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어릴 적에 난독증인줄 모르고 난독증의 어려움을 겪었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보물 같은 기억이라고들 하는 어린 시절의 독서 기억이 별로 없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한스러운 일이랍니다. (이와 관련된 글은 또 다른 연재 브런치 <읽기의 천사> 프롤로그에서다루었습니다.)
그런데, 읽기와 쓰기는 늘 같이 다니는 것 같으면서도 활성화되는 뇌의 영역이 다른지(다르다고 합니다.) 어릴 적에 책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글을 썼던 기억은 곳곳에 있습니다. '쓰는 나'에 대한 기억보다 먼저 말해야 될 것은 '이야기하는 나'에 대한 기억입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였어요. 아침 조회 시간마다 "이야기할 사람?" 선생님이 질문하면, 다들 "저요! 저요!" 손을 들었고, 선생님이 지목한 사람이 교탁 앞에 나가서 이야기를 했답니다. 담임 선생님이 키가 훤칠하시고 인상이 좋은 훈남 총각 선생님이셨죠. 아이들이 이야기를 시작하면 앞쪽 창가 의자에 앉아서 흐뭇하게 지켜보시곤 하셨어요.
이야기가 재미있으면 선생님이 소리를 내서 "하하하!" 웃으셔서 제 차례가 되면 일부러 더 과장해서 웃기게 이야기를 했죠. 아주 오래된 이야기인데, 선생님이 상체를 뒤로 꺾었다가 배를 잡고 앞으로 숙였다가를 반복하는 장면이 실재의 기억인지 상상인지 둥실! 떠오릅니다.
아침 이야기 시간마다 목에 핏대를 세우고 "저요! 저요!"를 외쳤고,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자주 교탁 앞에 나갔고,선생님을 웃기기 위한 열의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잘하는 아이'로 인정을 받기에 이르렀답니다. 내 이야기를 듣고 선생님과 친구들이 박장대소를 하며 환하게 웃어주던 그 교실을 아름답게 기억합니다.
그 후로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글짓기 대회에 나가서 상을 많이 받았고요.(자랑을 하려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 저의 글쓰기 인생에서 참 이상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초등학교 6학년 무렵 한 신문사에서 주최하는 백일장 대회에 학교 대표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동시 부문과 산문 부문이 있었고, 글제로는 운동화와 도시락이 나왔답니다. 저는 동시 부분에 손을 들었는데 선생님께서 동시에 사람이 많다고 산문으로 보냈고, 운동화에 대해서 쓰고 싶었는데, 운동화에 사람이 많이 몰렸다고 도시락으로 보내서 결국 불만스러운 채 원하지 않는 부문과 소재로 백일장을 치르게 되었죠.
악조건 속에서도 학교의 명예를 걸고 고군분투하여 전국에서 2등에 해당하는 최우수상을 받게 되었답니다.(자랑을 하려는 건 아닙니다.) 대회를 주최한 신문사 강당에 가서 상을 받는 날이었습니다. 그때 엄마가 아팠는지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기억이 안 나는데, 엄마는 기억의 장면에 없고 언니가 시상식에 가는 내 옷의 매무새를 가다듬어 주고 머리에 핀을 꽂아준 기억이 나고요. 차를 타고 외부로 나가야 하는 시상식에 (아무리 6학년이라고는 하지만) 아무도 안 따라갔을 리 없는 것 같은데, 가족이 같이 간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
산문 부문 도시락최우수상에제 이름이 호명되었고, 무대에 나가서 상장과 영광스러운 금빛 트로피를 받았습니다. 군중들이 일제히 박수를 쳤고, 신문사 기자들이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리며 사진을 찍었죠. 얼떨떨하면서도 기뻤을 겁니다. 그런데, 다음 장면이 갑자기 전환됩니다. 영예의 대상에 동시 부문 'ooo' 이름이 불렸습니다. 객석의 사람들이 대상 받은 아이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두리번거리는데 기척이 없었습니다. 사회자가 마이크에 대고 한번 더 호명을 했고, 관중석은 "안 온 것 아니야?" 하면서 웅성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관중석 맨 뒤 사람들 사이에서 까만 원피스를 입은 작은 꼬마 아이가 놀란 토끼처럼 밀려 나왔습니다. 가장자리에 앉은 관중들에게는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꼬마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빨간 카펫이 깔린 길을 걸어 나오는데 어찌나 오래 걸리는지 관중들은 일제히 꼬마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트렸답니다. 겨우 무대에 오른 꼬마가 수상을 하고 대상 작품인 '빨간 운동화'를 낭송했습니다. (마이크를 꼬마의 키에 맞게 조절하는 데도 한참이 걸렸죠.)
