 주제에?? 점심값없어서 후배한테 칼국수 얻어먹는 주제에??”
“어허!! 백수라이. 내 이래 봬도 스카이 학생 아이가.
가스나, 오빠야가 국내 굴지 변기 회사 취직하면 칼국수 백 그릇 사준다안카나. 그나저나 완전 멀쩡한데 진짜 싸게 주고 샀어.”
그가 말한 간단한 이 한 문장 사이에는 엄청난 진실과 또한 거짓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 ‘완전 멀쩡한데’ 이것은 거짓이요, ‘진짜 싸게’ 이 부분은 진실일 것이다.
누군가가 폐차비용 아끼는 값으로 넘겼으니…
단돈 20만 원… 고철값도 아닌 가격에 차를 사다니…
“내가 군대 가기 전에 드리프트 좀 했던 거 알지? 군대에서도 제일 고난도 보직, 장군 운전병이었던 거 알지? 내가 설악산까지 쫘악 드라이브해 줄게. 내 또 설악산 가는 길은 눈 감고도 간다이가. 우리 꼰대가 강원도 쪽 골프 회원권 있었거든. 이 놈의 썩은 나라, 아니 나라 녹을 먹는 군인이라는 인간들이 나라 재산인 사병을 막 그리 지 머슴처럼 쓴다이가? 수양대군이야 뭐야, 마 어쨌거나 참말 다행으로 이 오빠야가 지금 사귀는 아가씨도 없고 하니까 우리 직장인 스트레스도 풀 겸 장 코스로다가 쫘악 드라이브 모셔줄게. 칼국수 값으로 충분하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