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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Nov 08. 2023

너에게도 또 나에게도


자화상


 '너는 특별하고 고귀함을 가진 단 하나뿐인 자녀야. 

 네가 가진 재능과 어떤 조건이 아닌 숨 쉬며 산다는 사실만으로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 

 이 땅은 너를 위해 창조되었고 만물은 너만이 가진 아름다움에 반응한단다.'

 이 글은 비와이의 노래 <자화상 pt.2>를 듣고 내용의 일부를 따와서 써본 것이다. 노래를 듣다가 내 삶 속에서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지쳤을 때, 이러한 보편적이고 무한한 사랑의 표현에 무릎 꿇었던 장면이 떠 올랐다. 또 상황에 따라서는 이런 식의 존재에 대한 무한 긍정의 말이 겉돌 때가 있고 오히려 나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해주는 구체적인 충고가 도움이 되었던 기억도 생각났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지쳤을 때 어떤 말과 행동이 도움이 되었는가를 생각해 본다. 비와이 노래 가사처럼 뭘 해서가 아니라 존재 자체로 너는 소중하다고 말해주었던 사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묵묵하게 곁을 지켜주었던 사람, '너는 혼자가 아니야'라고 말하며 적극적인 표현으로 다가와준 사람, 내가 지금까지 해오고 이룬 것들을 상기시켜 주면서 '너는 할 수 있고, 더 잘할 수 있어.'라고 멱살을 잡고 끌어주었던 사람...... 상황에 따라 각각 다른 이야기라 모두 다 잊을 수 없이 고맙고 하나의 답을 찾을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이 생각했을 때, 나에게만큼은 분명한 답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떤 사람이든 무엇을 하든 존재 자체로 이미 소중하다는 말을 해주는 사람도 정말 고맙지만 내가 이상 아무것도 없을 만큼 지쳐 쓰러져 있을 때, 그때 내가 내적으로 원하는 것은 쓰러져 있는 상태로 소중한 내가 아니라 일어서서 나아가고 싶어 하는 나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고, 앞으로도 살아있는 한은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당장은 고통스럽더라도 문제를 지적해 주고 이끌어준 사람들이 두고두고 은인처럼 기억된다.



들을 따라 해라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 상황에 따라 다 다르게 도움이 된다'가 아니라 '나는 분명하게 이런 종류의 사람이다'라고 규정했을 때, 더 이상 아무것도 못할 만큼 지쳐있을 때 나를 세워준 한분이 선명하게 떠 올랐다. 십여 년 전 유리드미(음악과 소리를 몸으로 표현하는 동작예술)를 가르쳐주신 하이오 선생님이다.

 삼십 대의 대부분을 바쳐 오랜 기간 했던 공부를 마무리할 무렵에 인생의 어두운 숲이라고 할만한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고, 문제는 꼬인 실타래처럼 하나가 꼬이자 연쇄적으로 더 단단하게 뭉쳐서 쉽게 풀 수 없는 난제로 드러났다. 그동안 쌓아 올린 삶의 벽들이 도미노처럼 무너지자 강하다고 생각했던 멘탈도 무너지는 도미노의 일부가 되어 같이 스러졌다. 오랜 기간동안 해왔던 유리드미의 졸업공연까지 다 마치고 논문 심사만을 앞둔, 졸업장을 받기 직전의 상황이었다. 당시로는 그 졸업장으로 취업을 한다든가 경력에 도움이 된다든가 하는 실질적인 의미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인생의 한 시절을 나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의 지극한 도움과 비용, 시간, 에너지를 집중 투여해서 했던 공부를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하게 된 것은 그 자체로 큰 낙심과 좌절이 되었다. 


 유리드미를 못한 지 몇 달이나 지나서 하이오 선생님 수업에 다시 가게 된 어느 날이었다. 우울증으로 살도 많이 찌고 연습을 중단해서 스텝도 잘 안되고 몸을 움직이는 것 자체가 힘든 심신 미약 상태였다. 나를 포함한 졸업 기수였던 사람들 다음으로 새로운 그룹의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졸업장을 받지 못한 우리들을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맨 앞줄에 세우고 사람들을 향해 말씀하셨다.

 "이들을 따라 해라. 이 사람들은 한국에서 졸업한 최초의 유리드미스트들이다."

 음악이 흘렀고 나는 사람들이 따라 하기에 부적절한 어색한 동작으로 뒤뚱거리며 겨우 틀리지 않는 정도의 동선으로 움직였다. 그 말씀을 들었을 당시에는 지금 연습을 못해서 사람들이 따라 할 만한 수준이 못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틀리지 않으려고만 애를 쓰면서 겨우 수업을 마쳤다. 그 뒤로도 무너져 내린 삶을 복원하는데 집중하느라 졸업장은 점점 더 멀어져 갔다. 


 세월이 흐르고, 살면서 어려운 일들을 겪을 때, 그 말씀과 행동의 진가를 뒤늦게 느끼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삶의 재난 중에 살찌고 주눅 들고 우울증에 걸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꼴이 되어서 나타난 제자를, 비록 졸업장을 못 받았지만 긴 시간 어렵사리 공부해 온 과정을 지켜보셨던 선생님께서 사람들 앞에 세웠다. 그리고 거짓이든 틀린 말이든 부적절한 말이든, 당당하게 권위 있게 말씀하셨다.

 "이들을 따라 해라. 이 사람들은 한국에서 졸업한 최초의 유리드미스트들이다."

 그 말씀은 이후에 내가 세상의 한 모퉁이 분식집에서 마감청소 아르바이트를 할 때, 호텔 룸메이드로 일할 때, 그림을 그려서 밥벌이를 할 때, 어떤 옷을 입고 무슨 일을 하든 고결하게 나를 지켜주는 거룩한 말씀이 되어 어떤 환난 중에서도 다시 일어서게 하는 괴력을 발휘하고 있다.



너에게도 또 나에게도


 지금의 나는 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희생으로 공부한 유리드미로 어디에도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도 이생에서 더 이상 유리드미를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유리드미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교육적인 목적도 있고, 병원에서 환자들에게 시행하는 치료목적도 있고, 무대에서 아름다운 동작으로 사랑을 전하는 목적도 있겠으나 가장 큰 공부의 성과는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중심을 잡고 다시 일어서는 힘을 기른 것이리라. 

 오랜 세월 공부하고 나에게 남은 것은 어쩌면

 "이들을 따라 해라. 이 사람들은 한국에서 졸업한 최초의 유리드미스트들이다."

 이 한 줄 문장이다.

 이 에피소드를 통해서 말하고 싶은 것은 '왕년'이나 '라떼'와 같은 자랑이 아니다. 먼지가 될 수도 있는 한 사람을 거룩하게 세우는 말씀의 힘이다.

말하자! 계속 말하자! 우리 자신을 세우는 거룩한 문장을.

나 자신에게 또 내 앞의 사람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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