빨간 운동화
내 자동차
엄마도 아빠도
아무도
태워줄 수 없어요.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의 일인데 아직도 그 동시를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꼬마가 낭송을 마치자 관중들 사이에서...... 잠시......침묵이 흘렀고, 곧 다시 한번 박수갈채와 함께 웃음이 터졌고, 기자들의 카메라 플레시가 버번쩍!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서 있는 자리는 순식간에 검은 어둠에 휩싸였고, 영화 용어로 '페이드 아웃'되어 버린 것 같았습니다. 이게 바로 제 인생 글쓰기에서 일어난 참 이상한 사건입니다. 전국에서 2등이나 했는데, 그날의 기분은 정말 정말 나빴거든요.
사춘기 무렵, 책을 별로 안 읽는 가운데서도 글은 늘 썼답니다. 그림일기, 그림 없는 일기, 교환 일기, 친구와의 교환 편지를 거쳐, 결정적으로 세상에 시집이란 게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요. 꿈결같이 연한 파스텔톤 그림책에 빼곡하게 또는 느슨하게 뿌려진 까만 씨앗 같은 시어들, 작고 얇고 예쁜 시집을 끼고 다니면서 베껴 쓰면 시인이 된 것 같았습니다. 가장 순수한 형태의 문학의 꿈을 꾼 시기였어요.
유치환의 행복, 김춘수의 꽃, 김남조의 편지, 유안진의 지란지교를 꿈꾸며, 앨런 포의 애너벨리, 푸쉬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릴케의 모든 시들을 베껴썼습니다. 그러고 보니 한 번에 편지지 일곱 장씩, 열 장씩 뭔가를 휘갈기듯이 써서 3년 동안 교환한 최초의 남자 친구도 있었네요. 그 친구는 나의 실체를 모른 채 문학소녀라며 예찬하곤 했죠. 행복한 시절이었습니다. 그 남자 친구는 진짜 멋진 애였거든요.
그때 저는 문학의 눈부신 혜택을 누렸고, 문학으로 사람을 꼬실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답니다.
어린 시절, 집에, 가족에게 여러 형태의 사고가 많이 일어났어요.
생각해 보면 끔찍한 그 사건 사고의 행렬 속에서 어떻게 시집을 끼고 다니며 시를 베끼고 문학의 꿈을 꿀 수 있었는지 신기하기만 합니다. 그런 면에서는 지금도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아요. 그때와 같은 어려움은 아닐지라도 삶이란 늘 파도와 같은 크고 작은 어려움이 끊임없이 밀려오니까요. 지금의 삶 속에서도 그때의 시집과도 같은 이 브런치 플랫폼을 비롯해서 책들과 글쓰기가 있어 꿋꿋하게 잘 견뎌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이도 베껴먹은 푸쉬킨이 말했지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아라
슬픈 날은 참고 견디라
기쁜 날이 오고야 말리니
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지나가 버린 것 그리움이 되리니
참 이상한 일, 이해 안 가는 일, 답답한 일, 마음대로 안 되는 일, 막막한 일들의 먹구름 속에서, 일기든, 편지든, 베끼기든, 뭐가 됐든, 펜을 들고, 노트에 뭔가를 썼다는 사실이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참으로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아가 단단하게 서지 못한 어린 사람이 불행을 피해 도망갈 수 있는 환상 중 가장 안전하고 좋은 곳을 선택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니 '읽기의 천사'뿐 아니라 '쓰기의 천사'도 있었네요.
저에게 글쓰기는 원하지 않는 삶의 남루함이나 부조리 속에서도 나를 세우고 자존감을 지키는 고결한 행위이고, 물감 살 돈이나 레슨 받을 선생님이 없어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지속할 수 있는 일이며, 아무리 오래 먹어왔어도 결코 질리지 않는 밥 같은 존재이고, 삶의 마지막까지 함께하고 싶은, 속 깊은 친구랍니다.
나의 글쓰기 역사를 돌아보다가 글쓰기는 내 영혼의 친구라는 생각에 이르면서 오래된 노래 한 곡이 떠올랐습니다. 노랫말에서 '너'를 글쓰기로 생각하고, 김민우 가수의 열창을 듣노라니 전 생애가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면서 울컥거립니다. 여유가 되시고 마음이 가시는 분은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럼, <길모퉁이 글쓰기 카페> 프롤로그는 이렇게 마치고요, 다음 시간에 1화. 잘 준비해서 돌아오겠습니다.